서울 종로구 경복궁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26.9.20 © 뉴스1= 이종수 기자



1947년 '백범일지'를 펴내며 김구 선생은 책 말미에 실린 '나의 소원'에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중략)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고 적었다. 광복 직후의 시대에 조국의 미래 청사진을 문화에서 찾은 것이다. 문화의 힘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8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백범의 소원은 현실이 됐다.

1990년대 작은 연습실에서 출발한 K팝은 30년 만에 세계 대중 문화의 중심에 섰다. 대중음악계에선 '컬처 퍼스트, 이코노미 넥스트'라는 말이 오래 회자됐다. 문화가 길을 트면 경제가 뒤따른다는 의미다. 처음엔 기획사 마케팅 문구쯤으로 여겨졌지만 음악 팬이 드라마를 찾았고, 드라마가 화장품과 패션을 유행시켜 결국 밥상까지 바꿔놓았다.



지난해 K컬처 수출은 718억 달러(잠정)로 반도체·자동차에 이어 3위 수출 산업에 올랐다. 화장품(114억 달러)과 K푸드(104억1000만 달러)는 역대 최대 기록을 갈아치웠다. K드라마 속 '뷰티 루틴'과 아이돌 패션, SNS에 퍼진 매운맛 챌린지가 세계인의 지갑을 연 결과다. CJ 비비고는 중국식 덤플링과 일본식 교자가 오래 자리 잡은 미국 시장에 '만두(Mandu)'란 이름을 각인했다.

관광객도 크게 늘었다. 올해 들어 8월까지 방한 외국인 관광객은 1505만 명으로 전년 동기대비 21.6% 증가했다. 같은 기간 카드 소비액은 14조 원을 넘어 48.5% 늘었다. 부산 해운대·광안리를 넘어 전주, 경주 등 전국 곳곳으로 외국인 발길이 이어진다.

여행의 문법도 바뀌었다. 깃발을 앞세운 단체관광 대신 드라마 속 장면을 따라 걷고, 아이돌이 다녀간 식당 앞에 줄을 서고, 편의점 컵라면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북촌 한옥 골목에선 한복 입고 사진을 찍고, 성수동 팝업스토어 오픈런에 나선다. '구경하는 관광'이 '경험하는 관광'으로 바뀐 것이다. 노래와 드라마가 낳은 '문화 낙수효과'다.



우려도 남는다. 세계를 흔든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우리나라가 무대지만 저작권은 해외 기업이 갖고 있다. 지식재산권(IP)을 갖지 못하면 흥행의 과실은 고스란히 해외로 빠져나간다. 무대만 내주고 잔치는 남이 벌인 셈이다. 지난해 K팝 음반 판매량은 전년보다 줄었고 드라마 제작 편수도 감소하고 있다.

그럼에도 K컬처에 걸린 기대는 크다. 반도체·자동차 등 제조업의 힘으로 1인당 국민총소득은 2014년 3만 달러를 넘겼지만 작년까지 4만 달러를 넘지 못했다. 다음 도약은 K컬처가 이끌게 되지 않을까. 노래 한 곡, 드라마 한 편이 공장 하나의 몫을 해내는 시대다.

K컬처는 정부의 온실에서 자란 꽃이 아니기에 자생력이 강하다. 척박한 시장에서 기업과 창작자들이 스스로 뿌리를 내린 '들꽃'에 가깝다. 이들의 바람도 소박하다. 정부에 거창한 판을 깔아달라는 것도, 앞장서 달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정부의 과도한 애정이 부담이다. 국가 행사와 정상 외교 무대에 한류 스타들이 서는 게 익숙한 풍경이 됐지만 스타의 일정에는 숱한 계약과 투자가 얽혀 있다. 업계에선 정부의 부름이 거절하기 어려운 '청구서'로 여겨진다.

국가가 앞에 나서는 순간 문화는 '홍보물'로 비칠 수 있다. 세계 팬들이 K컬처에 열광하는 건 민간의 자발성과 진정성 때문이다.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도 세계인의 마음을 온전히 얻지 못한 중국의 '문화 굴기'가 반면교사다.

정부가 할 일은 무대 위가 아니라 무대 뒤에 있다. 해외에서 도용되고 새어 나가는 우리 창작자의 저작권을 지키고, IP가 국내에 남도록 제작·투자 구조를 손보고, 창작자가 실패해도 다음 작품에 도전할 수 있는 튼튼한 생태계를 다지는 일이 그것이다.

들꽃은 스스로 피어날 때 가장 아름답다. 백범이 바란 것도 스스로 우러나는 '문화의 힘'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