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신, 신용카드, 은행이 없는 나라에 살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흔치 않은 경험일 것입니다. 저는 있습니다. 20여 년 전 아프가니스탄, 10여 년 전 이집트와 리비아에서 겪어봤습니다. 전쟁·분쟁 취재를 위한 출장 때였습니다. 유·무선 통신이 마비됐고, 결제망이 작동을 안 해 신용카드가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은행은 있었지만 문을 닫은 상태라서 해외 송금을 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휴대전화가 먹통이 된 현지인들과 달리 개인 통신 수단은 있었습니다. 인공위성을 통해 연결되는 전화기를 가져갔기에 회사로, 집으로 전화를 할 수는 있었습니다. 위성을 통한 데이터 송신으로 기사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통신 수단은 있어 덜 힘들었습니다.
통신, 신용카드, 은행이 없는 곳에선 현금이 곧 생명입니다. 통신이 없으니 뭘 하려면 직접 가야만 합니다. 가려면 교통수단이 있어야 하죠. 낯선 곳이니 안내자도 필요합니다. 다 돈입니다. 신용카드는 그냥 플라스틱 조각일 뿐입니다. 통신이 없으니 결제가 되지 않죠. 그리고 전쟁·분쟁 지역에서 외상이 무슨 말입니까. 밥 한 끼, 물 한 병 다 '현금 박치기'입니다.
은행은 문을 닫았고, ATM기는 꺼져 있으니 매일이 불안합니다. 송금을 받을 길이 없으니 가지고 있는 돈이 떨어지면 그냥 알거지입니다. 한국 대사관 또는 영사관 도움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전쟁이 터지면 바로 철수합니다. 혹시 강도를 만나 들고 온 현금 다 털릴까봐 소총을 소지한 경호원을 고용한 적도 있습니다. 그도 믿을 수 없어 돈을 숙소 곳곳에 분산해 숨기기도 했습니다. 신발 깔창 아래에 1000달러씩, 몸 안에 찬 전대에 3000 달러를 넣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일부를 건네줄 수는 있어도 다 빼앗길 수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실제로 강도로 돌변한 현지 주민에게 현금과 카메라를 강탈당한 외국 기자들이 꽤 있었습니다. 각자도생 혼돈에선 사람이 제일 무섭습니다.
상상해보십시오. 갑자기 은행들 전산망이 마비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신용카드, 체크카드 결제가 안 되고, 온라인 송금도 막히면 어떻게 될까요? 하루이틀이 아니라 장기화되면요? 거기에 통신망까지 망가지면 또 어떻게 될까요? 사람들이 앞다퉈 마트로 달려갈 것입니다. 삽시간에 생필품이 동나고, 당장 쓸 현금이 없는 사람들은 상점을 습격할 것입니다. 생산 현장에 가서 일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나라가 아비규환의 전쟁터가 될 것입니다.
전쟁을 미사일과 전투기로만 하는 때가 아닙니다. 통신망을 교란시키면 삽시간에 상대가 대혼란에 빠집니다. 2013년 국가정보원이 통합진보당을 수사할 때 내부 회의록에서 "유사시에 KT 혜화전화국을 습격한다"는 문구를 발견했다고 발표했습니다. 혜화전화국은 정보통신망의 중추 역할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때의 습격은 물리적 타격을 의미했는데, 이젠 그럴 필요조차 없을지 모릅니다. 해킹을 통해 원격으로 마비시킬 수 있습니다. 2010년경 이란의 우라늄 농축시설이 가동 불능 상태에 빠진 적이 있었죠. 이스라엘이 개발한 사이버 악성 코드 '스턱트넷'이 이란 시설의 제어장치를 교란시켰다는 것이 정설로 통합니다. 북한이나 중국이 이런 악성 코드를 만들어 어딘가에 침투시킬 능력이 없을까요? 지금 우리는 인공지능(AI)이 해킹 프로그램을 척척 만드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시대]에 <해킹 1건에 6개 기관이 각개전투 대응 …"사이버안보청 필요">라는 제목의 기사가 게재됐습니다. 은행 보안망이 뚫리면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금융보안원, 개인정보보호위원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한국인터넷진흥원 등 6곳이 조사를 하고 대응 방침을 제시합니다. 보고할 곳은 많은데, 사전 대비나 사후 대응에 크게 도움이 되는 곳은 없는 게 현실입니다.
기사에 따르면 미국은 2018년 국토안보부 산하에 CISA(사이버보안·기반시설보안국)라는 공공·민간 통합 사이버 안보 조직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3000명 규모라고 하고요. 정부, 공공기관, 통신사, 발전소, 은행, 방송국, 산업시설 등의 사이버 보안 문제를 관장하는 기구입니다. 우리에겐 이런 통합 조직이 없습니다.
국가정보원을 포함해 한국 정부에서도 CISA와 유사한 '사이버안보청' 설립을 검토한 적이 있다는데요, '사이버 감시 빅브라더를 만들려는 것이냐'는 시민사회의 반대가 예상돼 구체적인 논의가 중단됐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 평온한 세상을 사는 데 익숙해져 다가온 위험에 둔감해진 것은 아닐까요? 최근의 은행 해킹 사건이 일종의 경고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조를 무시하면 재앙이 온다고 역사가 말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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