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건설사들은 해저터널 공사에서 화약 폭파 방식을 대신해 거대 장비로 암반을 깎는 TBM 굴착 공법을 진화시켰다. 사진은 해저터널의 수중 굴 착을 위해 암반을 깎는 TBM 장비./그래픽=신재민 편집위원


2040년 세계 최대 물류 허브가 되는 싱가포르 투아스(Tuas) 해안의 공사현장에는 건물 12층 높이 1만3500t(톤)의 콘크리트 구조물 수백 개가 블록처럼 연결돼 있다. 육지와 바다를 연결한 구조물 위로 모래와 자갈을 채워 새로운 땅이 만들어진다. '케이슨 공법'이 적용된 구조물이다. 이 공법은 바다의 연약한 지반을 단단하게 해 주기 때문에 국토가 비좁은 싱가포르에서는 필수 기술로 통한다.

DL이앤씨와 현대건설은 2021년 투아스 터미널 1단계 준공에 이어 2029년 2단계 공사를 완성한다. 국내 건설사들은 콘크리트 온도를 자동 제어하고 균열을 막을 수 있는 케이슨 공법을 진화시켰다. 김광섭 현대건설 싱가포르 투아스 현장소장은 "여의도 1.5배 면적의 바다를 매립하기 위해 총 227개의 케이슨을 연결했다. 이는 싱가포르 케이슨 공사의 최대 규모"라고 설명했다.



바다라는 거대 자연에 맞서 고난도의 해양토목 공법을 지속해서 개발해 온 국내 건설사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키워가고 있다. 1990년대 새만금 간척을 필두로 항만 인프라 공사의 기술력을 발전시켜 온 국내 건설업계는 해외 강국들이 수주 경쟁을 벌이는 싱가포르에서 굵직한 공사들을 따냈다. 국내의 여러 공사 현장에서도 해저터널 공법을 우리만의 독자 기술로 발전시키려는 여러 노력들이 있었다.

DL이앤씨가 2031년까지 공사 예정인 여수-남해 해저터널(국도 제77호선)은 수중 굴착의 위험성을 기술로 극복한 사례다. 해저터널 공사는 바다 밑 암반과 퇴적층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정밀한 지반 조사와 고도의 굴착 공법이 필요하다. 국내 기술진은 3차원(3D) 탐사를 통해 설계 오차를 줄여 시공 정확도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높였다.

그간 주로 내륙 공사의 지하 굴착에 사용한 TBM(회전 칼날로 암반을 깎는 방식) 기술을 해저터널에 적용한 사례도 있다. 2028년경 완공이 계획된 한강하저터널은 현대건설이 TBM 공법을 적용해 시공하고 있다. 추진력이 1만7100t에 이르는 장비를 동원해 기존 공법 대비 굴착 기간을 7개월 단축했다. 롯데건설은 전남 해남군 화원면과 목포시 달리도를 잇는 화원-달리 해저터널을 2028년 준공한다. 과거엔 TBM 원천 기술을 독일·일본 등에 의존해왔지만 이젠 장비 운전·제어기술 등 핵심 기술이 국산화됐다.



국내 건설산업은 중국 건설사의 저가 공세에 맞서 기술로서 정면 승부하며 국제 발주기관들의 신뢰를 확보했다. 부산과 거제를 잇는 거가대교의 가덕해저터널 공사는 준공 전까지는 초연약지반 조건을 극복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수심 48m 외해의 해일을 피하기 위해 대우건설과 삼성물산은 육상에서 제작한 콘크리트 함체 18개를 바다로 가라앉혀 터널을 연결했다. 해외 전문가들은 "토목 기술의 한계를 넘은 쾌거"라고 평가했다.

이 같은 시공기술력의 발전은 부산 가덕도신공항 부지조성공사 등 바다 매립 공사의 핵심 기술로 이어졌다. 대우건설 기술연구원은 대형 가력 장비와 반력 구조물을 실제 조건과 동일하게 설치하고 실험을 진행해 안전성을 검증하고 있다.

정대기 대우건설 기술연구원 책임은 "거가대교와 가덕공항을 비롯해 베트남 하노이 더랜드마크, 싱가포르 인피니언 헤드쿼터, 용산 아모레퍼시픽 본사 등의 사전 실험이 이곳에서 이뤄졌다"고 했다. 그는 "건설업계가 찾아야 하는 해답은 기술 개발뿐이다. 단기 수익에 연연하지 않고 기술의 지속성을 목적으로 R&D(연구개발) 투자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