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 교육에서 글쓰기가 차지해 온 위상은 독보적이다. 학부와 대학원, 문・이과를 막론하고 기말보고서나 논평문과 같은 글쓰기 과제를 제출하는 것이 학생의 학업성취를 촉진하고 평가하는 보편적인 방식으로 활용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근래 AI의 문장 생성 능력, 나아가 자료 분석과 추론 능력까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룸에 따라 대학 교육에서 글쓰기가 가지는 의미가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AI 사용 여부의 확인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학생들은 수업 정책과 무관하게 AI를 사용하여 글쓰기 과제를 작성하고 있고, 일부 교수자들은 학교 밖 실무의 현장에서 이미 글은 AI가 써주는 것이 현실이 되었는데 대학 글쓰기 교육이 더 이상 의미가 있겠냐는 무용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학습은 글쓰기가 아닌 토론과 발표로 도모하고 평가도 구술이나 지필 고사와 같은 전통적 방식으로 대체하려는 움직임도 적지 않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글쓰기는 단지 배우고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이 완료된 뒤에 그 내용을 정리하는 사후적인 과정이 아니다. "글쓰기가 곧 사고다"(Writing is Thinking). 한 네이쳐 계열 생명공학 학술지의 최근 편집자 사설의 제목이다. 연구자들이 AI에 의존하여 글 쓰는 일이 늘어가고 있는 현실을 두고 과학에 있어서 글쓰기는 단지 연구의 결과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지 않고 연구 과정 전반에 걸쳐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견하고 자신의 생각을 체계적이고 일관되게 정리할 수 있게끔 돕는 활동이라는 점을 상기하려는 사설이다.
초기불교 경전에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마음의 작용을 나뭇가지 사이를 산만하게 옮겨다니는 원숭이에 곧잘 비유하는데, 이처럼 무질서할 수 밖에 없는 마음 속 생각을 명료하게 구조화하여 논리적 빈틈을 드러내고 개선할 수 있게 돕는 것이 곧 글쓰기이다. 연구자라면 누구나 글을 쓰는 도중에 자신이 처음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바꾸게 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글쓰기 활동이 다른 형태의 학습 활동에 비해 고차원적 사고의 발달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은 일찍부터 여러 연구에서 지적되어 왔다. 미국에서 300여명의 학부 생물학 수업 수강생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고전적인 연구에서는, 매주 실험 시간의 한 시간을 할애해 논증적 에세이를 작성한 학생들이 같은 시간 동안 추가적인 실험과 퀴즈를 수행한 대조군보다 한 학기 만에 분석이나 추론과 같은 비판적 사고 능력이 뚜렷이 향상되었다는 점을 보였다.
비슷한 발견은 다양한 연구와 메타분석에서도 되풀이되었다. 또 이처럼 그 효과가 명확한 글쓰기 과제의 구체적인 교육 메카니즘을 해명하려는 연구들도 등장했다. 단지 어떠한 형태로든 글을 산출해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논증적인 방식으로 글을 쓰면서 기존 정보를 논리적으로 재조직해보고 자신의 이해와 추론을 점검하는 인지적 활동이 비판적 사고력의 신장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논증적 글쓰기 학습은 토론, 발표와 같은 구술 활동이나 지필 문답과 같은 단순 서술형 과제로는 대체되기 어려운 독자적인 교육 효과를 지닌다.
따라서 분과적 전문성과 더불어 복잡다면한 문제를 스스로 분석하고 해결하는 능력을 함양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대학 교육에서 글쓰기 자체를 AI에 일임하고 손을 떼는 것에는 신중해야 한다. AI를 활용하는 역량 역시 앞으로의 대학 교육이 길러야 할 중요한 능력이지만, AI를 활용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자신의 이해와 요구를 명료한 언어로 표현하며, AI가 제시하는 답변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능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능력은 기초적인 글쓰기 훈련과 분리되기 어렵다. 남들에게 읽히기 위한 글쓰기에서 자신의 사고를 정리하고 점검하기 위한 글쓰기로, 또 AI의 활용 능력을 뒷받침하기 위한 글쓰기로의 방향의 수정은 필요할지언정 대학이 글쓰기 교육 자체를 방기하는 것은 곧 다음 세대가 비판적 사고력을 체계적으로 훈련할 기회를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혹자는 이미 일상 모든 곳에서 AI가 스며들어 있는데 대학에서 AI프리(free) 글쓰기 교육을 강제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AI 사용이 차단된 전산실 환경을 구축하여 매주 기초 교양 수업이나 글쓰기 수업 시간의 일부를 글쓰기 실습 시간에 할애하도록 하거나, 전산실 공간이 부족하다면 AI 사용이 차단된 노트북을 대량 구비하여 필요에 따라 일반 강의실을 글쓰기 실습 공간으로 전환해서 활용하면 될 일이다.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학습센터에서도 학생들이 AI의 도움 없이 직접 사고하고 글을 작성할 수 있는 'AI 프리 글쓰기 공간(AI-free writing space)'를 마련할 것을 교수자들에게 권장하고 있다. AI프리 교육의 필요성과 이를 위한 기반시설 구축에 대한 국내 교육계의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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