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4월30일. 서울시가 잠실 제2롯데월드 건설사업을 조건부로 가결했다. 이 결정으로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은 자신의 14년 묵은 숙원사업이 현실화되는 기쁨을 누렸다.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68)의 요즘 처지가 당시 신 회장과 오버랩된다. 최근 대우일렉트로닉스(이하 대우일렉)의 우선협상대상자로 동부가 선정됐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종합전자회사'를 꿈꿔온 김 회장의 30년 '한'이 풀릴 지에 세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우일렉 인수 이후 '로드맵' 지시

"대우일렉은 그룹의 전자사업 역량을 강화하는 데 적합한 회사이고 다른 계열사와 시너지도 낼 수 있다. 인수 이후 제대로 키울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라."

지난 8월21일 삼라마이더스(SM)그룹, 스웨덴 일렉트로룩스와 함께 대우일렉 인수전에서 경쟁을 벌이던 동부그룹이 최종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자 김 회장이 실무진에 지시했다고 알려진 내용이다.

이날 동부그룹은 3500억원대의 인수가격을 쓴 SM그룹과 2900억원대의 일렉트로룩스를 제치고 3700억원대를 불러 대우일렉을 품은 것으로 전해졌다. 인수 대상은 최대주주인 캠코 지분 57.4%와 주채권은행인 우리은행(5.37%)·외환은행(6.79%)이 보유하고 있는 지분 전량이다.

김 회장의 이번 대우일렉 인수에 대한 의지는 단호했다. 일각에선 그가 사재를 출자해 대우일렉 인수에 나선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실제 투자은행(IB)업계에선 8월21일 실시된 대우일렉 본입찰에서 동부그룹이 인수자금 출처에 대한 증빙자료를 제출하면서 김 회장 등 오너 일가의
사재 출자 계획이 포함됐다는 뒷말이 무성하다.
 
김 회장과 특수관계인의 사재출연 규모가 500억~1000억원가량은 될 것이라는 얘기다. 이에 대해 동부그룹 측은 "조금 앞서나가는 얘기"라며 김 회장의 사재출자설과 관련해 성급한 해석을 자제해달라고 밝혔다.

그러나 김 회장이 대우일렉 인수를 통해 지난 1980년대 반도체 웨이퍼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키워오던 종합전자회사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첫발을 내디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전자산업 수직계열화 '시나리오' 초읽기 

김 회장은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나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등 1세대 창업주들과 경쟁하며 동부그룹을 일궈냈다. 하지만 늘 김 회장의 마음 한켠에는 종합전자회사에 대한 열망과 꿈이 남아있다.

그도 그럴 것이 동부그룹은 그동안 보험·증권 등 금융부문과 철강·화학·반도체 등의 굴뚝산업을 축으로 사세를 키웠으나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주력계열사들이 주춤하면서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해졌다. 대우일렉을 통해 전자산업으로 체질개선을 이루겠다는 김 회장의 결단이 내려질 법한 시점이다.

동부그룹은 지난 1983년 반도체 웨이퍼회사 코실을 설립하며 전자산업에 뛰어든 이후 2002년 아남반도체를 인수해 지금의 시스템반도체회사인 동부하이텍을 키웠다. 이어 전자재료(동부CNI), LED(동부LED·동부라이텍), 산업·서비스용 로봇(동부로봇) 등으로 전자사업 영역을 넓혀왔다.

때문에 국내 가전업계 3위인 대우일렉을 손에 넣게 될 경우 그룹의 무게 중심을 '하이테크'로 옮기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김 회장이 꿈꾸는 '종합전자기업'의 기본 골격을 완성하는 셈이다. 

우선 대우일렉 인수로 가장 큰 시너지효과가 기대되는 곳은 동부하이텍과 동부제철. 동부하이텍의 경우 가전제품에 들어가는 시스템 반도체 등 다양한 반도체 칩을 대우일렉에 원활하게 공급할 수 있고, 냉장고와 세탁기에 쓰이는 냉연강판 제조사인 동부제철은 대우일렉을 통해 든든한 수요처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대우일렉이 갖고 있는 최대강점인 해외 네트워크를 동부의 기존 계열사에 적용할 수 있다는 점도 김 회장이 예상하는 시너지 효과 중 하나다. 대우일렉은 멕시코·콜롬비아·쿠바·베네수엘라 등에서 지속적인 해외사업을 벌여왔고 일부 국가에서는 세탁기나 양문형 냉장고 등이 현지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는 등 강세를 보여왔다.

따라서 김 회장은 대우일렉의 해외 네트워크를 활용, 동부하이텍과 동부라이텍 등 전자계열사 제품의 해외 마케팅 확대를 꾀할 수 있게 됐다. 
 

 
◆대우일렉 '최종인수' 이번엔 과연?

동부그룹이 대우일렉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만큼 이제 관심은 과연 김 회장이 대우일렉 인수를 확실하게 마무리 짓느냐에 쏠린다. 1999년 대우사태로 그룹에서 분리돼 워크아웃에 들어간 대우일렉(옛 대우전자)은 지난 13년간 5차례나 새 주인을 찾는데 실패하며 표류해왔다.

우선협상대상자까지 선정된 적도 3번 있었지만 모두 불발됐다. 2008년 모건스탠리 PE, 2009년 리플우드 컨소시엄에 이어 지난해 아랍의 가전업체인 엔텍합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지만 모두 본계약에 이르는 데는 번번이 실패했던 것. 이들 기업의 자금사정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비싼 인수가가 걸림돌로 작용했다. 

대우일렉은 지난해 연결기준 매출 1조6854억원, 영업이익 50억원을 기록했고 올 들어 드럼세탁기 등이 판매호조를 보이면서 매출 2조원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2008년 이후 4년 연속으로 흑자 행진을 이어갈 만큼 성장의 기지개를 펴고 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김 회장이 '가치상승' 모드에 있는 대우일렉을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인수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동부그룹은 전체 인수금액의 51%는 계열사를 통해, 나머지 49%는 재무적 투자자를 유치해 조달할 예정이어서 자체적으로 1800억~1900억원만 조달하면 되는 만큼 인수과정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
 
동부에도 쏠린 '승자의 저주'
 
M&A시장에서는 높은 인수가격을 제시해 기업을 사들이면 으레 인수주체 기업을 둘러싸고 '승자의 저주'(부실기업 인수 후 모기업까지 동반 부실화되는 현상) 얘기가 단골처럼 흘러나온다. 대우일렉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동부그룹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동부그룹은 370%에 달하는 부채비율로 인해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과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체결 중이어서 금호그룹의 대우건설 인수 '악몽'과도 연관짓는 평가들이 많다.

그러나 동부그룹 측은 이같은 재무안정성 우려에 대해 "그룹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은 절대 아니다"라며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만큼 대우일렉 인수는 큰 무리없이 진행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자산 규모가 37조7000억원에 이르는 만큼 3700억원 수준으로 알려진 대우일렉의 인수금액 역시 그룹과 재무적 투자자(FI)가 절반씩 부담하면 되기 때문에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는 입장이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4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