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의 시대&뮤직
[임희윤의 시대&뮤직]공연장을 떠돈다, 'X 같은 음악'을 찾으려
여름 내내 여러 공연장을 돌고 돌았다. 특히 탈장르 음악, 무경계 무대 예술을 지향하는 여러 페스티벌이 있어 분주함조차 즐거웠다. 국립극장의 '2026 여우락 페스티벌'(7월 3일~25일), 세종문화회관의 '싱크 넥스트 26'(7월 3일~9월 5일), 그리고 '2026 전주세계소리축제'(8월 12일~15일)…. 다양한 프로그램이 달력을 갈마들며 동분서주, 즐거운 움직임을 줬다.여우락과 소리축제는 국악이 기반이다. 올해 여우락에서는 젊은 예술가들이 민요와 대중가요를 휘휘 섞고, 미국의 블루스를 우리 판소리와 칭칭 얽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판을 벌였다. 이를테면 블루그래스 그룹 '컨트리공방'과 소리꾼 정윤형은 남도민요 '들국화'를 카터 패밀리의 'Wildwood flower'와 접목하거나 춘향가와 미국 민요 'Shady Grove'를 뒤섞어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 셰이디~' 하고 눙쳤다.소리축제에서 만난 무대도 '텐션'이 높았다. 베이스 가야금-쌍현 가야금-25현 가야금의 신묘한 가야금 트리오에 도전한 '오드리', 거문고의 다양한 주법에 론치 패드와 루프 스테이션을 가미해 시김새의 결로 벽지 바른 테크노 클럽을 연출한 황진아, 동해안 별신굿에 현란한 일렉트로니카를 얹어 미래적 접신의 신(scene)을 구축한 '블루찬트'….싱크 넥스트는 포크와 록 음악, 현대 음악과 현대 무용, 서커스와 아방가르드 연극 등 무대 예술 전반을 조망하는 축제다. '천하제일탈공작소, baan'의 무대를 특히 잊을 수 없다. 전쟁터의 소리 풍경처럼 둔중하게 작열하는 밴드 '반(baan)'의 록, 헤비메탈 사운드 위로 무표정한 탈과 역동적 탈춤이 활개 치는 시청각 부조화. 그 자체가 역설적으로 기막힌 조화였다.종합하면 'X'의 매력이다. 축제들의 공연 제목인 '상자루X안예은' '컨트리공방X정윤형' 등에 박힌 'X'. 이것은 물리적 조합인 더하기(+)를 넘어 두 음악가, 두 장르의 화학적 반응인 곱하기(X)를 주문한다. 이게 말처럼 쉽나. 각자의 판에서는 일당백인 이들도 낯선 분야를 만나 서로 지나치게 눈치 보거나 양보하다 보면 '1X1=1'만도 못한 '0.8X0.8=0.64'의 결과물이 나온다. 곱하기 협업은 그래서 위험천만하다. 과연, '곱하기' 공연 가운데는 기대에 못 미친 것들도 있었다.그래도 바로 그런 위험을 감수하기에 모든 'X'는 아름답다. 설렌다. 'X'는 아름다운 미지수이기도 하잖나. 가을엔 또 다른 '곱하기+미지수 축제'가 열린다. 10월 1일~4일, 전남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리는 ACC XMF(엑스뮤직페스티벌)다. 여기에 출연할 미국의 세계적 타악 앙상블 '소 퍼커션' 멤버들을 얼마 전 미리 만났다. 화분, 깡통, 나무토막까지 두드려대며 '저 세상' 리듬을 만들어가는 괴짜들. 그들에게 물었다. 0.01초 만에 답을 내고 음악을 짓는 AI의 시대에 당신들의 'X'는 뭐냐고."비디오 게임에서 치트 키를 써 '만랩'이 되면, 과정이 쉬워져 결국 아무 재미도 느낄 수 없죠. 기이하고 무력한 전능함…. 그래서 불완전함도 중요합니다. 때로는 완전히 통제를 벗어난 괴상한 사운드가 터져 나오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야말로 'X'죠. 관객들도 '과연 저 무대 위에서 1초 뒤에 무슨 미친 짓이 벌어질까?'를 기대하며 그 텐션을 함께 즐겨주시면 좋겠습니다. 며칠 뒤 샤워하다 문득 그 기괴한 리듬이 귓가를 맴돌아 곱씹어 보게 만드는 그런 미친 잔상…. 그런 게 진정한 'X' 아닐까요."좋은 음악은 휴대전화 안에도 있다. 하지만 '위험한 음악'은 그밖에 있다. 여름이 끝나도 한동안 공연장 어귀를 떠돌 것 같다. 열병에라도 걸린 듯 'X 같은' 음악을 찾으려.━임희윤 대중문화평론가: 전 동아일보, 헤럴드경제 기자.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YTN 시청자위원. 저서 '예술기: 예술과 기술을 이야기하는 8인의 유니버스', '망작들 3: 당신이 음반을 낼 수 없는 이유',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총괄 기획 및 공저) 등.━
[임희윤의 시대&뮤직]방탄소년단과 그래미 파워 게임
지난번 이 칼럼(6월 27일자)에서 '그래미는 월드컵이 아니다. 안(못) 타도 된다'고 썼다. 현실이 됐다. 방탄소년단 멤버들이 7월 29일, "저희는 올해 그래미에 출품하지 않기로 했다"고 직접 밝혔다. 멤버들은 "음악이 지역이나 언어로 구분되기보다 음악 그 자체로 들리고 사랑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며 "늘 함께해 주는 아미와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방탄소년단의 이번 그래미 보이콧 결정은 한국 문화사의 쾌거다. 아니, 세계 음악사의 입지전이다. 그래미에 반기를 든 이는 수십 년 전부터 많았다. 영미권 아티스트들이다. 사회적 분위기나 현상이 그래미의 변화를 이끌 때도 그 무대는 물론 '본토', 미국이었다. 2020년 미니애폴리스의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블랙 라이브스 매터' 운동이 일어났다. 그래미 부문 명칭 중 '어번(urban)'도 인종차별적이란 여론이 형성됐다. 결국 그래미는 수정했다. 이번엔 어떤가. '저 멀리' 아시아의 '일개' 아티스트가 보이콧을 통해 뉴욕타임스도 움직이는 강력한 파장을 일으켰다. 이번 사건은 일찍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중심으로 재편된 대중문화 패권이 수십년 만에 붕괴되는 소리다. 뉴 미디어 혁명을 통한 권력의 이동과 분산이 '팍스 아메리카나 쿨투라에(Pax Americana Culturae)를 무너뜨리는 파열음이다.'인종차별 타파의 아이콘, 우리의 BTS!' 같은 대의적 시선으로만 이번 사안을 보기엔 그래서 너무 아깝다. 오래된 인권 운동 말고 새로운 산업 대전으로 봐야 재밌다. 일단 이것을 '그래미 내의 파워 게임'으로 조망해 보자. '그래미 vs. BTS' 구도가 아니다. 실은 방탄소년단도 그래미다. 멤버 일곱 명 모두 이미 수년 전부터 그 어렵다는 그래미 정회원이다. 그런데 2만 명에 달하는 그래미 위원회(미국 리코딩아카데미) 내부엔 일종의 계급이 존재한다. 일단 이번 아시아 팝 부문 신설처럼 범주와 제도를 정비하는 소위원회가 있다. 그리고 각종 사안을 최종 승인하는 42명 규모의 전국 이사회(National Board of Trustees)가 있다.('내셔널'이란 로컬적 명칭에 주목!) 일종의 최고 회의다. 수십 명이 이미 그래미 정회원인 방탄소년단과 소속사는 '내부자'로서 진작에 움직일 여지가 있었다. 소위원회가 열리고 의견 수렴 과정이 있을 때 말이다. 다만 힘 싸움에선 역부족이었을 것이다.이번 보이콧은 그래미 내부의 가망 없는 싸움을 외부로, 공론장으로 확전시킨 전략적 묘수다. 방탄소년단이야말로 소셜 파워의 최강자 아닌가. 더구나 '라틴 팝'이란 테두리가 때론 못마땅할 중남미에도 막강한 팬덤을 가졌다. 변화하는 세계 문화 지도에서 아시아와 중남미를 틀어쥔 채 미국 중심주의에 대항하는 판을 짤 '천하삼분지계' 비슷한 묘책…. 이번 선언으로 방탄소년단은 체급을 키웠다. 고작 트로피 하나의 무게를 뛰어넘는 무형의 '국제 영향력' 트로피를 스스로 만들어 즉각 안았다.그래미랑 영영 척질 일도 없다. 2021년 캐나다 가수 더 위켄드는 큰 인기와 예술적 평가에도 그래미에선 후보 지명조차 받지 못하자 사실상 '영영 보이콧'을 선언했다. 말도 방탄소년단처럼 예쁘장하게 하지 않았다. "그래미는 여전히 부패해 있다"고 직격했다. 그래미는 진화에 나섰다. 결국 '영원한 보이콧'은 철회됐다. 더 위켄드는 2025년 그래미 시상식 축하 무대에, 그것도 그래미 회장의 직접 소개로 '깜짝' 등장해 화려한 복귀식을 치렀다. 비슷한 일이 없으리란 법 없다. 그래미가 방탄소년단에게 '감동적 복귀-본상 시상' 시나리오를 언제든 들이밀 수 있다. 드라마는 언제나 잘 팔린다. 이것도 전략, 저것도 전술이다. 중요한 건 실용이다.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바둑돌을 던져버린 게 아니다. 중원에서 한참 벗어난 허를 찌르는 곳에 착점했다. '독립 만세!' 같은 해피엔딩은 없다. 영원히 안 끝나는 흑백의 게임에서 승패는 집수로 결정된다.다른 생각할 거리도 있다. 뒤집어 보면 '아시아 팝 부문' 신설은, 특히 '아시아 언어로 된 노랫말'이란 단서는 수많은 아시아 아티스트에게 되레 희망이 될 수도 있다. 미국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굳이 어려운 영어로 녹음한 방탄소년단 같은 선구자 선배들이 개척한 길 위에서, 뒤에 올 아시아 후배들은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자국어로 뛰어난 작품을 만들면 된다. 일단 아시아 부문을 받은 뒤 그래미 본상으로, 세계 1위 시장(미국) 안쪽으로 진군하는 거다. 이를테면 필리핀 그룹 BINI가 타갈로그어로만 노래를 만들어도 꿈의 그래미를 노려볼 수 있게 됐다. 올해 그래미 최고상을 받은 푸에르토리코의 배드 버니를 비롯한 수많은 라틴 팝 가수가 간 길이다. 1위 사업자가 전체 사업자의 마음과 꿈을, 현재와 미래를 대변할 수는 없다. 새로운 실리적 기회를 노리는 다른 수많은 아시아 아티스트의 생각도 차제에 들어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다시 말하지만 팝은 산업이다. 중요한 건 언제나 실리다.━임희윤 대중문화평론가: 전 동아일보, 헤럴드경제 기자.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YTN 시청자위원. 저서 '예술기: 예술과 기술을 이야기하는 8인의 유니버스', '망작들 3: 당신이 음반을 낼 수 없는 이유',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총괄 기획 및 공저) 등.━
[임희윤의 시대&뮤직]그래미는 월드컵이 아니다. 안(못) 타도 된다
미국 그래미 어워즈가 내년부터 5개 시상 부문을 추가한다고 최근 밝혀서 화제다. 그 중 하나가 '최우수 아시아 팝 음악 퍼포먼스' 부문이라서다. 그래미가 아시아 팝 관련 부문을 만든 건 처음이다. 라틴 팝 관련 부문은 많았다. 심지어 '라틴 그래미'라는 별도의 시상식도 따로 있다. 아시아 부문이 생기면 아시아 가수가 그래미를 받을 수 있고, 아시아권에서 글로벌 선두를 달리는 것이 다름 아닌 케이팝이니 나쁠 게 없어 보인다. 월드 투어를 스타디움 규모로 도는 방탄소년단, 블랙핑크도 그래미에서는 상 하나 못 탔는데, 비로소 수상 가능성이 올라갈 것 같다.그런데 케이팝 팬들 일부는 불안해한다. 첫째, '아시아 팝' 부문 신설이 '올해의 앨범' '올해의 노래' 등 이른바 4대 본상이나 주요 부문 수상을 막는, 아시아 팝의 가두리 양식장이 되는 거 아니냐는 우려 탓이다. 마치 아카데미상이 오랫동안 영미권 외의 영화는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가둬둔 것과 비슷한 차별과 배제의 현상이 일어나리라는 것. 둘째, 무려 4년 만에 컴백한 방탄소년단이 돌아오자마자 빌보드 싱글차트 정상을 탈환한 곡 'Swim'의 수상 가능성이 되레 낮아지는 것 아니냐는 걱정 때문이다.그래미는 이번에 아시아 팝 부문을 신설하면서, 아시아 국가의 언어를 단편적으로 사용하거나 하나도 안 쓴 노래는 후보 자격에서 제외하겠다고 했다. 방탄소년단의 야심 찬 컴백작이자 빌보드 1위 곡 'Swim'은 100% 영어 노래다. 한국어(아시아 언어) 단어 하나 없다. 컴백 앨범 'ARIRANG' 전체적으로 봐도 영어 가사가 많다. RM을 제외한 6명의 멤버가 유창한 영어 구사자가 아니므로 앨범 녹음 과정에서 애를 먹는 모습은 컴백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BTS: 더 리턴'에도 여러 번 나온다. 그런데도 굳이 애써서 영어 노래, 영어 랩을 대거 담은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미답의 목표, 그래미 수상을 위한 것 아니었을까. 그런데 갑자기 이번엔 그래미가 아시아 언어를 요구하는 상황이 된 거다. BTS는 영어로, 그래미는 아시아어로…. 마치 두 대의 큰 차가 동시에 유턴하며 완전히 엇갈리는 듯, '허무 개그' 같은 모양새다.자연스레 2027년 2월 7일 열릴 제69회 그래미에 대한 최대 관심사는 'Swim'의 수상 여부가 돼버렸다. 타도, 못 타도 논란거리가 될 게 뻔하다. 타면 '아시아 언어를 조건으로 내걸고 왜 영어 노래에 상을 주냐'는 논란이, 못 타면 '미국 시장에서 아시아 출신으로 최대 성과를 거둔 노래에 아시아 팝 부문마저 안 주냐'는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진퇴양난이다.벌써부터 그래미를 원망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그깟 그래미 따위 안 받으면 뭐 어떤가. 그래미는 노벨상이 아니고, 빌보드는 월드컵이 아니다. 애당초 그래미는 미국의 음반 업자들이 서로를 칭찬해 주려 만든 상이다. 미국에서 안 파는 물건(음악)은 대상도 아니었다. 브라질, 헝가리, 카메룬, 몽골의 음악 거장 중에 그래미 '받은 사람 찾기'가 더 어려운 이유다.빌보드는 '미국 내 주간 판매 차트'다. 아시다시피 1년은 52주다. 이론상으론 (복권 당첨 번호처럼) 한 해에도 1등이 52회나 바뀐다. 우리에겐 빌보드 1위가 희귀하고 신기하니 '세계 정복!'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당장 지난주에 누가 빌보드 1위 했는지, 올해 '빌보드 최우수 팝 듀오/퍼포먼스 부문' 트로피는 누가 가져갔는지 대개 알지도 못하고 기억도 안 난다. 몇 년에 한 번씩 나라마다 대표 선수를 뽑아서 겨루는 올림픽, 월드컵과 음악 차트, 음악 시상식은 이렇게 너무 다르다. 게다가 우리 가요는 애초에 미국 시장이 아닌 한국 시장을 겨냥해 만들어지고 발표된 것 아닌가.한국 노래가 세계에 울려 퍼지고, 한국 가수를 보려고 수만, 수십만 인파가 운집한다는 사실을 요즘 모르는 사람이 어딨나. 미국이 주는 트로피 하나가 뭐 그리 대수인가. 그렇게 치면 우리는 우리 가요가 태국이나 프랑스에서는 상을 받는지 관심 둔 적 있는가. 테일러 스위프트, 레이디 가가가 세계 음악계를 평정하는데 왜 한국 시상식에선 트로피를 안 주나. 이것도 차별인 건가. 봉준호 감독의 말을 빌면, 그래미는 '미국의 로컬 시상식'일 뿐이다.지금 한국 대중음악의 확장은 파죽지세다. 그래미는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인 액세서리다. 큰 것을 섬기는 걸 우린 사대주의라 부른다. 오랜 사대의 그늘을 벗어날 만큼 우리도 이미 거대해졌다. 지난달 멕시코시티 대통령궁 앞에 5만 아미가 모였다. 월드컵 폐막식 무대에 방탄소년단이 선다. 그래미 안 타도 그 사실을 세상이 다 안다. 역사는 이미 기록되고 있다.━임희윤 대중문화평론가: 전 동아일보, 헤럴드경제 기자.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YTN 시청자위원. 저서 '예술기: 예술과 기술을 이야기하는 8인의 유니버스', '망작들 3: 당신이 음반을 낼 수 없는 이유',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총괄 기획 및 공저) 등.━
[임희윤의 시대&뮤직]강소(强小) 콘텐츠 육성이 문화 강대국 발판이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기…. 이런 환경과 조건들이야말로 (한 아티스트가) 긴 생명력을 유지하게 하는 큰 전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난 12일 서울 강남구의 작은 극장. CJ문화재단 설립 20주년 기념 '리더스 토크'에 참여한 민규동 영화감독의 말은 적잖은 울림을 줬다. 1999년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로 데뷔한 그는 '파과' '간신' '내 아내의 모든 것' 등의 작품으로 다양한 장르를 종횡하며 선 굵은 필모그래피를 일군 연출자다. 그 역시 한 편, 한 편의 시나리오를 쓸 때마다 실패와 성공 사이의 외줄타기를 해왔다고, 특히나 신인 시절 스스로를 의심할 때 주변에서 내미는 따뜻한 손길과 격려로 버티며 여기까지 왔노라고 털어놨다. 그 불안한 길을 그는 심지어 "지옥길"에 비유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자서전에서 '매 시나리오를 쓸 때마다 지옥길을 걷는 듯했다'고 했습니다. 신진 창작자분들이 자기만의 작은 지옥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문화재단 분들이 많은 손을 잡아줬습니다." 작은 지옥길을 걸어온 민 감독은 이제 중견이 돼 CJ문화재단의 신진 영화인 지원 사업인 '스토리업'의 디렉터이자 멘토로 활약하고 있다. 가능성을 증명할 단 한 번의 기회 자체를 얻는 것조차 힘겨웠던 신인 시절을 떠올리며 그는 '절실한' 후배들에게 더운 손길을 내밀고 있다. 얼마 전, 제79회 칸 영화제가 폐막했다. 나홍진 감독의 기대작 '호프'는 수상에 실패했지만 한국 신진 창작자의 결실이 떠들썩한 뉴스 사이로 반가운 새싹처럼 고개를 내밀었다. 학생 영화 부문 '라 시네프' 시상식에서 진미송 감독이 2등상을 받은 것이다. 진 감독은 뉴욕으로 이민 간 4인 가족의 하루를 담은 15분짜리 단편 영화 '사일런트 보이시스'로 수상의 영광을 누렸다. '사일런트 보이시스'라니…. 의미심장한 제목이다. 대중문화계에도 수많은 '조용한 목소리들'이 있다. 숨죽인 채 자신의 잠재력을 제련중인 이들에게 첫 번째 마이크를 건네주는 일은 소중하다. 최근 3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살목지'. '장화, 홍련'을 제치고 23년 만에 한국 공포 영화 흥행 1위 기록을 새로 쓴 이 작품은 1995년생 이상민 감독의 솜씨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했지만 한국 영화 시장의 침체기에 졸업해 사회에 나온 그는 CJ문화재단 '스토리업' 지원작으로 단편 '돌림총'이 선정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후 여러 영화제에 초대되며 데뷔작 '살목지'에 이르렀다. '작은 지옥길'을 지나 마침내 '작은 꽃길'에 다다른 데는 고사의 위기에 물과 거름을 내준 작은 지원의 힘도 있었다. 신진 창작자 지원의 효과는 지원금과 멘토링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당장 100만 장 판매, 1000만 관객 돌파, 1억 조회수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원작 선정을 위해 업계 동료들과 경쟁하는 것부터가 그들에겐 가장 중요한 창작 욕구, 동기부여가 된다. 작은 음악가들도 그렇다. 인디 밴드 멘토링을 하다 보면 'CJ튠업에 선정된다면 원이 없겠다' 'EBS 스페이스 공감-헬로루키에 당선된다면 날아갈 것 같다'는 1차 목표를 말하며 눈을 반짝이는 신예들을 늘 만나게 된다. 우린 언젠가부터 'K-컬처 대박'의 신화 앞에 너무 많은 것만 바라고 또 바라보게 된 건 아닐까. '빌보드 1위' '황금종려상' '그래미 후보 등재' 같은 'SF적 성과'에만 열광하기엔, 우리 곁에서 조용히 어깨를 움츠린 '작은 거인'들이 너무 많다. 등잔 밑에서 반짝이는 반딧불이들을 손등에 올려놓고 더 나아가 거인의 어깨로 향하는 사다리에 놓아줄 손길이 절실하다. 요즘 가요 종합차트에서 케이팝과 함께 맹위를 떨치는 록 싱어송라이터 한로로. 그도 'CJ 튠업'을 비롯한 여러 신인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창작의 날을 벼렸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극소수의 거인 콘텐츠만이 아니다. 작지만 강한 창작자에 대한 기업과 국가의 지속적인 주목과 지원이야말로 작지만 큰 징검다리가 돼줄 것이다. 강소(强小) 콘텐츠가 풍부한 나라야말로 문화 강대(强大)국이다.━임희윤 문화평론가는 동아일보, 헤럴드경제 문화부 기자로 15년간 현장을 누볐다. 글쟁이, 라디오 게스트, 강연자, MC로 클래식 음악부터 여행 문화까지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다.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으며 '예술기: 예술과 기술을 이야기하는 8인의 유니버스', '망작들 3: 당신이 음반을 낼 수 없는 이유',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총괄 기획 및 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임희윤의 시대&뮤직]한반도를 거대한 '문화의 자기장'으로 만들자
그들을 '오게' 하는 건 음악과 드라마이지만 그들을 '오래' 머물게 하는 건 그 너머에 있다. 지난 28일 에어비앤비가 서울 성동구에서 연 미디어 간담회 현장에 찾았다. 토론 사회자로 참가했다 여러 통찰을 얻어 왔다. 이날 에어비앤비는 한국을 방문한 해외 여행객 4500명을 대상으로 최근 진행한 'K-컬처와 한국 여행' 설문 조사 결과를 밝혔다. 이에 따르면, 'K-컬처가 한국 여행에 대한 관심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 응답자는 무려 94%다. 한국의 음악, 영화, 드라마가 실제로 대다수 여행객이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러나 단순히 뮤직비디오에 나온 건물, 드라마에 나온 계단에 가서 인증샷만 찰칵 찍고 떠나는 걸 원하는 건 아니었다. 전체의 91%는 '진정한 현지 문화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92%는 K-팝을 넘어 음식, 역사, 자연 등 폭넓은 한국 문화를 경험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일까. 74%는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한 서울 외 지역을 방문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현실은 많이 달랐다. 3분의 2에 달하는 66%가 서울에서 대부분의 일정을 소화했다고 했다. '동백꽃 필 무렵' '갯마을 차차차'를 보고 'Pohang'(경남 포항)을 검색해 보고, '도깨비' '폭싹 속았수다'를 통해 'Gochang'(전북 고창)을 찾아본 이라도 연계해서 즐길 다른 문화나 좋은 숙박 시설이 없다면 간다 해도 당일치기 인증샷 여행에 그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스스로를 돌아봐도 그렇다. 해외 여행을 갈 때 공항에 면한 대도시를 거점으로 삼되, TV나 유튜브에서 본 근사한 풍광을 떠올리며 타 지역을 가보려 노력한다. 하지만 가끔은 복잡한 교통편이나 다른 볼거리의 부재 때문에 기약 없는 '다음에…'만 뇌까린 게 부지기수다. 그 '다음'은 10년째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큰맘 먹고 나선 지역 여행이 반짝반짝한 수도의 야경보다 기억에 더 오래 남는 경우도 많다. 취재차 노르웨이를 방문했을 때 수도 오슬로보다 더 좋았던 건 멀리 서안에 자리한 고도(古都) 베르겐이었다. 옛 바이킹의 수도로서 알록달록한 브뤼겐의 구시가도 아름다웠고, 무엇보다 베르겐 고성(古城)에서 고색창연한 성벽과 노을을 배경으로 관람한 바이킹 포크 밴드 '바르드루나'와 팝가수 오로라의 합동 콘서트는 잊을 수 없다. 다음엔 특별한 공연이 있는 기간에 여러 날 숙소를 잡아 베르겐에 머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돌아온 뒤, '노르웨이 다녀왔어? 오슬로는 어때?'라 묻는 지인들에게 베르겐행을 추천한 게 십수 년간 헤아릴 수 없다. 한국은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해외 여행객들의 지역 관광 비율이 낮은 편이다. 가까운 일본만 봐도 다르다. 일본 소도시 여행이 한국인들에게도 중요한 화두일 정도다. 인프라와 홍보가 두텁다. 그럼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문화 콘텐츠를 통해 찾는 이가 절대다수인 나라인 만큼, 한반도를 거대한 '문화의 자기장'처럼 만드는 건 어떨까. 우리나라에서도 언젠가부터 지역 축제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하지만 차별화된 축제는 드물다. TV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비슷비슷한 가수들을 섭외해 대동소이한 잔칫상을 차려낸다. 자국민들조차 시큰둥하다. 하지만 한국 문화를 조화롭게 차려낸 음악 축제도 이미 꽤 있다. 전북의 전주세계소리축제, 광주광역시의 ACC 엑스뮤직페스티벌은 우리 전통음악을 기반에 두되 해외의 첨단 음악, 실험 음악과 충돌하는 특별한 난장을 만든다. 며칠씩 이어지는 이런 축제를 지역 관광과 연계해 해외 관광객까지 끌어들인다면 어떨까. 숙박, 관광과 문화 체험 프로그램까지 연계해 'K-지역 관광/문화 체험'의 시험지로 써볼 만하다. 에어비앤비 토론 때 프랑스 출신 방송인 파비앙 씨의 이야기가 귓가에 생생하다. 최근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는 그는 "외국 친구들은 이제 한국인처럼 살아보기, 한국 문화 더 깊게 들여다보기를 원한다. 편의점에 들러도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컵라면에 치즈 소시지를 직접 넣어 녹여 먹고 싶어 한다"면서 "원주 한지테마파크에 가서 만들기 체험을 하고 더 나아가 한지에 기록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까지 알려주면 한국 문화와 역사를 자연스레 배우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인의 입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음되는 게 무척 신기했다. 그렇다. 케이팝을 듣고 멀리 한국까지 날아온 이들을 더 오래 머물고, 더 깊게 느끼게 하는 힘. 5박이 10박이 되고, 5년이고 10년이고 한국 문화를 '파게' 만드는 그 무언가는 이제 우리가 설계하기 나름이다. 관광객 숫자가 는다고 당장의 그래프에만 집착하다 대충 흘려보내기엔 지금의 이 흐름이 너무 소중하다. 100년 뒤에도 한국 팬이 넘쳐나는 지구별을 그려본다.
[임희윤의 시대&뮤직]'K헤리티지'와 노리개 문화
'습관성 K 접두어 추가 현상' 최근 우리 언론과 언중에 떠도는 이 기현상을 아예 어문 규정에 추가해 줄 것을 국립국어원에 제안한다. '반농담'이다. 이런저런 말에 하도 'K'가 붙다 보니 살짝 어지러워서 그런다. 요즘은 또 'K헤리티지'란 말이 추가됐다. 케이팝 그룹이 개량된 한복이나 노리개를 착용하고 화보나 영상을 찍는 유행, 국립중앙박물관의 재치 있는 기념품에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트렌드에 착안한 말로 보인다. 'heritage'가 '유산'이니 'K헤리티지'는 한국 문화유산이라 해도 충분하다. 'K 접두어 현상'은 'K방산'이나 'K뷰티'처럼 그 분야에서 해외가 한국을 주목하거나, 수출이 잘 되든가, 아니면 젊은 층이 뜻밖의 한국적인 뭔가에 열광할 때 주로 발생한다. 이젠 국가유산청과 국가유산진흥원까지 이 말을 갖다 쓴다. 두 기관은 지난달 30일 'K헤리티지 스테이지' 공모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K헤리티지'건 '국가 문화유산'이건 우리 전통문화가 조명받는 현상은 어쨌든 반갑다. 스마트폰과 숏폼 게시물을 통해 도파민 분비를 자극하는 영상에만 빠지기 쉬운 시대다. 세월의 나이테가 쌓여 그윽한 우리의 오랜 고전을 돌아보는 물결은 그래서 더 의미 있다. 최근엔 케이팝 최대 그룹인 방탄소년단이 'ARIRANG' 앨범을 내서 미국과 영국 차트 1위에 올렸다. 세계 가수 최초로 유튜브 공식 채널 구독자 수 1억 명을 돌파한 그룹 블랙핑크는 새 앨범 'DEADLINE'을 내면서 국립중앙박물관과 협업했다. 멤버들이 전시 해설을 맡거나 박물관 공간 일부를 블랙핑크의 상징색으로 꾸미고 신곡이 흘러나오게 했다. 하지만 'K헤리티지'가 때론 제품과 양념으로만 소비되는 듯해 아쉬울 때도 있다. 또, '한국적'이란 수식어로 상찬받는 콘텐츠 속에서 실상은 한중일 문화가 정체불명으로 뒤섞인 서양 관점의 오리엔털리즘 범벅을 마주하게 되는 때도 왕왕 있다. 해외 팬들의 이국 취향을 자극하는 소품이나 장치로만 사용되는 것이다. 국가 홍보, 방문객과 매출 증대, 유튜브 조회수와 구독자 수 증가 등을 내세우면서 국가 기관이 이런 흐름에 동참하기도 한다. 지난해 국가유산청이 공식 유튜브 채널에 공개한 '탈, 춤으로 잇다' 영상은 33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올해 초 열린 문화유산 이수자 간담회에서는 전통무용인들의 성토도 나왔다. 한 참가자는 "유명 댄서를 내세우고 탈이 등장했다 뿐이지, 봉산탈춤 특유의 춤 선은 어찌 된 일인지 영상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면서 "'봉.산.탈.춤' 네 글자를 알렸다고는 할 수 있어도 독특하고 아름다운 우리 춤의 매력을 알리는 데는 실패한 콘텐츠"라고 말했다. 우리 전통 유산이 어떤 식으로든 호명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그 미학이 거세된 채 명칭과 인상만 알려지는 것은 공허하다. 요즘처럼 'K컬처'가 주목받는 시대엔 그 공허가 더 안타깝다. 세계인은 물론이고 전통에 호기심을 갖게 된 한국인에게도 그 맥락과 매력을 알릴 절호의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 국악인의 억울한 사연을 들었다. 이름만 대면 알 케이팝 녹음에 연주자 겸 작곡자로 참여했다가 저작권 배분을 받지 못했다는 것. 새로 창작된 국악 선율이 절묘하게 주효한 글로벌 히트곡이었음에도 말이다. 힙합, 전자음악 편곡을 맡은 프로듀서진이 참여 국악인 모두를 작곡가 크레딧에서 빼버렸다고 한다. 엄연한 창작을 '어차피 국악이 비슷비슷하게 들리는데, 이게 연주이지 작곡이냐'고 치부했기 때문이다. 애당초 진지한 공동 작업의 대상이 아니라 독특한 장치나 이국적 양념쯤으로 생각했다는 얘기다. 전통문화를 구성하는 유형 문화, 무형 문화가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개량한복, 뮷즈 같은 제품형 전통문화, 해외 쇼핑몰에서도 쉽게 복제해 팔 수 있는 물품은 각광받는 가운데 복제가 힘든 고유의 문화는 적당히 넘어가는 건 아닌지…. 전통문화가 'K컬처'란 산업적 강령의 작은 노리개 정도에 그치는 곳은 없는지 돌아볼 때다.
[임희윤의 시대&뮤직]① BTS 컴백과 한류, 이젠 그 너머를 볼 때다
이달 21일 서울에서 열릴 방탄소년단의 컴백 쇼가 벌써부터 화제다. 특설무대가 설치되는 광화문 일대에 약 26만 명이 몰릴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한 시간짜리 공연의 연출자는 영국인 해미시 해밀턴 감독. 매년 지상 최대의 쇼로 꼽히는 미국 '슈퍼볼 하프타임 쇼'를 지휘한 인물이다. 이 메가톤급 컴백 쇼는 넷플릭스를 통해 190개국에 생중계된다고 한다. 한국을 방문한 해외 관광객들 중 상당수는 경복궁, 덕수궁, 숭례문이 현대적 빌딩과 어우러진 이율배반적 스카이라인에 매혹된다고 한다. 심장을 울리는 방탄소년단의 비트, 랩, 노래…. 이것이 강렬한 퍼포먼스와 무대 연출을 만나며, 더욱이 전통과 현대가 교차하는 서울의 랜드마크에서 펼쳐지리라는 데서 이번 쇼에 대한 기대가 남다르다. 서울 관광에 대한 잠재적 홍보 효과가 막대하리라는 예측도 나온다. 안전이나 시민 불편 문제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공연은 한 시간짜리이지만 종일 교통 통제가 불가피해 보인다. 통제가 촉발할 토요일 저녁 서울 한복판의 혼잡, 안전관리에 투입될 사회적·경제적 비용은 예상을 뛰어넘는 규모일 수 있다. 공연 시작 전후 흥분한 인파가 한번에 쏠릴 때의 위험성도 제기된다. 만에 하나 현장 관리에 실패한다면 이런 의문도 나올 수 있다. 방탄소년단이 국위선양의 아이콘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사기업이 진행하는 앨범 발매 기념 행사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과 리스크를 '우리 모두'가 떠안는 게 맞냐는 이야기다. 이는 사회적 비용을 감당할 만큼 이 행사가 충분한 '공공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시청권 이야기도 불거질 수 있다. 방탄소년단 컴백 쇼는 넷플릭스가 독점으로 중계하는 행사다. 넷플릭스와 하이브는, 190개국 3억 명이 가입된 네트워크에 뿌려지므로 서울 홍보 효과가 충분하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하지만 넷플릭스 가입자 중 절대다수가 이 콘텐츠를 선택해 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도심 혼잡과 안전 리스크는 대한민국이 오롯이 지불할 사회적 비용이지만 정작 그 주체인 국민 중 다수는 이 국가적 쇼를 지켜볼 수 없다. 넷플릭스 가입자만 즐길 수 있다. 넷플릭스의 국내 월간 이용자 수가 1000만 명을 상회한다는 통계도 있지만 우리 인구의 약 20% 수준이다. 최근 막 내린 밀라노-코르티나 동계올림픽의 경우, 독점 중계를 한 JTBC가 95%의 가시청 가구를 확보함에도 '보편적 시청권' 논란이 인 바 있다. 올림픽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진정한 스포츠 강국은 메달의 색이나 수로 정해지는 게 아니다. 소수 엘리트의 성과보다 전 국민이 일상에서 향유하는 건강한 '생활 스포츠'의 수준이 높아야 진짜 체육 강국이다. '태릉 스포츠'가 일각에서 구시대의 유물처럼 취급받는 건 그 때문이다. 문화도 비슷하다. 문화의 요체는 이기는 것, 셈 세는 것, 버는 것 따위에 있지 않다. 문화의 본질은 꽃피우는 것, 편안한 것, 다양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 더불어 함께 즐기는 것에 있다. 한 나라의 문화는 우상향 그래프로 '그려지는' 게 아니다. 다채로운 색으로 '칠해가는' 것이다. 어쩌면 '대한민국->BTS->국위선양->BTS->세계인의 관심과 막대한 홍보 효과'라는 흐름도는 자칫 '도식화된 환상'에 머물 수도 있다. 설사 '국가 홍보를 위한 모든 일=절대 선(善)'이란 명제가 참이라 가정한다 해도 할 일은 남는다. 차제에 이런 행사를 둘러싼 여러 요소에 대한 치밀한 과학적 접근과 논리적 연구가 수반됐으면 한다. '190개국의 3억 명이 시청할 수 있었다'든지 'BTS 앨범이 몇백만 장 팔려 또 자랑스러운 빌보드 정상에 올랐다' 등의 숫자와 보도자료 이면에 있는 것. 그 인과와 득실 관계를 여러 관점에서 한 번쯤 따져봐야 한다. '세계적'이란 수식어, '세계인 열광…'의 정신 승리만으로 배부르던 '문화적 곤궁기'는 진작에 지나왔다. 진정한 문화 강국, 사회 강국으로 가려면 이제 그 너머를 봐야 한다. 부디 이번 'BTS 2026 컴백쇼 서울'이 안전사고 하나 없이 시민 불편이 최소화된 상태로 성황리에 잘 마무리되길 기원한다. 한국의 성숙한 시민 의식, 뛰어난 인파 관리 능력이 쇼의 화려함 못잖게 세계인의 주목을 받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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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의대화] “대통령 되면 구름 위에… 땅이 잘 안 보여” |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③](https://i.ytimg.com/vi/b6N_5QFrGjA/hqdefault.jpg?width=1920&quality=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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