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도 있고 악의적으로 위작을 만들기도 한다. 비슷한 화풍이 모여 트렌드를 이루기도 하고 이를 모방하는 세력도 생긴다. 우연일 수도, 필연일 수도 있다.
현대 미술 작가들은 끊임없이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만들려 한다. 수없이 많은 선대의 화풍을 넘어서 자신만의 독창성을 찾아 가는 게 현대 미술 작가들의 숙제다.
이 과정을 겪고 자신만의 철학을 담은 화풍을 완성한 작가들은 미술애호가들에게 열렬한 사랑을 받는다. 김환기, 이우환 등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 미술 작가들은 모두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완성했고 이를 발전시켜 왔다.
전광영 '집합'
◆ 추상화에 담은 '혼돈의 시대'
전광영(68)은 화풍과 소재에서 독창성을 인정받는 작가다. 한국 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2010년 국립현대미술관이 뽑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23인에도 이름을 올렸다.
전광영은 20대 시절인 1970년대에 미국 생활을 했다. 반전운동과 히피문화가 꽃을 피우던 시기였다. 젊은이들은 마리화나를 피우며 노래를 했고 반전 시위를 했다. 민주주의·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와 공산주의가 부딪혔고 물질 만능주의도 팽배했다. 젊은이들의 갈등과 혼돈이 가득하던 시기다.
이곳에서 전광영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전광영은 자신의 홈페이지 소개 글에서 미국 생활을 회상하며 "사회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이방인(Alien)이었다"고 표현했다.
전광영은 자신이 겪은 정체성의 혼란과 시대의 혼돈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추상화를 선택했다. 혼돈(Chaos)과 투쟁(Struggle)을 표현하는 데 추상화만큼 좋은 방식이 없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 종이묶음에 조화·갈등해소 표현
전광영은 붓으로 유화 물감을 찍어 추상화를 그렸다. 유화로 표현한 추상화는 누구나 하던 화풍이었다. 전광영은 "이런 추상 표현으론 2류 작가 밖에 될 수 없어 창피했다"고 고백했다. 전광영은 깊은 고민에 빠진다. 추상화를 통해 이 시대의 혼돈을 표현하면서도 한국인으로서, 한국작가로서 정체성을 표현하고 싶었다.
1995년 늦은 봄 전광영은 감기로 고생하고 있었다. 기운없이 거실에 앉아 있다가 아내가 가져다 준 감기약 봉투를 보면서 옛 기억을 떠올렸다. 전광영은 어린 시절 병치레가 많았다. 어머니에게 이끌려 한의원을 자주 드나들었다. 어린 아이에게 한의원은 미지의 세계이자 두려움의 세계다. 알싸한 한약 냄새와 빼곡히 꽂혀 있는 침은 신비롭고 공포스럽다.
전광영은 한의사로부터 진맥을 받는 동안 머리를 고정하고 천장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감기약을 먹으려던 찰나 어린 시절 보았던 한약방에 매달려 있던 수많은 한약 봉투가 떠올랐다. 어느 봄날 떠올린 어린 시절의 기억이 전광영이 선택한 새로운 표현 방식이었다.
전광영은 스티로폼 조각을 한지로 하나하나 쌓아 종이 상자를 만들어 이를 붙이는 방식의 표현법을 창조했다. 하나하나의 종이 묶음은 사회와 역사를 아우르는 인생살이다. 이 조각들을 이어 붙이면서 개개의 삶과 인생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갈등을 해소하는지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작품 제목이 '집합'(aggregation)이다.
전광영의 작품은 입체이면서 회화다. 종이 상자를 하나하나 만들어 쌓아 붙이는 반복적인 작업을 통해 거대한 입체 조각을 만들기도 한다. 종이 상자 하나하나에 색을 입혀 색감도 표현한다.
캔버스 위에 한지 조각을 붙여 만든 부조 형태의 작품은 회화다. 신비한 분화구를 표현한 듯 하고 물감을 칠해 놓은 듯도 하다. 가까이 보면 하나하나의 종이 상자가 입체감을 표현해주고 있다.
◆ 추정가 대비 두배에 낙찰
전광영의 작품은 최근 두 가지 뉴스에서 화제를 모았다. 두 가지 뉴스는 극과 극을 달렸다.
지난달 26일 열린 서울옥션 정기경매에서 전광영의 '집합02-OC016'이란 작품이 높은 값에 팔렸다.
이날 경매에서 가장 비싼 값에 팔린 작품은 영국 작가인 데미안허스트의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7억5000만원에 낙찰됐다. 하지만 추정가 대비 가격을 감안하면 전광영의 집합이 단연 돋보였다.
전광영의 집합은 낮은 추정가 3000만원에 경매에 부쳐져 치열한 호가 경쟁을 이끌었다. 낮은 추정가 대비 두배에 가까운 5200만원에 낙찰됐다. 독특한 화풍을 완성한 작가에게 보내는 애호가들의 '열광'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또 한가지 뉴스는 국세청에서 나왔다. 국세청은 최근 거액의 세금을 탈루한 채 고가의 미술품을 사재기한 체납자들을 적발했다고 밝혔다.
사업자 A씨는 고의로 수천만원 상당의 세금을 체납하고 있었다. 세금 낼 돈도 없다던 A씨는 미술품 보관 전문 창고를 지어 놓고 전광영의 집합을 보관하고 있었다. A씨는 전광영의 집합을 9000만원에 샀다.
국세청이 적발한 고액 체납자 보유 미술품은 이우환의 '조응', 데미안 허스트의 '회화'(Butyric Anhydride), 쿠사마 야요이의 '폴른 플라워', 오원장승업의 '영모도'(7000만원) 등이다. 세금 체납자들은 국세청이 미술품을 압류하려 하자 수천만 수억원에 달하는 세금을 일시에 납부했다고 한다.
◆ 찬사와 세금포탈 수단 '극과 극'
전광영이 표현하려는 것은 삶의 모순과 투쟁이었다. 전광영의 집합을 둘러싼 두 가지 뉴스는 아름다움과 추함이 공존한다.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한 작가에게 보내는 미술 애호가들의 찬사와 세금 포탈의 수단으로 전락한 씁쓸함이 함께 있다.
올 가을 서울옥션 경매는 예년에 비해 성과가 좋지 않았다. 낙찰률도 높지 않았고 고가 작품 기록도 나오지 않았다. 글로벌 시장에선 미술 시장이 활기를 되찾고 있는 반면 한국 미술 시장의 회복은 영 더디다. 미술계에선 고액 미술품에 대한 양도세 부과 예고와 경기침체 등을 원인으로 꼽는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미술 시장을 바라보는 삐딱한 시선 때문이 아닐까.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51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