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령, 잊을 수 없는 수묵화
한계령을 넘지 않을 수 없었다. 멀리 보이는 절벽 능선에 푸른 소나무와 돌단풍이 어울려 만들어 낸 빛나는 풍경을 보았던 지난 날 가을이 추억의 한 컷으로 마음에 남아 있는 이상 눈 내린 겨울산의 골계미를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하의 날씨에 눈이 내린다는 강원도 지역 일기예보는 설산을 보기로 한 우리에게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미 내린 눈이 절벽을 하얗게 덮고 있을 것이고 그 위로 내린 눈은 푸른 솔잎 위에 쌓여 한 폭의 그림을 만들 것이다.
기대만큼 풍경은 아름다웠다. 한계령 정상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차 문을 열었다. 따듯한 차 안에만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짜릿하게 찬 공기가 폐 깊숙한 곳까지 스며든다. 바람은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고 머릿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다.
간혹 지나가는 눈발을 맞아가며 한참 동안 한계령 휴게소를 거닐었다. 따듯한 차 한 잔에 손은 녹고 한계령을 밀고 올라온 찬바람에 정신이 아찔하다.
뼈대와 속살이 다 드러난 산줄기에 눈이 쌓였다. 늘 푸른 나무의 푸른색과 하얀 눈이 대조적으로 빛났고 회색빛 기암절벽이 산수화의 깊이를 더한다. 그 사이를 비집고 구불구불 난 길이 있어 풍경화가 서사적이다.
저 멀리 육중하게 굽이치며 달리는 바위 능선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가 푸르다. 먼 곳 산부터 가까운 눈 앞 바위절벽까지 열 두 폭 수묵화다. 간혹 지나가는 자동차는 옛날 같으면 나귀를 탄 어느 선비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한계령 정상을 내려가다 보면 필례약수로 빠지는 길이 오른쪽으로 나온다. 그 길로 조금만 가다가 뒤를 돌아보면 한계령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의 아름다움과 버금가는 수묵화의 구도가 나온다.
산 능선과 뼈대만 남은 나무들은 먹빛의 농담으로 그 이미지를 살리면 될 것이고, 그 여백은 색 없는 화선지 바탕 그 자체로 내버려 두어도 그림으로 완성될 것이었다. 그 곳에서 바라본 풍경이 그랬다.
◆활력 넘치는 주문진 항 그리고 사천해변의 깊은 밤
다시 차를 돌려 나와 양양으로 향한다. 해거름에 도착한 주문진항은 파장이었다. 주섬주섬 판을 걷는 아줌마도 있었고 끝까지 남아 떨이를 외치며 우리처럼 늦게 도착한 여행자를 반기는 젊은 총각도 눈에 띈다.
대구, 양미리, 오징어, 문어, 도치, 곰치, 소라, 골뱅이, 게…. 수북하게 쌓여 있는 해산물 그 자체가 항구의 볼거리다.
우리는 도루묵과 양미리, 골뱅이 등을 사서 어시장 옆에 있는 포장마차 식당거리로 향했다. 저녁도 먹지 못한 우리는 식당에서 미리 구워 놓은 도루묵으로 시장기를 속이고 어시장에서 사간 것들을 구이와 찌개로 해달라고 식당 아줌마에게 부탁했다.
일정액을 내면 포장마차에서 요리를 해준다. 갯비린내와 저녁 항구의 정취가 어우러진 주문진항 포장마차는 네 명의 남자가 회포를 풀기에 충분한 장소였다.
어둠이 내리고 바닷바람이 포장마차 천막을 뒤흔든다. 오히려 그런 분위기에 술 맛이 더 난다. 지난 이야기에 지금 우리가 여기에 이렇게 앉아 있는 시간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웃고 떠드는 사이 도루묵찌개가 나오고 골뱅이와 소라가 푹 삶아졌다.
바닷가의 만찬을 즐긴 뒤 바비큐 파티에 필요한 것들을 사서 숙소를 찾아 떠났다. 인근 사천해변 바다 바로 앞에 민박집을 정했다. 민박집을 선택하는 조건은 무조건 숯불을 피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과 창문을 열면 바로 일출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계획대로 숯불을 피우고 목살을 굽고 2차 술자리를 이어갔다. 마셔도 취하지 않았고 서로에게 못한 말, 하고 싶은 말을 나누었다. 어둠 속에서 바닷바람 맞으며 밤새 웃었고 새벽은 금방 찾아왔다.
◆생명의 바다 앞에 서다
둥그런 해가 솟구치는 장면은 보지 못했지만 수평선 위 구름 뒤에서 은근하게 퍼지는 울긋불긋한 빛의 향연은 겨울바다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살을 에는 바람, 새벽 겨울바다를 앞에 두고 네 명의 남자가 아무 말 없이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바닷가까지 나갔다. 민박집 앞 도로 건너 바로 바다다. 도로를 경계로 민박집이 있는 곳은 생활의 편린이 흩어져 있는 곳이라면 바다 쪽은 동경의 대상이자 범접하지 못할 비범한 그 무언가가 있는 이상향 같았다.
동 트기 전이 가장 춥다. 그것도 밤새 바다를 건너온 영하의 바람은 습기를 머금었는지 오리털점퍼 속까지 파고들어 속살이 시릴 정도다. 들이 마시는 호흡에 ‘빠작’하면서 순간적으로 코와 연결된 기도가 어는 느낌이다. 서릿발 같은 얼음 입자들이 폐 깊은 곳에 박히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추위는 그 동안의 나를 생각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됐으며 눈앞에 펼쳐진 겨울 새벽바다는 또 다른 나를 그려볼 수 있는 스크린이 된다. 아무 생각 없이 다가갔던 겨울 바다에서 또 다른 나를 잉태한다.
잠시라고 생각했는데 바닷가를 거닐었던 그 순간이 한 시간이나 됐다. 해는 떴고 날은 밝았다. 잠잠했던 바다도 잠에서 깨어났는지 거칠게 파도를 몰아친다. 그 위로 갈매기가 끼룩 거리며 아침 비행을 한다.
우리도 인근 식당에서 황태국으로 아침을 먹고 남쪽으로 향했다. 7번 도로를 따라 가다가 도착한 곳은 정동진이었다.
저 멀리에서 집채 같이 일어난 파도가 바다 넓이만큼 팔을 벌려 해안으로 달려온다. 부채처럼 원호를 그리며 육지로 들어온 해변 끝에 서서 밀려오는 파도를 옆에서 바라본다. 부서지는 파도가 하얗게 포말을 일으키며 바람에 날린다.
쉬지 않고 밀려오는 파도가 해변에 상륙하면 바다는 사라지고 바람만 남는다. 바람은 여행자의 마음까지 흔든다. 정동진 바닷가에서 ‘겨울바다’다운 ‘겨울바다’를 보았다.
1994년 드라마 <모래시계>에 여주인공이 바닷가 간이역 소나무 한 그루를 배경으로 서 있는 장면이 방송되면서 정동진은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청량리역 등 전국의 많은 역에서 해돋이열차를 운행한다.
정동진역에서 입장료를 내고 플랫폼으로 들어간다. 바닷가 해변 바로 옆에 플랫폼이 있고 플랫폼 한쪽에 ‘시비’와 ‘소나무’ 등이 있다. 바다 바로 옆 간이역 플랫폼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낭만에 가슴이 나긋해진다.
◆가장 아름다운 바닷가 도로를 달린다
정동진에서 남쪽으로 차를 달려 고개 하나를 넘으면 심곡항이 나온다. ‘심곡리’의 원래 이름은 ‘지필’이었다. 마을 모양이 종이와 붓이 놓인 형상이라고 해서 ‘지필(紙筆)’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원래 이름인 ‘지필’과 아무런 상관없는 ‘심곡’으로 바뀌었다.
심곡항이 유명한 것은 바닷가 도로 때문이다. 심곡항부터 금진항까지 이어지는 약 2km 해안도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닷가 길 중 하나다.
심곡항을 벗어난 차는 바다 바로 옆 도로를 달린다. 파도가 높게 일면 포말이 차창에 흩뿌려진다. 바닷가 산굽이를 돌아가는 도로는 산 쪽으로 기울어졌다. 길 자체가 역동적인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이 길을 달릴 때면 차의 속도가 느려진다. 차를 세우고 길과 하나 되어 온몸으로 부서지는 파도를 맞이하고 싶은 곳도 보인다.
통쾌한 풍경에 상쾌해진 마음으로 금진항에 도착했다. 평범한 어촌 마을 금진항을 지나 남쪽으로 차를 달리면 강릉을 벗어나 동해 옥계해변을 만난다. 망상해변을 지나서 묵호항에 도착했다.
겨울 바다와 해안도로 드라이브를 즐긴 뒤 도착한 묵호항이 이번 여행의 종착지이다. 주문진항에서 맛보지 못했던 오징어를 찾아 묵호항까지 왔다. 묵호항 해산물 판매장에서 오징어와 고등어회 등을 사서 인근 식당으로 향했다.
달달하고 쫄깃한 오징어회와 부드러운 고등어회, 오징어 통찜 등으로 동해의 참 맛을 보았다. 다시 항구로 나오는 데 ‘만리장성’ 빨간 간판이 눈에 띈다. 갑자기 바닷가 항구마을의 짜장면이 먹고 싶어졌다. 이제는 또 다른 나를 품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차례다.
[여행정보]
<길안내>
한계령 정상 휴게소 - 양양 시내 - 주문진항 - 해안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사천해변(민박) - 7번 도로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정동진 도착 - 심곡리 산굽이길 넘어 가면 심곡항 - 심곡항과 금진항 사이 가장 아름다운 해안도로 - 7번 도로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묵호항
<음식>
주문진항 어시장에서 도루묵과 양미리, 오징어 등 먹을 것을 사서 옆에 있는 식당 거리를 찾아가서 요리 해달라고 하면 일정액을 받고 구이와 찌개 등 요리를 해준다. 또한 그 식당에서도 먹을 것을 판다.
<숙박>
주문진항 남쪽 사천해변에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민박집이 해안도로를 따라 몇 곳 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5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