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가 1인당 GDP(국내총생산) 4만달러 고지를 향해 다시 속도를 내고 있다. 인공지능(AI) 투자 확산과 맞물린 반도체 초호황이 수출과 성장률을 동시에 밀어올리면서 10년 넘게 이어진 3만달러 박스권 탈출 기대가 커지는 모습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의 4만달러 진입 시점을 2028년으로 보고 있지만, 반도체 사이클이 이어지고 원화 가치가 회복될 경우 시계는 더 빨라질 수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고환율과 특정 산업 의존, 부동산에 묶인 가계자산 구조를 넘어서지 못하면 4만달러 시대의 성과가 국민이 체감하는 '부의 도약'으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2028년 4만달러…축배 앞당겨질까
국제통화기금(IMF) 등 주요 기관들은 한국의 1인당 GDP가 2028년 4만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은 2016년 3만839달러로 3만달러 시대를 연 뒤 3만달러 박스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IMF는 올해 3만7412달러, 2027년 3만9012달러를 기록한 뒤 2028년 4만695달러를 점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명목 성장세가 가팔라지면서 4만달러 진입 시점이 앞당겨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명목 GDP는 전기 대비 10.5%, 전년 동기 대비 17.1% 증가했다. 전기 대비 증가율은 1976년 1분기 이후 50년 만에 가장 높았다. 실질 GDP 성장률도 잠정치보다 0.1%포인트 상향 조정돼 연간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김화용 한국은행 국민소득부장은 "현재와 같은 높은 명목 증가세가 지속된다면 올해 중 1인당 GNI(국민총소득)가 4만달러 수준에 근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GNI는 자국민의 실질적인 소득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로, GDP와 함께 명목 성장세와 환율에 따라 달러 환산값이 결정된다. 최근 가파른 명목 성장세는 국민소득 지표 전반의 개선을 견인하고, 이는 우리 경제가 4만달러 시대에 조기 진입할 수 있다는 기대를 뒷받침할 수 있다.
다만 환율이 여전히 변수다. 6월 현재 원/달러 환율이 1500원대에 머물고 있어 원화 기준 성장세가 달러 기준 1인당 GDP 상승으로 온전히 이어지기 어려운 상황이다. 반도체 호황이 성장률을 끌어올리더라도 원화 가치 회복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4만달러 진입 시계는 다시 늦춰질 수 있다.
최근의 원화 약세는 단순한 수급 불안을 넘어섰다.중동 정세 불안에 따른 안전자산 선호, 국제유가 상승에 따른 수입 부담, 외국인의 국내 주식 순매도 등이 겹치면서 원화 약세 압력이 이어지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이 장기화하면 반도체 수출 호조에도 4만달러 진입 시계는 2028년 안팎으로 다시 늦춰질 수 있다.
윤상하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국제거시금융실장은 "1인당 GDP 4만달러 진입 시점은 반도체 사이클이 얼마나 이어질지와 환율 흐름에 달려 있다"며 "수출이 잘 되고 성장률이 높아지는 만큼 별도 충격이 없다면 환율도 안정화 국면으로 갈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과거처럼 경상수지 흑자 확대가 곧바로 원/달러 환율 하락으로 이어지는 관계는 많이 약해졌다"며 변수로 짚었다.
실제 최근 원화 약세는 단순한 무역수지 흐름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졌다. 수출이 늘고 경상수지가 개선되더라도 해외투자 확대, 기업의 해외직접투자, 개인의 글로벌 포트폴리오 투자 증가 등으로 달러가 국내에 머무는 구조가 약해졌기 때문이다. 이는 반도체 호황이 곧바로 원화 강세와 1인당 GDP 상승으로 연결되기 어려운 배경이다.
전문가들은 수출 호조가 곧바로 원화 강세로 이어지던 과거 흐름이 약해졌다는 점에 주목한다. 윤 실장은 "개인들의 해외 포트폴리오 투자가 늘고 기업들의 해외 직접투자도 확대되면서 달러가 드나드는 통로가 무역뿐 아니라 금융계정 쪽으로 훨씬 넓어졌다"며 "수출로 달러를 벌어도 국내로 환류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원/달러 환율이 예전처럼 쉽게 떨어지기 어려운 여건"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성장 측면에서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윤 실장은 "최근 반도체 부문이 워낙 강한 데다 정해져 있는 계약 물량도 올해와 내년에 상당 부분 차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AI 쪽에서 큰 충격이 오지 않는 한 반도체 호황은 성장률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성장률 상승과 환율의 완만한 하향 안정이 맞물리면 IMF 전망보다 4만달러 진입 시점이 앞당겨질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반도체가 끌어올린 성장…다음 과제는 '체감 부' 확산
1인당 GDP 4만달러 진입은 한국 경제의 체력이 한 단계 높아졌다는 신호다. 반도체와 배터리, 조선 등 주력 산업 경쟁력이 여전히 세계 시장에서 통하고 있고 AI 투자 확대라는 글로벌 산업 전환 흐름도 한국 수출에 우호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거시경제 지표만 놓고 보면 분명 고무적인 변화다.과제는 이 성과를 국민 전체가 체감할 수 있는 부(富)로 확산시키는 일이다. 최근 성장세는 반도체 등 일부 수출 대기업과 첨단 제조업이 견인하는 성격이 강한 반면 소상공인과 중소기업이 체감하는 내수 경기는 여전히 회복 속도가 더디다. 과거 수출 호황은 고용 증가와 임금 상승, 소비 회복으로 이어지는 성장의 선순환을 만들었지만 최근 반도체 중심 성장은 이 경로가 약해지고 있다.
반도체는 한국 수출과 경상수지를 떠받치는 핵심 산업이지만, 산업 고도화가 곧바로 고용 확대로 이어지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첨단 공정과 자동화 비중이 커질수록 생산성과 부가가치는 높아지는 반면 고용 유발 효과는 상대적으로 제한될 수 있어서다. 그만큼 수출 회복이 일자리와 소비 개선으로 확산되는 데에는 시차가 생길 수 있다.
윤 실장도 반도체 중심 성장의 쏠림을 경계했다. 그는 "반도체 중심 성장은 한쪽에 쏠린 성장이라는 점에서 우려되는 부분이 있다"며 "한국이 현재 고성능 메모리 반도체에서 앞서 있더라도 가격이 계속 높아지면 수요자들이 다른 제품이나 다른 기술을 찾으려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비싸지면 대체되지 않는 상품은 없다'는 것이 경제학자의 시각"이라고 설명했다.
중장기 경쟁 환경도 변수다. 중국 기업의 추격, 다른 반도체 업체의 부상, 설계 방식 변화 등 기술적 돌파구가 생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국산 반도체에 대한 의존이 커질수록 다른 나라 입장에서는 이를 공급망 리스크로 볼 가능성도 있다. 반도체 초호황이 한국 경제에 분명한 기회지만, 이 기회를 다음 성장 산업으로 연결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정규철 KDI 거시·금융정책연구부장은 일시적 요인이 아닌 구조적 성장 기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한 해 한 해 중동 전쟁이나 반도체 같은 요인이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경제의 구조적 역동성이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단기적인 경기 사이클을 넘어 잠재성장률을 높이는 구조개혁이 필요하다는 취지다.
더 큰 과제는 가계와 국가의 자산 배분 구조다. 한국 가계 자산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부동산 등 비금융자산에 묶여 있다. 한국은 가계자산 중 부동산 비중이 60%대 중반에서 70% 안팎에 이르지만 미국은 금융자산 비중이 70% 안팎에 달한다.
미국 가계의 자금이 주식·펀드·연금 등을 통해 기업과 혁신산업으로 흘러가는 구조라면 한국은 상당한 자금이 부동산에 고정돼 있는 셈이다. 돈이 부동산에 갇혀 있으면 자본시장 생태계는 속도를 내기 어렵다.
역사는 초호황기 소득의 사용 방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1980년대 일본은 제조업 수출 호황으로 막대한 소득을 올렸지만, 상당한 유동성이 기술 혁신이나 생산적 영역에 투자되기보다 부동산과 주식시장으로 흘러갔다. 소득이 생산성 향상이 아닌 자산 인플레이션으로 바뀐 결과 1990년대 초 버블 붕괴 이후 장기 저성장의 늪에 빠졌다.
'네덜란드병'도 반면교사다. 1959년 북해 천연가스 발견 이후 막대한 외화 수입이 들어오자 네덜란드 길더화 가치가 급등했다. 이는 제조업 수출 경쟁력 약화와 전통 산업 공동화로 이어졌다. 일시적인 자원 소득이 기존 산업 기반을 약화시킨 역설적 사례다. 특정 산업의 호황을 경제 전체의 장기 경쟁력으로 연결하지 못하면 구조적 취약성이 커질 수 있다는 의미다.
노르웨이는 자원의 축복을 미래 자산으로 바꿨다. 1969년 북해 유전을 발견한 뒤 석유 수익을 당장의 소비나 단기 복지 재원으로 모두 소진하지 않고 1990년 정부연금기금 글로벌(GPFG), 이른바 오일펀드를 설립해 전 세계 자본시장에 장기 분산 투자했다. 석유라는 고갈성 자원에서 나온 소득을 지속 가능한 금융자산으로 전환한 것이다. 한국의 반도체 초호황도 일시적 사이클 소득에 그치지 않고 미래 성장 자산으로 전환할 때 의미가 커진다.
부동산에 잠긴 돈, 자본시장·해외투자로 돌려야
한국도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예정이다. 4만달러 진입 이후 지속 우상향 흐름을 이어가는 것은 성장의 과실을 어디로 흘려보낼 것인지에 달려 있다. 반도체 초호황으로 발생한 소득이 부동산 가격만 상승시키거나 단기 소비용 자산으로만 쓰일 경우 호황은 일시적 경기 개선으로만 끝날 수 있다. 반대로 소득이 자본시장과 혁신산업, 해외자산으로 연결된다면 한국 경제의 다음 성장 단계의 초석이 된다는 분석이 나온다.
가계 자금의 부동산 쏠림을 완화하고 자본시장으로의 이동을 유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를 위해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의 납입 한도 및 비과세 혜택 확대, 장기 투자 세제 인센티브 강화 등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국민성장형·청년형 ISA 등 정책성 금융상품 역시 절세 기능에 그치지 않고 첨단산업과 혁신기업에 대한 장기 투자 수단으로 설계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퇴직연금 개편도 과제로 꼽힌다. 현재처럼 개별 사업장과 개인 중심으로 운용되는 구조에서는 장기 수익률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퇴직연금의 기금화와 전문 운용 체계 강화가 이뤄질 경우 안정적인 노후자금이 자본시장과 생산적 투자로 연결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국가 차원의 초과 소득 운용 전략도 필요하다. 반도체 호황에 따른 초과세수와 경상수지 흑자를 단기 지출로만 활용하기보다 한국투자공사(KIC) 등을 통한 장기 해외투자 재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이는 수출로 외화를 벌어들이는 구조에서 나아가 배당, 이자, 투자수익 등 해외 자산소득으로 경상수지를 보강하는 경제로 전환하자는 취지다.
일본은 이미 해외에 축적한 자산에서 나오는 배당·이자·투자수익이 경상수지를 떠받치는 구조를 구축해왔다. 제조업 경쟁력이 과거보다 약화됐음에도 해외 자산소득이 대외수지를 보완하는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 역시 반도체 수출로 벌어들인 외화를 장기 해외자산으로 전환할 경우 수출 강국을 넘어 소득수지 기반을 강화할 수 있다는 목소리다.
기술 혁신을 뒷받침하기 위한 제도 정비도 과제다. 낡은 규제를 걷어내고 모험자본이 성장기업으로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는 법적·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기업성장집합투자기구, 벤처·스케일업 펀드, 세제 지원, 상장·회수시장 개선 등이 유기적으로 맞물려야 혁신기업이 성장 단계별로 필요한 자금을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 부장은 "4만달러에서 5만달러로 가기 위해서는 경제의 구조적 역동성이 올라가야 한다"며 "잠재성장률을 높이는 경제 구조개혁, 진입 장벽 완화, 경쟁 촉진 등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 기술 혁신이 가능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시장과 기업 투자 사이의 균형도 과제로 남는다. 초호황기 이익을 임금과 성과급으로 나누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지만 초과이익을 단기 분배로만 소진할 경우 연구개발, 설비투자, 인재 확보 여력이 줄어들 수 있다. 성장의 과실이 노동자와 가계에 공정하게 돌아가도록 하면서도 다음 산업 사이클에 대비할 재투자 여력을 확보하는 균형점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경쟁력이 장기간 유지될 가능성이 크지만, 특정 산업 의존도를 낮추고 다음 성장동력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윤 실장은 "1970년대 초반 한국의 주력 산업은 섬유산업이었지만 지금 와서 섬유산업을 잃었다고 아쉬워하지는 않는다"며 "반도체도 앞으로 최소 몇 년, 길게는 10~20년간 한국 경제에 중요한 산업일 가능성은 크지만 영속적으로 현재 지위를 유지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반도체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연구개발(R&D) 투자를 지속하는 동시에 AI·반도체 생태계 변화에 맞춰 다음 산업으로 이동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