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사상 초유의 대규모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초래한 배경은 외부 견제를 받지 않는 '폐쇄적 시스템' 탓이란 평가가 나온다. 헌법상 독립기구로 출범한 선관위가 외부 감시의 사각지대에서 선거철 대규모 휴직 등 도덕적 해이를 키워 왔다는 지적이다. 일각에선 구의원 선거의 표 격차가 적을 경우 재선거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노태악 선관위원장은 5일 경기 과천 선관위에서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열고 "이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면서 중앙선거관리위원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이어 "참정권이라는 국민의 소중한 권리를 침해하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발생한 것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며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리게 된 점 다시 한번 머리 숙여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이번 사태는 선관위의 도덕적 해이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선관위는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전체 유권자의 1.1배에 달하는 투표용지 제작 예산을 받아갔다. 그러나 실제 인쇄는 절반 수준에 그쳤다. 송파구는 유권자의 50%, 광진구 50%, 강남구 55%만 본투표 용지로 확보했다. 예산은 넉넉히 타가고 용지는 빠듯하게 찍은 것이다.
선거철마다 직원들이 장기 휴직을 쓰는 도덕적 해이도 문제를 키웠다. 선관위 자료에 따르면 지난달 1일 기준 휴직자는 176명이다. 이는 최근 10년 사이 두 번째로 많은 수치다.
소쿠리 투표 논란이 불거진 2022년 대선 때에는 218명이 휴직했다. 선거가 없던 2021년 휴직자가 91명인 점을 감안하면 '선거철 휴직'이 부실 관리를 부른 구조적 요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소쿠리 투표는 당시 코로나19 확진·격리 유권자의 기표지를 투표함이 아닌 쇼핑백과 소쿠리 등으로 옮겨 부실 관리 논란을 자초한 사고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날 '동행미디어 시대'와의 통화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헌법상 보장된 '참정권 침해'로 평가했다. 한 교수는 "공무원들이 과실로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했고 그것 때문에 투표를 못 했다는 게 입증된다면 국가배상 대상이 된다"고 말했다. 선거 관리 실패가 금전 배상 책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한 교수는 서울시장 선거의 경우 1·2위 표차가 약 6만표로 해당은 되지 않지만 구의원 선거는 사정이 다를 수 있다고 봤다. 한 교수는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한 선거구는 구의원 등의 1·2위 표차가 어느 정도인지 봐야 한다"며 "예를 들어 200~300명 정도 차이가 난다면 중대한 문제로 재선거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한 교수는 '투표의 단일성 원칙'을 위배한 점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진단했다. 선거 4대 원칙 중 보통선거는 모든 사람이 같은 조건에서 투표해야 한다는 뜻을 담는다. 대다수 유권자는 아무 정보 없이 표를 던졌지만 일부 유권자는 출구조사 결과를 본 뒤 투표했다. 한 교수는 "정보량이 동일하지 않다"며 "선거 관리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선관위가 투표 마감 전 용지 부족 사태를 이미 알고 있었던 만큼 투표는 진행하되 결과 공표는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봤다. 개표 자체는 가능하지만 홈페이지에 실시간 집계를 띄우지 않았다면 정보 불균형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원인을 3가지로 짚었다. 첫째는 조직 운영이다. 장 교수는 "선관위원장을 비롯해 선관위원 9명 중 상임위원은 단 1명 뿐이라 조직 전체가 느슨하다"며 "현직 대법관이 선관위원장을 겸직하고 있는데, 현직 대신 전직 대법관이 맡는 방안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둘째는 인력 운용이다. 장 교수는 "선거가 닥치면 일이 폭증하는데 평소 인력을 유지하는 것도 무리"라면서 "동원한 인력 쪽에서 사고가 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했다. 이어 "당일 와서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할 게 아니라 1~2주라도 선거 원리 교육과 과거 실수 사례를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셋째는 외부 통제다. 선관위는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만들어진 헌법상 독립기관이라 외부 견제가 사실상 없다. 2023년 자녀 부정 채용 의혹으로 감사원이 직무감찰에 나서자 선관위는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2월 재판관 8명 전원일치 의견으로 선관위의 손을 들어줬다.
장 교수는 "외부 감사가 선거 개입으로 번지면 더 심각하다"며 "감사실을 내부 직원이 아닌 외부인 중심으로 운영하는 방안이 발표된 적 있는데, 그런 장치가 효과를 보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한병도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대규모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관련해 국정조사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선관위도 국회의 국정조사는 물론 내부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해 사태 원인을 밝히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