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의 피의자·피고인이 늘어나면서 이들의 사법 접근권을 보장하기 위해 사법지원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하다/뉴스1


"아내! 사망하게 한 거 인정하느냐고요!"

지난 8일 오전 서울동부지법 형사합의12부(부장판사 김세용) 심리로 열린 조모씨(90)의 살인 혐의 첫 재판. 재판정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재판장이 언성을 높이자 조씨는 그제야 "인정한다"고 답했다. 조씨는 지난 7월21일 서울 광진구 자택에서 배우자가 외도했다는 망상에 빠져 80대 아내의 목을 졸라 살해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연녹색 수형복 차림의 조씨는 구치소에서 보청기를 잃어버렸다며 법정에서 받은 헤드셋을 연신 매만졌다. 공소사실을 인정하느냐는 재판부 질문에는 고개를 저으며 "무슨 얘기인지…" "잘 못 알아듣겠소" "말뜻을 모르겠는데…"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재판부는 공소사실과 증거 인부(인정 또는 부정) 절차만 마친 뒤 10여분 만에 재판을 끝냈다. 방청석에 자리한 가족은 새 보청기를 맞추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했고, 구치소 측은 보청기 관련 기록이 없다고 했다. 변호인은 "필담은 가능하다. 저도 면담할 때 메모지에 (용건을) 적어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 재판부는 "다음 기일에도 (보청기 문제 해결이) 안 되면 법정 모니터에 질문을 타자로 쳐서 물어보는 것으로 하겠다. 지금은 (피고인이) 잘 안 들린다고 하니 진행하기 어렵다"며 재판을 마무리했다. 변호인은 조씨에 대한 정신감정을 신청했다. 2차 공판기일은 오는 22일 열린다.



고령 피고인은 늘어나는데, 사법 조력은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찰청 범죄통계에 따르면 65세 이상 고령 피의자는 2011년 6만8836명에서 지난해 15만4832명으로 2.2배, 71세 이상으로 기준을 높여도 같은 기간 2만5041명에서 6만7006명으로 2.7배 늘었다. 고령 피의자 중 구속 송치된 인원은 382명에서 1120명으로 2.9배 증가했다.

65세 이상 고령 피의자 및 고령 수용자 현황. 경찰청 범죄통계와 법무부 교정통계연보를 재구성했다./그래픽=신재민 편집위원



구금된 고령자도 급증했다. 법무부 '2026 교정통계연보'를 보면 지난해 65세 이상 수용자는 5701명으로 전체의 8.8%를 차지했다. 2017년(2541명)보다 2.2배 많다. 고령층에게 청력 저하는 흔한 질환이다. 대한이비인후과학회에 따르면 국내에서 실시된 유병률 조사에서 65세 이상 인구의 38%가 노인성 난청을 앓는 것으로 조사됐다.

법원행정처는 올해 1월부터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사법접근 및 사법지원에 관한 예규'를 시행 중이다. 장애인뿐 아니라 고령·질병 등으로 재판 참여가 어려운 사람에게 이동 보조 인력, 휠체어·헤드셋·확대경 같은 보조기기, 수어 통역 등을 제공한다. 속기사가 입력한 내용을 법정 스크린에 띄우는 문자 통역도 있다. 각급 법원은 전담 담당자를 지정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해야 한다.

'진술 조력인' 제도를 고령의 피고인에게도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진술 조력인이란 성폭력범죄처벌법에 규정한 제도로, 아동·장애인 피해자의 진술이나 법정 증언 과정에서 의사소통을 돕는 전문가다.

임성근 사법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고령자의 사법접근권 제고 방안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서 "고령으로 인한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인해 의사소통이나 의사 표현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 피고인이나 피의자에게도 실체적 진실 규명을 위한 무기 대등의 원칙(재판에서 검사와 피고인이 대등한 위치에서 주장과 입증을 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원칙)과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의 측면에서 진술 조력인 제도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법 제도를 개선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