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을 따라 걷기로 했다. 섬진강 상류 임실 천담마을부터 순창 구미마을까지, 강 따라 길이 흐르고 길 따라 마을이 이어진 그곳에 서면 남들이 하는 자질구레한 이야기도 정겹게 들릴 거라 생각했다.
 
강심으로 돌을 던졌다. 물은 잠깐 동안 출렁일 뿐이었다. 어깨가 아파올 때까지 돌을 던졌다. 아픈 건 내 어깨일 뿐 강물은 아무 말 없이 파문을 지우고 흘러갔다. 시퍼렇게 흐르는 건 강물인데 멍이 든 건 내 마음이었다. 세월도 한참 지나 다시 겨울강, 주머니에 손 찔러 넣고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바람을 피해 등 돌리던 그림자 하나 강물로 쓰러졌다.
 
◆섬진강, 다시 흐르다…

겨울강을 따라 걷기로 한 건 순전히 섬진강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김용택 시인의 시 ‘섬진강’을 읽고 나서 섬진강을 걸어서 보리라 마음먹었던 때가 있었다.
 
'…누님의 가슴에 꼭 껴안아주면 나는 누님의 그 끝없이 포근한 가슴 깊은 곳이 얼마나 아늑했는지 모릅니다. 나를 안은 누님은 먼 달빛을 바라보며 내 등을 또닥거려 잠재워주곤 했지요…' -김용택 시인의 시 ‘섬진강4’ 일부
 
시는 그랬다. 시는 섬진강을 누님의 품으로, 또 어머니의 품으로 만들었고 그렇게 내 가슴에 들어와 앉았다. 그렇게 청춘을 보내고 나서야 다시 섬진강 앞에 선 것이다.


강가의 아이들은 돌과 나뭇가지만 가지고 한나절 논다.

곡성부터 구례, 구례부터 하동까지 이어지는 섬진강 중하류의 물길은 이미 걸었으니 그 처음 같은 물줄기를 찾아가는 발길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서울에서 임실을 거쳐 강진 그리고 또 다시 천담마을에 도착했다. 천담마을 솔숲 향이 그윽했다. 강가의 마른풀 냄새와 물비린내가 솔향기에 섞여 마을을 맴돌았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기 때문에 장구목까지 서둘러 걸었다.

천담교 앞을 지나 조금 가다보니 ‘장구목가든’ 간판과 화살표가 보였다. 길을 벗어나 오른쪽으로 오르막길을 올라야 했다. 시멘트로 닦여진 길은 꽤 가팔랐다. 그러나 오르막은 금방 끝났다. 여름 같으면 나뭇잎 우거져 터널을 만들었을 법한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그런 겨울길을 해질녘에 걷자니 을씨년스러웠다. 잰걸음으로 마음을 다독였다. 갈래 길이 나왔다. 아랫길을 선택했다.

오늘 하루 머물기로 계획한 장구목에 도착하기 전에 있는 마을은 사람 사는 마을이었지만 사람 소리가 없다. 낡은 집 뒤로 푸른 대숲만 바람에 일렁이고 흙먼지에 비닐조각이 마을 골목길에 나뒹굴었다. 낯선 여행자의 발길을 경계하는 개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흙벽은 이미 허물어져 앙상한 뼈대마저 드러났다. 길가의 풀은 누렇게 말라 납작하게 눌려있었다. 마을 옆으로 흐르는 강물 소리가 마을을 온기로 감쌀 뿐이었다. 섬진강이었다.
 
◆장구목 여울에 밤은 깊어가고

마을 옆으로 강이 흐른다. 길과 강은 점점 가까워졌다. 몇발짝만 옮기면 바로 강이다. 강가의 바위들이 시커멓다. 마른 풀들이 서걱거린다. 가끔 보이는 억새가 바람에 흔들린다. 낡고 무거운 색이 겨울의 빛깔인가 생각하던 순간 발밑에 푸른색이 눈에 들어왔다.

풀이 돋았다. 아, 겨울 끝자락에 푸른 풀이 돋아났다. 이름 모를 풀들의 푸른빛이 힘차 보였다. 강가의 마른 풀과 돌과 바위들이 지천인 그 틈바구니에 봄처럼 자라난 푸른 풀이라.


장구목 바위. 자연이 예술이다.

풀 한포기에 가라앉았던 마음이 파릇파릇해졌다. 그 마음으로 강을 따라 걸었다. 천담마을에서 한 4~5Km 정도 걸은 것 같다. 장구목이다. 해는 지고 보랏빛 공기만 저녁 섬진강을 감쌌다. 장구목가든에 숙소를 정하고 저녁을 시켰다.

겨울 섬진강을 찾는 여행자들이 거의 없기에 숙소를 준비하는 주인아줌마의 손길이 분주하다. 거기에 저녁으로 새우탕을 주문했으니 더 그랬을 것이다. 한참 걸린다는 주인아주머니 말에 막걸리를 주문했더니 동동주만 있단다. 동동주라도 좋으니 먼저 내달라고 했다.

그렇게 맛을 본 동동주 맛이 기가 막혔다. 인근 마을 할머니가 누룩부터 손수 만들어 빚은 술이란다. 어두워진 창밖에 가로등이 불빛을 밝혔다.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아래로 강물은 흐르고 있을 것이다.

아줌마 말처럼 밥상은 늦게 들어왔다. 새우탕을 시켰는데 참게까지 들어갔다. 겨울 섬진강을 찾는 여행자에게 주는 아줌마의 선물이었다. 그런데 찌개 옆에 놓인 반찬접시에 꽃이 피었다. 도라지 무침에도, 가지나물에도, 고구마조림에도 꽃장식이 됐다. 그리고 처음 보는 반찬들도 있어 물어 봤더니 황새냉이란다. 아, 무슨 반찬이름이 ‘황새냉이’인가. 어찌 이렇게 밥상을 차리냐고 물었더니 섬진강과 함께 살다보니 그렇게 바뀌었다고 대답한다.

주인아줌마는 도시사람이었다. 이곳에서 시작한 신혼살림에 세탁기도 없었다. 겨울강에 나가 빨래를 해야 했다.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세월도 이제는 깨알 같은 이야기로 풀어 놓는다. 환경운동가도 아니었다. 그러나 자연에서 자연과 함께 살다보니 자연이 보였단다. 길가에 풀들이 알면 밥상에 오르는 반찬이 되고 모르면 먼지 풀풀 쌓인 이름 없는 풀이 된다는 것이다. 아줌마와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며 술잔을 비우다 보니 세동이째 바닥을 보았다.

밥상을 물리고 어둠 속에서 혼자 흐르고 있는 섬진강 곁으로 나갔다.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곳에 앉아 여울에 귀를 기울였다. ‘졸졸’ ‘콸콸’ 흐르는 여울물 소리가 옛이야기로 들렸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내 얘기도 강물에 풀어 놓았다. 강은 그렇게 그 처음부터 사람 사는 마을 이야기를 품고 흐르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억새는 물 위에도 뿌리를 내릴까요?

아침 강 위에 햇볕이 부서져 영롱하다. 밝은 빛 주변은 대조적으로 어둡다. 빛에도 그늘이 있다는 것을 아침 섬진강에서 봤다. 빛나는 물결은 물결대로, 어두운 물결은 또 그대로 부드럽게 출렁이고 있었다.

햇살 풀리기를 기다렸다가 길을 나섰다. 밀가루를 주물러 놓은 것 같은 암반반위 위에서 햇볕과 추상이 만들어 놓은 우연의 명장면을 찾느라 분주했다. 어제 아줌마가 얘기한 요강바위는 그곳에 있었다.

높이와 너비가 대략 2~3m씩 되는 바위에 어른 두명 정도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뚫린 바위였는데 볼만 했다.


억새와 강과 기이한 바위들이 모여있는 풍경.

이 바위를 누군가가 일본으로 내다 팔려고 했는데 그 가격이 무려 20억원이 넘었다고 한다. 다행히 일본으로 반출되기 전에 바위를 찾아 제자리에 옮겨 놓았다고 한다.

요강바위를 끝으로 장구목마을을 출발했다. 강이 흐르는 방향으로 걸었다. 바람은 차갑게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햇살은 따듯했다.

햇살은 물결 위에도 내려 앉아 반짝이고 억새꽃에도 스며들어 부드럽게 빛났다. 바위와 물과 나무와 억새가 어우러진 풍경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길에서 벗어나 억새밭으로 들어갔다. 모두 죽은 것 같이 누런 빛깔로 서서 바람에 일렁이고 쓰러지지만 억새는 뿌리로 완강하게 삶은 움켜쥐고 있었다. 흙에서도 물에서도 억새는 꽃을 피운다.

어디에도 뿌리 내리지 못한 생(生)들이 떠다니는 길목 어딘가에 나도 있었을 것이다. 물 위로 떠가는 억새가 보이지 않을 때가지 나는 돌을 던졌다. 어깨가 아파올 때까지 돌을 던졌다. 억새는 그렇게 흐르다 어디에선가 뿌리를 내릴까? 물이라도 움켜쥐고 안간힘을 다해 살 수 있을까? 돌팔매에 가슴이 ‘턱’ 막힌다. 너무 오랜만에 강으로 돌을 던지고 있었다.
 
◆그림이 있는 옛마을

아무도 다니지 않는 시골마을 강가 길에서 만난 낯선 풍경 하나. 하늘을 찌를 것 같은 높고 큰 나무에서 신성이 느껴졌다. 또한 벼락같은 바위가 곧 쓰러질 것 같은 길을 지나니 동구나무 같은 나무 하나가 나온다. 구미마을에 거의 다 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동구나무 아래 한참을 서 있었다. 나무는 컸지만 경외감보다는 살가운 정이 느껴졌다. 그곳에서 강은 다른 곳으로 흐르고 길은 사람 사는 마을로 이어졌다. 그 길 끝에 구미마을이 있었다.
집 앞에 논이 있고 논 앞으로 실개천이 흐르고 마을 뒤는 낮은 산이다. ‘배산임수’에 ‘문전옥답’의 형국이었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햇볕이 아늑하게 고여 엄마의 품속 같았다.


구미마을에는 벽과 담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할머니 한분 지팡이 걸음으로 다가오시더니 사진 많이 찍어가라신다. 마을 자랑을 이어 놓으시고는 마실가신다며 돌아서신다. 지팡이 걸음이 느리다.

돌담길과 옛 한옥도 정겨운데 벽과 담에 그림을 그렸다.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는 그림은 아이들이 그린 동화 속 세상 같았다. 돌담길을 걸었다. 나무대문 삐걱거리는 소리도 예스럽다. 양철지붕 위에 놓인 늙은 호박은 줄기째 말랐다. 아직 포장하지 않은 흙길 골목길은 더 예스럽게 보였다.

마을이 생각보다 컸다. 100가구 정도 산다고 하니 요즘 시골마을 치고는 꽤 큰 축에 든다. 고향 같은 마을 이곳저곳 둘러보고 나오는데 돌담 안 감나무에 까치밥이 달렸다. 정겨운 마음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사진을 찍는데 감이 반이나 없어졌다. 배고픈 까치가 밥을 먹고 갔나보다. 그때서야 나도 배가 고파졌다.
 
<여행정보>

길안내
*자가용 : 호남고속도로 태인나들목 - 30번 국도 - 칠보 - 산내 - 섬진강댐 - 회문삼거리에서 강진방면 30번 도로로 좌회전 - 717번 도로로 우회전 - 천담교 - 천담교 지나 조금 더 가다가 장구목가든 이정표 따라 우회전 - 갈림길이 나오면 오른쪽(아랫길)길로 내려감 - 길 따라 계속 가면 장구목마을, 구미마을이 차례로 나옴.

*대중교통 : 남부터미널에서 임실까지 가서 임실서 강진까지 간다. 이후 강진에서 천담교 앞을 지나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천담교 앞에서 내려서 걷기 시작한다. 강진에서 천담교까지 가는 차가 많지 않으니 택시를 타고 천담교까지 간다. 천담교 앞에서 장구목까지는 약 5Km 정도 된다. 장구목에서 구미마을까지는 약 4Km 정도 거리다. 임실터미널 063-642-2114. 강진터미널 063-643-2583
 
여행팁 대중교통으로 가다보니 오후에 임실에 도착했고 강진까지 가는 버스를 갈아타고 강진에 도착했는데 천담마을까지 가는 차를 기다리다가 해 다 질 것 같아 택시를 탔다. 강진버스정류장에 택시사무소가 있다. 차가 없으면 문에 적혀있는 전화번호로 전화하면 된다. 천담교까지 1만원 정도 나왔다.

구미마을에서 동계까지 버스가 다니는 데 하루에 몇대 없다. 구미마을에서 동계까지 약 3Km 정도 되니까 걸어갈 만하다. 동계에서 오수 가는 차를 타고 오수에서 전주 가는 차를 갈아타고 전주에서 서울 가는 차로 갈아타면 된다.
 
숙박 장구목 요강바위 앞에 장구목 가든 등 숙박할 곳이 두세곳 있다.
 
음식 장구목 부근에 가든 등 식당에서 매운탕 등을 판다. 장구목가든 새우탕이 맛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