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간, 인근에 위치한 마포구 공덕시장. 이마트와는 불과 큰 도로 두 개를 사이에 둔 거리다.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매서운 한파 때문이었을까. 싸늘하게 식어버린 시장 골목은 황량함 마저 감돈다. 점심 무렵임에도 시장 입구에는 문이 닫혀 있거나 천막이 쳐진 곳이 다수 눈에 들어왔다.
"가게에 있어봐야 전기요금, 가스요금만 축 내는 거지. 손님이 없으니 나와 있기도 그렇고, 안 나오기도 그래."
꽁꽁 문을 걸어 닫은 가게 안, 하릴없이 앉아 있던 고령의 신발가게 여주인(63)은 거리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날 점심 무렵까지 그가 받은 손님은 단 3명. 그는 “숫제 골목에 사람들이 지나다니질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사진=류승희 기자)
◆ 소문은 SSM, 열고 보니 이마트!
이마트 공덕점의 지난 1월13일 오픈은 그야말로 기습적으로 이뤄졌다. '007 작전'을 방불케 했다.
"소문이 돌아도 정확한 실체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마트가 들어온다고 해도 기업형슈퍼(SSM)인 줄 알았지, 설마 이마트가 들어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공덕시장의 한 그릇가게 주인은 "어떻게 시장 상인들도 모르게 이마트가 들어온 것인지 모르겠다"며 “구청에 여러 차례 확인을 요청했지만 알 수 없다는 말만 하더라”고 혀를 찼다.
전통 재래시장인 공덕시장과 이마트의 거리는 불과 200m 안팎. 유통법에서 정한 전통상업보존구역으로 대형마트의 진입이 제한돼 있다. 그런데도 1만㎡ 규모의 대형 매장이 하루아침에 떡 하니 들어선 것이다.
이는 이마트측이 교묘하게 법망을 피했기에 가능했다. 유통법개정안이 통과된 건 지난 2010년 11월10일. 하지만 마포구청이 관련 조례를 만든 건 지난 4월이었다. 이마트는 이러한 조례가 시행되기까지 5개월 남짓한 '틈'을 재빠르게 공략했다. 유통법개정안이 통과된 직후인 11월 26일 공덕점 개설 등록신청을 마쳤다. 조례의 적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마포구청 지역경제과 관계자는 "이마트 공덕점의 경우 조례를 만들고 있는데 등록 신청을 해서 취하를 명하거나 반려할 근거가 없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개점 작업도 치밀했다. 2년 전부터 이마트 입점을 물밑에서 준비했지만, 동네 주민들은 물론 인근 시장 상인들도 정확한 오픈 날짜를 알지 못했다. 공사는 하얀 종이로 창문을 가리고 이마트를 상징하는 문고리도 떼버린 채 은밀하게 진행했다. 이마트 로고가 새겨진 가림막 대신 천막 등을 사용한 이유를 물었으나 이마트측은 함구했다.
동네 주민인 주부 박모(37)씨는 "이마트가 들어온다는 소문이 있어 연초부터 공덕역 주변을 유심히 살폈지만 어디인지 알 수 없었고, 검색 등을 해봐도 오픈 날짜를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정경섭 진보신당 마포구당원협의회 위원장은 "이곳 상인들에게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인데도, 불과 사흘 전에야 이마트 입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상인들과 대책을 논의해도 모자란 구청이 모르쇠로만 일관하고 있다”며 일침을 놓았다. 박종석 마포구상인총연합회 회장(54)은 “구청장에게 면담을 요청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만나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 발길 뚝, 매출 60% 뚝
“이제 여긴 다 죽었다고 봐야 해. 한 두 번 보나, 이런 경우를?”
이마트 개점 후, 상인들은 모였다 하면 이마트 얘기부터 꺼낸다. 그리고 대부분은 “언제까지 가게를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로 끝을 맺는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이곳 상인들의 가게 매출도 뚝 떨어졌다. 신발이나 그릇과 같은 공산품은 두어달 전과 비교해 60~70% 정도, 과일이나 야채가게 등은 30~40% 정도 매출이 떨어졌다. 신발가게를 운영 중인 이동숙씨는 “앞으로 일요일에는 문을 닫을까 생각 중이다”고 전했다. 문을 열면 열수록 손해라는 얘기다.
25년째 과일가게를 운영 중인 상인연합회 박 회장도 “정원 대보름이면 부름으로 준비한 호두는 해마다 물량이 달렸는데 올해는 남았다”며 “그냥 버려야지 어쩌겠냐”고 한탄했다. 박 회장은 원래 3명이던 가게 종업원을 이마트 개점 이후 2명으로 줄였다고 한다.
그나마 음식점 주인들은 20% 정도로 타격을 덜 입은 편이지만, ‘서서히 목을 죄어오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2대째 장수족발을 운영 중인 김도현(51) 씨는 “지금도 피자니 뭐니 얘기가 많은데, 매장 내 음식점이 늘어가면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다”며 “하루하루 손님이 줄어드는 게 눈으로 보인다”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 “보상금 몇 푼? 끝까지 싸울 것”
상인연합회 박 회장은 “우리시장뿐 아니라 다른 시장만 하더라도 벌써 문 닫은 가게 주인들이 적지 않다”며 “대부분은 지금 택시운전이나 막노동 등을 하고 있다. 우리도 문 닫으면 어디로 가겠냐”고 근심했다.
이마트 기습 개점 후 대책 마련을 논의 중인 상인들은, 지난 13일 공식 오픈에 맞춰 서둘러 기자회견과 시위를 벌였다. 상인연합회 진희숙 부회장은 “그러나 이마트도 구청도 구체적인 대책을 협의해 오는 쪽이 없다”고 말한다. 이 같은 상인협회측의 주장과 관련해서도 이마트측은 "확인이 어렵다"고 답했다.
상인들의 요구 사항은 분명하다. 전통시장의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고, 한국적인 재래시장의 특성을 강화해 지역의 랜드마크로 키워달라는 것이다.
박 회장은 “상인들의 생존권이 걸려있는데 보상금 몇 푼 받고 끝낼 일이 아니다”고 정색했다. 그는 “이곳에는 외국인들이 꽤 많이 찾는다. 그들이 이곳에 오는 이유는 시장이 바로 '한국의 문화'이기 때문이다”며 “이번처럼 최소한의 규제나 보호막도 없는 상황에서, 생색내기 지원으로 간판 바꿔달고 지붕 덧씌우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상인들은 2월말에서 3월 초, 인근 시장 상인들과 연합해 대규모 시위를 벌일 예정이다. 구청장과의 면담도 지속적으로 요구 중이다. 이마트 온라인몰에 대항하기 위해 인근의 시장과 연합해 자체 온라인몰을 구축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이와 함께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홍보 활동도 펼쳐나갈 계획이다.
정경섭 마포구위원장은 “개점 당시에도 상인들은 시위를 하고 있는데, 단골들은 미안해서 눈도 못 마주치더라. 그런데도 휴지 받겠다고 줄 서 있는 모습이 씁쓸했다”며 “시장에서 풀리는 돈은 이 지역 내에서 돌고 돈다. 이런 게 지역경제를 살리는 길이다. 주민들의 힘이 절실하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홍보할 방침이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