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기업인 HP와 IBM은 지난해 9월과 올 2월, 기업을 이끌어 갈 수장으로 여성 CEO를 선택했다. 세계적인 기업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여성 CEO들의 활약이 도드라지고 있다.

국내 대표적인 여성 CEO 중 한명인 한현옥 클리오 대표를 만났다. 올해 창립 15년째를 맞는 클리오는 치열한 국내 화장품시장에서 일명 '이효리 아이라이너'로 색조화장품시장을 석권한 중견 화장품업체다. 그는 자신과 같은 길을 꿈꾸는 후배들을 위해 CEO이기 전에 여성으로서 겪었던 비즈니스의 어려움과 강점에 대해 솔직한 얘기를 풀어놓았다.
 

 
◆트렌드 이끄는 '마켓 리더'가 목표

사실 그는 화장품엔 문외한이었다고 한다. 사회학을 전공한 그는 줄곧 마켓리서치 관련 분야에서 일해 왔다. 그런 그가 독립을 준비하면서 화장품 업종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당시만 해도 해외화장품 수입자유화로 바비 브라운과 같은 해외 색조화장품 브랜드들이 국내에 막 수입되던 때였어요. 소비자 트렌드를 읽어내는 일에서 경력을 쌓았으니 앞으로 이 시장이 '뜬다'는 확신은 생겼죠. 로열티를 내는 해외 브랜드보다 자체 브랜드로 뛰어보자는 판단이 섰었죠." 

2002년 클리오를 설립한 그가 회사를 운영하면서 줄곧 강조한 것은 분명했다. 제품 개발이나 마케팅에 있어서 그의 판단기준은 늘 '소비자와의 공감'이었다고 한다.

"화장품을 선택하는 데 여성 소비자들은 굉장히 예민해요. 아주 약간의 차이가 결정적인 선택을 가르는 거죠."

그러다 보니 CEO로서 파격적인 선택도 많아졌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공수해온 기술을 바탕으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베이크드 섀도(구운 섀도)를 선보이기도 하고, 전문 판매 매장의 전시대 하나를 통째로 소비자들이 공짜로 사용해 볼 수 있는 테스터 제품으로 채우기도 했다. 국내 예술가들과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2년에 한번씩 '코스메틱 아트'전시회를 개최하고 있기도 하다.

"당시만 해도 섀도는 -20% 시장이었어요. 그런데 이탈리아 밀라노까지 가서 공수해온 베이크드 섀도는 중견업체로서는 엄청난 투자였던 셈이죠. 매장에 테스터 제품을 배치하는 것도 처음이었어요. 화장품 용기에 아트를 도입한 콜라보레이션도 '왜 그런데 돈을 쓰느냐'는 얘기를 숱하게 들었죠."(웃음)

그러나 그는 이 같은 시도에 자신이 있었다고 한다. CEO이기 전에 여성으로서 자신도 화장품의 소비자 중 한명이었고, 회사의 80%가 넘는 여직원 한사람 한사람의 사소한 의견에도 귀를 기울였다. 그만큼 소비자의 감정선을 세심하게 읽어낸 결과였기에 과감한 투자가 가능했다는 얘기다.

"제품을 많이 파는 것도 중요하죠. 그런데 클리오의 경쟁상대는 MAC이나 바비 브라운 같은 업체들이에요. '시장 1등 제품'이 아니라 소비자들의 트렌드를 이끄는 '마켓 리더'가 되는 걸 더 중요하게 여겼죠." 
 

 
◆직원당 220만원 지원 '통큰 투자'

'마켓리더'를 꿈꾸는 그가 CEO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사람'이다. 회사의 가장 중요한 핵심역량은 인재라는 굳은 믿음 때문이다.

실제로 클리오는 직원들에게 자기계발비를 따로 지급한다. 120만원은 외부강습 등 교육을 받을 수 있다. 100만원은 감성지원비로 문화생활 등에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직원 100여명에게 해마다 220만원. 그야말로 '통 큰 투자'가 아닐 수 없다.

"여성 CEO인만큼 직원들의 감정선을 읽는 데 유리한 점이 있죠. 직원들을 가장 우선순위에 놓으니까, 다른 데서 좀 많이 아껴서 직원들에게 투자하자 그랬거든요." 

한 대표는 "여성 CEO도 그렇고 여성이 많은 직장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 것 같다"고 말을 잇는다. 여성들은 개인주의적이고 그만큼 동료와의 사이가 가벼울 것이라는 색안경이다.

"세계적인 CEO들도 자신의 업무 중 잘한 것을 스스로 찾아내고 칭찬하는 경우가 많대요. 그만큼 업무능력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데 칭찬의 위력이 큰 거죠. 그런데 이거야말로 여성들의 전공 분야잖아요. 직장 내에서도 그렇고 여성 CEO 모임에서도 실제로 자주 힘을 얻어요. 힘들다고 하면 옆에서 동료들이 격려해주고, 칭찬해주고. 저 역시 그 덕분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물론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도 있다. 한 대표는 가장 먼저 육아를 꼽는다. 그가 "지금까지 정말 엄마로서 CEO로서 수없이 버텨야 할 순간들이 많았다"고 말을 잇는다.

"지금이야 아이들이 혼자 잘 커줬으니까 그저 고맙지만 나도 예전엔 아이가 아프면 당장 달려가봐야 하는 엄마잖아요. 그런데 답은 없는 것 같아요. 순간 순간 충실하게 버텨내야죠."

요즘도 직원들 중 출산을 앞둔 이들이 그에게 고민상담을 해오는 경우가 있다. 그때마다 한 대표는 "업무 욕심 때문에 출산을 포기하지 마라"고 토닥여주곤 한다. 당장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순 있지만 누구보다 먼저 처지를 헤아려주고 격려해주는 것이다.

"남자든 여자든 직위가 올라갈수록 업무량도 많아지고 힘들고 지칠 때가 많아요.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지죠. 육아와 업무를 같이 해야 하는 여자들은 더하겠죠. 특히 CEO는 업무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니까 체력도 뒷받침 돼야 하고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원도 필요해요. 내가 집안의 유일한 소득원이라는 절실함이 없다면 스스로도 버텨내기 힘든 게 사실이고요. 국내에서 활약하는 여성 CEO가 드문 데는 현실적으로 이처럼 복잡한 요인들이 작용한 결과죠."

그는 여성 CEO를 꿈꾸는 후배들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남자들은 회사업무가 끝나면 동료들과 술 한잔 하면서 회사 돌아가는 얘기도 하고 불만도 토로해요. 반면 여자들은 업무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을 돌봐야 하죠. 단순히 술자리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여자들의 경우 '조직적 시야'를 기를 수 있는 기회가 남성들보다 적다는 얘기에요. 그런데 CEO와 같은 관리직에는 이런 조직적 시야가 점점 더 많이 필요해지거든요. 교육을 통해서라도 약점을 보완해 준다면 여성 CEO들이 지금보다 더 많은 활약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