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는 추억의 매개체다. 숨을 통해 들고 나는 수천수만가지의 냄새 가운데 머리와 마음의 문을 동시에 열어 추억의 길로 인도하는 오직 하나의 향기가 있다. 뜻하지 않은 시간과 장소에서 실바람보다 가는 한줄기 향기를 느낀 사람들은 그 순간 시간여행을 떠날 준비를 한다.
나에게도 향기에 대한 추억이 있으며 그중 가장 애절한 것은 라일락꽃의 향이다. 그 봄에 만난 그녀와의 첫키스에 라일락향이 담겨 있는 줄도 그때는 몰랐다.
어찌어찌 해서 그녀는 내 곁을 떠났고 그녀의 빈자리가 몸서리치는 외로움으로 다가올 때, 그때 내 머리 위에서 가는비처럼 흩뿌려지던 라일락 향기가 그녀와 나눈 첫키스의 향기와 닮았다는 것을 알았다.
피나클랜드 워터가든
◆첫키스 떠올리는 라일락
지금도 라일락꽃이 필 때면 첫키스가 생각난다. 첫사랑의 추억은 불혹이 넘은 나이에도 라일락 꽃길을 걷게 한다.
오랜 만에 파란 하늘이 열리던 날, 안개도 연무도 없는 화창한 봄날 라일락꽃이 피기 시작했다는 충남 아산으로 향했다. 버스 창으로 들어오는 봄볕에 잠깐 졸다가 깨보니 벌써 아산고속버스터미널이다.
꽃소식을 전해 온 데는 ‘외암리민속마을’과 ‘피나클랜드’ 두곳이었다. 피나클랜드로 가는 시내버스를 기다리는데 좀처럼 오지 않았다. 가끔 지나가는 구름이 해를 가릴 때면 ‘비라도 내려 꽃들이 '꽃문'을 닫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에 버스를 포기하고 택시를 탔다. 버스요금에 열배도 넘는 돈을 지불하고 도착한 피나클랜드는 온통 꽃천지였다.
다행히 하늘은 맑았다. 진입로 길가에 이제 막 새잎이 돋기 시작한 이름 모를 침엽수가 줄을 맞추어 서있었다. 매표소를 지나자 파라솔이 꽃처럼 펼쳐진 휴식공간이 있었고 그 앞은 연못이다. 길 왼쪽에 아담하고 예쁜 집이 있는데 그곳은 수공예체험을 하는 곳이다. 나무에 색을 칠하고 작은 부재료를 덧대어 공예품을 완성하는 것이다. 체험장 앞은 느티나무 그늘 아래 쉼터다.
튤립처럼 생긴 키 작은 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핀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형광빛으로 빛나는 신비한 꽃색이 아름다웠다. 한눈으로 보기에도 이곳은 꽃동산이다.
꽃 같은 아이들이 노란 옷을 입고 잔디밭에서 뛰어논다. ‘퐁퐁퐁’ 터지는 꽃망울이거나 푸른 새싹 같다. 아이들이 있는 봄 풍경을 보며 한발씩 걸음을 옮겨 꽃동산의 중심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라일락꽃
◆라일락 꽃길 위에 서다
길은 여러 갈래였다. 어디로 가나 다 꽃길이었지만, 라일락꽃이 피어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가운데 길이 ‘라일락길’이었다. 길은 자갈길이었고 둘이 걷기에 적당했다. 그리고 그 길가에 핀 꽃이 다 라일락이었다.
때가 일러 꽃이 다 피지 않았지만 희고 붉은 꽃길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내 마음은 벌써 이십년 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 길을 함께 걸었으면…’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도 마음 속 다락방의 문을 열고 그 길 안에 가득한 라일락꽃향기를 한껏 담고 있었다.
피지 않은 꽃들은 새침한 모습 그대로, 피어난 꽃들은 은은하고 달콤한 향기를 머금고 라일락 꽃길을 만들고 있었다. 그 길을 걷다가 멈추고, 멈추었다 다시 걸으며 서성거렸다. 첫키스의 향기 속에 파묻혀 옛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 이외에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라일락 꽃길은 피타클랜드의 중간쯤에 있다. 그 길을 벗어나 경사진 길을 올라가면서 봐야할 것들이 더 남아 있다. ‘태양의 인사’라는 조형물이 있는 곳에서 숨을 고르고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꽃밭을 구경했다. 그 위가 ‘워터가든’이고 ‘진경산수’와 ‘전망대’다.
워터가든은 작은 연못 위에 나무로 길을 만들어 연못 중간까지 들어가게 만든 곳이다. 그 길 중간에 서서 수련의 꽃잎과 창포와 물풀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밝고 명랑한 소리가 들려왔다. 물 위에 놓은 나무길 난간에 매달린 작은 파이프들이 바람에 움직여 부딪히며 내는 공명의 소리였다. 바람이 만들어 내는 선율이었다.
살짝 불어가는 바람에는 은은하고 맑은 소리가 물위에 내려앉았고,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는 바람에는 긴장감 높은 고음이 공명하며 활기차게 울려퍼진다. 그 소리가 온전하게 작은 연못 아래로 떨어졌다가 수면을 스치며 튀어올라 귓가에서 맴도는 것이다. 절집 추녀에 매달린 풍경과 같은 이치지만 이곳에 매달린 그 울림은 봄을 닮았다.
그 위에 작은 폭포가 있는 ‘진경산수’가 있다. 폭포 자체는 그다지 눈길이 가지 않는다. 오히려 폭포 옆 작은 언덕에 설치된 십여개의 스프링클러가 작동하며 내뿜는 물보라가 만들어내는 풍경이 신비롭다. 그리고 그 옆이 피나클랜드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다. 아산만이 눈앞에 보인다.
위에서 부터 와암리민속마을초가/ 와암리 민속마을 안에 피어난 수선화/ 피나클랜드 정원에 피어난 꽃송이들
◆초가와 라일락 서툰 언어의 추억
다시 아산시내로 나가서 고속버스터미널 앞에서 외암리민속마을로 가는 버스를 탔다. 외암리민속마을은 이미 몇차례 다녀간 곳이다. 마을의 여름과 가을, 겨울 풍경은 다 보았는데 봄 풍경을 보지 못했다.
‘삼복더위 지나면 봉숭아 꽃물이 잘 들지 않는다’고 했던 지난번 여름 이 골목에서 만난 할머니 말씀이 생각난다. 초가와 돌담, 논과 하늘은 다 그대론데 마당에, 돌담길에, 마을 곳곳에 꽃 안 핀 곳이 없다.
벚꽃은 푸른 잎과 함께 피어있었다. 개나리가 담장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고, 사과꽃이며 배꽃이 중후하고 우아하게 피어났다. 담장 아래 꽃잔디가 꽃을 피우고 이름 모를 꽃들이 초가와 돌담 사이에서 봄을 완성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피어나 짙은 향기로 마음을 이끄는 꽃이 있었으니 그게 라일락이었다. ‘첫키스의 향기’를 닮은 라일락이 초가 앞에 피어난 풍경은 썩 어울리지 않았다.
담장 안에서 골목길 중간에서 그렇게 옛 마을에서 피어난 라일락의 풍경을 눈에 익히고 마음에 담았다. 어울리지 않는 게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온전한 감정과 서툰 언어의 부조화 속에서 나누게 되는 게 첫키스 아니던가.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서툰 언어의 어색함으로 나눈 첫키스의 추억. 그리고 그 향기를 찾아 이십년이 지난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
아직도 사랑에 미숙한 나는 라일락꽃을 따라 늦은 봄 속으로 더 깊숙하게 들어가고 있었다.
라일락길
[여행정보]
<길안내 및 입장료>
*피나클랜드(입장료 4000~7000원. 주차료 없음)
자가용 : 경부고속도로 천안IC - 아산 - 39번국도 아산만방조제 방향 - 만남의 광장 지남 - 월선 교차로에서 좌회전 - 피나클랜드
서해안고속도로 서평택IC - 아산만방조제 방향 - 아산만방조제 넘어 교차로에서 온양, 천안방면으로 직진 후 월선교차로에서 우회전 - 피나클랜드
대중교통 : 아산고속버스터미널 앞 건널목 건너 시내버스정류장 있음. 600, 601, 610, 611번 버스를 타고 모원리에서 하차(버스 탈 때 모원리에서 정차하는가 확인 요). 길 아래로 내려가 굴다리 지나 왼쪽으로 가면 됨(모원리 버스정류장에서 약 4~5분 정도 걸어가면 나옴).
*외암리민속마을(입장료 1000~2000원. 주차료 없음)
자가용 : 경부고속도로 천안IC로 나와 아산(온양) 방면 21번 국도 - 장존교차로에서 39번국도 외암리 방면 - 외암리민속마을
대중교통 : 아산고속버스터미널 앞 건널목 건너 시내버스정류장 있음. 강당골 가는 버스를 타고 외암리민속마을에서 내리면 된다.
<숙박>
피나클랜드에는 숙박시설이 없다. 외암리민속마을 안에 민박집이 있다. 시골마을 정취를 즐기며 하룻밤 보낸다.
<음식>
피나클랜드 안에 한식·양식 레스토랑이 있다.
외암리민속마을 안에 ‘시골밥상(신창댁)’이 있다. 시골집에서 청국장과 된장찌개 등을 먹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시골밥상의 풋풋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공예체험>
피나클랜드와 외암리민속마을에서 공예체험을 할 수 있다.
<문의>
피나클랜드 : 041-534-2580
외암리민속마을 : 041-544-82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