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를 이 중국인에게서만 들은 것이 아니다. 전에도 여러번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이 사망한 뒤 그의 아들인 29세의 김정은이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발표됐을 무렵이었다. 김일성,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까지 3세 세습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중국인들은 지나가는 말처럼 마오안잉 얘기를 꺼냈다.
당시엔 북한의 세습이 이슈가 됐던 터였고 담소 중에 나온 말이라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의 제5세대 지도자를 뽑는 '중국공산당(中共) 제18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가 오는 11월8일 개최된다는 발표가 있었던 다음날(9월29일), 또 이런 얘기를 들으니 귀에 확 들어왔다.
마오안잉와 마오저둥
◆마오저둥의 장남 살아있었다면 중국도 세습제?
어째서 이런 얘기가 나오는지 잠시 마오안잉에 대해 알아보자. 마오안잉은 1922년 10월24일 후난성 창사에서 마오저둥과 그의 첫째 부인인 양카이후이 사이에서 장자로 태어났다. 8살 때 양카이후이가 체포돼 투옥됨에 따라 그와 그의 동생인 마오안칭도 감옥에서 엄마와 함께 생활했다. 양카이후이가 옥사하자 어린 두형제는 상하이시에 있는 중국공산당 지하조직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에 들어갔다.
마오안잉은 1936년 양카이후이 및 마오안칭과 함께 소련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1946년 귀국해 옌안에서 살았다. 이때 '노동대학의 한과목을 이수해야 한다'는 마오저둥의 원칙에 따라 농촌에서 농민들과 함께 생활했다.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나 부산 근처까지 남하했던 인민군이 UN군의 인천상륙 이후 압록강 근처까지 쫓기자 중국군과 함께 1950년 10월15일 참전했다. 그 뒤 40일이 지난 11월25일 미군 포격을 받고 전사했다.
그렇다면 마오저둥은 정말 마오안잉이 전사하지 않았더라면 큰 아들을 후계자로 삼았을까. 역사에서 가정(Historical If)처럼 쓸데없는 것도 없다. 고려 말기에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회군하지 않았다면 (요동 정벌이 성공했을까),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선조에서 끝나고 새로운 왕조가 생겨 한일합방의 치욕을 겪지 않았을까), 1987년 대통령 선거 때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가 단일화를 이뤘다면 (민정당과 통일민주당의 합당이라는 이상한 결혼이 없었을 것이고 IMF 위기도 겪지 않았을까) 등처럼 말이다.
다만 장졔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를 타이완으로 밀어내고 중국의 공산주의혁명을 성공시킨 뒤 "중국인들이 드디어 벌떡 일어섰다"고 일갈한 마오저둥이 1950년대 후반의 대약진운동과 1960년대의 문화대혁명이라는, 건전한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광기를 뿜어냈던 것을 생각하면 '후계자 마오안잉' 가설도 어느 정도 가능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소련의 모스크바 사관학교에서 유학을 했으며 마오저둥보다 훨씬 키도 크고 준수한 용모를 가진데다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아버지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게 살았던 마오안잉의 짧은 삶을 생각한다면 가능성이 꽤 있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마오안잉
◆"마오안잉은 평범한 병사였을 뿐"?
이는 마오저둥이 1951년 3월 오랜 친구인 저우스쟈오와 한담하던 중에 한 말에서도 약간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안잉을 한국전쟁에 보내지 않았다면 그는 희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캉메이위앤차오(抗美援朝,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북한)을 돕는다는 뜻, 중국에서는 한국전쟁을 이처럼 부른다)를 강력히 주장했다. 사람들은 모두 아들을 소중하게 여긴다. 지도자인 내 아들을 보내지 않고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아들을 전쟁터로 보내라고 할 수 있겠나. 또 당시 안잉은 아직 어렸다. 그는 소련 유학에서 돌아와 농촌에 가서 단련을 했지만 아직 (지도자가 되기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젊은이에게 가장 좋은 성장환경은 고통스런 어려움이다. 전투 중에서 사람은 강력하게 단련되기 때문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마오저둥은 1950년 11월25일 큰 아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 하루 종일 식사도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줄담배만 피웠다고 한다(工人日報 1961년 7월18일자). 하지만 캉메이위앤차오 전쟁의 총사령관이던 펑더화이가 "안잉은 지원군의 보통 군인 중 한명"이라고 하자 마오저둥은 "당신의 말이 맞다"고 했다.
그러면서 "전쟁은 원래 죽는 사람을 원한다. 중국 인민지원군은 이미 많은 생명을 잃었다. 그들의 희생은 영광스러운 것이다. 안잉은 보통 군인 중 한명이다. 그가 내 아들이라고 해서 큰 일로 삼을 이유가 없다"고도 했다.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사랑하는 큰 아들의 전사에 창자를 끊는 아픔이 있었지만 애써 참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습제 가설 불성립의 결정적 단서
그러나 '마오안잉이 전사하지 않았다면 세습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가설 내지 우려를 깨는 결정적 단서가 있다. 바로 마오안잉의 동생이자 마오저둥의 둘째 아들인 마오안칭과 그의 아들(마오저둥의 손자)인 마오신위의 존재다. 마오안칭은 형인 마오안잉과 함께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온 뒤 1960년 샤오화와 결혼해 1970년 아들 마오신위를 낳았다. 마오신위는 1992년에 인민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한 뒤 2000년에 입대해 2010년 7월 소장으로 진급한 뒤 아직도 근무하고 있다.
신위의 위(宇)는 천지(天地)라는 뜻으로 신위(新宇)는 신천지를 가리킨다. 이 이름은 마오저둥이 직접 지어준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마오저둥이 세습체제를 만들려고 했다면 마오안칭이나 마오신위를 후계자로 지명했을 가능성이 높다. 문화대혁명의 광기 속에서 그의 이런 결정에 목숨 걸고 반대할 간 큰 중국인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중국인들이 미국에 감사하고 있다"는 말은 일부 중국인들의 시앤화(閑話, 심심풀이로 하는 말)이며 북한의 3세 세습을 비아냥거리기 위한 풍자로 보여진다. 21세기에 봉건적 세습이라는 코미디를 벌이지 말고 중국처럼 개혁개방을 통해 잘사는 사회를 만들어 보라는 권유로도 생각된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50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