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시평/한정훈]소음만 커진 지방선거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온다. 평소 같으면 무시했겠지만 혹시 중요한 연락일까 싶어 전화를 받는다. 또 여론조사 전화다. 이미 몇 차례 비슷한 전화를 받았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선거철마다 이런 조사에 얼마나 많은 비용과 에너지가 소모되는지 씁쓸해진다. 그 부담은 결국 시민들에게 돌아온다.거리의 선거 현수막이 주는 피로감도 비슷하다. 출근길마다 수많은 후보 얼굴이 걸려 있지만 기억에 남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디서 본 얼굴인가 싶어 다시 보면 지난 선거에서 다른 직위에 출마했던 후보인 경우도 적지 않다. 선출만 된다면 어떤 자리든 상관없다는 태도처럼 보인다. 홍보 문구 역시 경쟁자 비난 아니면 추상적 구호가 대부분이다. 정책으로 후보를 구분하기는 어렵고, 심지어 기초의원 후보인지 광역단체장 후보인지조차 헷갈릴 때가 있다.기초·광역 단체장과 의원, 교육감까지 7개 직위 선거가 한꺼번에 치러지면서 생기는 혼란은 언론의 '경마식 선거보도(horse-race journalism)'로 더욱 증폭된다. 선거철이면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정치 이야기를 꺼내지만, 정작 후보의 정책이나 비전에 대한 논의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대신 여론조사 수치가 대화의 중심이 된다. 누가 앞서는지, 누가 추락하는지, 격차가 몇 퍼센트 포인트인지에만 관심이 쏠린다.누가 왜 이겨야 하는지, 어떤 정책과 가치가 경쟁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숙의는 빈약하다. 시민들이 그런 정보를 충분히 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언론이 1·2위 격차에만 집중하면서 3·4위 후보는 존재감조차 희미해진다. 어렵게 시작된 정치 대화도 결국 '누가 이기느냐'만 남는 제로섬 정쟁으로 흘러가기 쉽다.물론 이런 현상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하버드대 토머스 패터슨 교수는 이미 1994년 저서 『질서 잃은 미국 정치와 언론(Out of Order)』에서 미국 정치가 경마식 보도로 인해 냉소주의에 빠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언론이 정책과 통치 능력보다 지지율 변화와 말실수에 집중하면서 시민들을 정치의 참여자가 아니라 '냉소적 관전자(cynical spectators)'로 만든다는 것이다.한국의 상황은 오히려 더 심각할 수 있다. 미국과 달리 한국의 정당정치는 아직 충분히 제도화됐다고 보기 어렵다. 정당명은 자주 바뀌고, 내부 갈등 속에 정당이 해체되는 일도 반복된다. 이런 환경에서는 정당의 정책과 이념, 장기적 비전보다 후보 개인의 이미지와 득표율 경쟁이 더 크게 부각된다. 정당이 복잡한 사회현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휴리스틱(heuristic)'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선거는 정부 구성과 통치를 위한 민주주의 절차라기보다 단순한 승부 게임처럼 소비된다.그렇다고 지방선거의 민주적 의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인공지능 기술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시대에도 선거를 완전히 대체할 민주적 제도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선거는 시민들이 정치적 선택과 그 결과를 학습하고,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주의 원리를 확인하는 핵심 절차다. 더구나 알렉시 드 토크빌이 말했듯 "지방자치는 민주주의의 학교"다. 지방자치의 건강한 발전 역시 결국 지방선거를 통해 이뤄질 수밖에 없다.문제는 지방선거를 둘러싼 낡은 제도와 관행이다. 경마식 선거보도는 개인 후보 중심의 승자독식 선거 구조와 맞물려 강화된다. 미국 대통령선거처럼 후보 개인 경쟁이 중심인 환경에서는 여론조사와 득표율 중심 보도가 자연스럽게 확산된다. 반면 많은 유럽 국가는 정당 중심의 선거 구조 아래 정책과 공약 경쟁이 선거보도의 중심을 이룬다. 물론 최근 유럽에서도 극우정당의 부상과 함께 여론조사 중심 보도가 늘고 있지만, 선거의 기본 축은 여전히 정당 간 정책 경쟁이다.한국 역시 경마식 선거보도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비례대표 확대 등 정당 중심의 선거환경을 강화하는 제도 개편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선거운동 방식도 재검토해야 한다. 무엇보다 후보 얼굴 알리기에 치중된 현수막 중심 선거운동부터 바꿀 필요가 있다. 무분별한 현수막 경쟁 대신 일정 구역마다 정책 비교형 공공 게시판을 설치해 유권자들이 후보와 정당의 공약을 직접 비교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과도하고 비과학적인 여론조사 환경 역시 개선이 필요하다. 지금도 선거여론조사의 방법론을 공개하고 검증하는 절차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조사 품질이 충분히 담보되지는 않는다. 이제는 얼마나 자주 조사하느냐보다 어떤 조사가 얼마나 신뢰할 만한지에 더 집중해야 한다.민주주의는 결국 정당과 선거로 유지된다. 그러나 유권자의 선택이 단순한 승부 예측 게임으로 축소된다면 민주주의에 대한 피로와 냉소는 더욱 커질 것이다. 지방선거가 민주주의의 학교로 남으려면, 더 많은 소음이 아니라 더 많은 정책과 토론이 필요하다.━한정훈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서울대 EU센터의 센터장을 맡고 있으며, 국가미래전략원의 민주주의클러스터 연구팀을 이끌고 있다. 미국 뉴욕주의 로체스터 대학에서 유럽의회정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비교정치적 시각에서 한국의 선거와 의회정치를 연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