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은행(IB)은 2008년 미국의 대표적 투자은행인 리먼브라더스가 파산을 신청하면서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용어다. 리먼브라더스의 파산으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했고 세계 유수의 IB들이 상업은행(CB)에 매각됐다. 10여년이 흐른 지금은 어떨까. 여전히 IB는 세계 금융시장을 주도한다. 글로벌 금융허브의 중심에 서 있으며 거대자본의 창구역할을 한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IB는 아직 걸음마 수준에 불과하다. 시중은행이 본점 내 IB본부를 설치해 겸하거나 증권사들이 IB의 일부 업무만 수행하는 정도다. 이는 우리나라 금융이 IB 대신 CB를 중심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다.
다행히 최근 국내은행들이 글로벌 금융허브를 발판 삼아 IB업무 강화에 나섰다. 국내은행이 글로벌 IB와 경쟁해 살아남는 방법이 무엇인지 홍콩 현지에서 근무하는 주재원을 만나 들어봤다.
◆거대자본의 창구, IB가 곧 기회
IB는 우리나라 금융회사처럼 상업은행을 기반으로 한 전통적 은행 영업방식과 달리 기업이 증권시장에서 주식·채권 등을 발행해 자금 조달하는 것을 돕는 은행을 말한다.
이를테면 한 기업이 주식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한다고 가정하자. 이 기업은 자사의 시장가치를 평가받고 주식시장에 주식을 내놓은 뒤 투자자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기업이 이 업무를 모두 수행하기란 쉽지 않다. 기업은 이를 IB에 위탁한다. 즉 IB는 기업의 시장가치를 평가하는 단계부터 주식발행 절차까지 기업을 대신해 업무를 수행한다. 이 과정 중 기업의 주식을 시세보다 싸게 인수해 비싼 값으로 팔아 시세차익을 올리는 ‘증권인수’ 업무가 IB의 전통적인 주수익원이다.
또 주식·채권이 발행된 이후에도 시장에서 해당 증권이 활발하게 거래되도록 하는 ‘트레이더’ 업무, 주요 고객기업과 핵심 산업분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리서치’ 업무도 IB의 주 역할이다. 국내에서는 이를 보통 증권사가 담당한다.
그러나 IB가 관여하는 시장의 범위는 이보다 훨씬 방대하다. IB는 자본시장 외에도 단기금융시장, 외환시장, 자산유동화시장, 파생상품시장에까지 발을 담근다. 거대자본의 창구역할을 하는 것. 투자은행이 밀집한 뉴욕과 런던을 중심으로 금융허브가 형성된 배경이다.
홍콩 역시 IB가 발전한 도시다. 뉴욕, 런던에 이어 세계 3대 금융허브 도시로 세계 유수의 IB가 밀집해있다. 아시아지역 진출을 꾀하는 세계 각지의 기업이 홍콩을 발판 삼아 자금을 조달한다. 거대자본이 홍콩을 드나들고 IB들은 새로운 수익창출의 기회를 노린다.
◆쉬운 영업 고집… IB 걸음마 단계
홍콩에 진출한 국내은행의 영업전략도 IB업무 강화가 핵심이다. 하지만 영업시스템이 CB업무에 익숙한 상황이어서 성장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은행이 IB업무를 수행하려면 막대한 자기자본과 폭넓은 네트워크를 갖춰야 한다. 우선 거대한 규모로 직접 투자하기 위해선 ‘규모의 경제’가 필수다. 가진 돈이 많을수록 더 큰 거래에 참여할 수 있다. 또한 다른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 레버리지 효과를 내야 하는데 이때도 규모의 경제는 유효하다. 자기자본이 취약한 은행은 다른 은행으로부터 대출이 쉽지 않아 거대 딜(거래)에 참여하기조차 힘들다.
국내은행이 세계 IB시장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엔 자본이 한참 부족하다. 한국기업평가사가 최근 세계 100대 은행그룹의 재무현황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은행그룹의 평균 총자산은 지난해 말 기준 2818억4500만달러에 그쳤다. 이는 세계 100대 은행그룹의 평균 총자산(8149억4900만달러)은 물론 하위권(51~100위) 은행들의 평균 자산(3341억9200만달러)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홍콩의 A 주재원은 “국내은행이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은행간 인수합병을 통해 몸집을 불려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규모가 커야 큰 딜에도 참여하고 저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B 주재원은 “국내은행은 예대마진 등 쉬운 영업을 하며 성장해왔다”며 “오랜 역사를 가진 글로벌 IB와 경쟁하려면 시간이 꽤 필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지 네트워크 강화 역시 글로벌시장에서 IB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필수과제다. 우량기업을 상대로 한 딜에 참여하려면 두터운 친분을 다져야 한다. 또 IB시장에서의 거래가 보통 여러 은행이 신디케이트를 구성해 이뤄지는 만큼 글로벌 은행들과의 네트워크도 쌓아야 한다. 저평가된 우량기업을 분석하는 정보력도 인력 네트워크에서 나온다. 홍콩은 물론 해외각지에 진출한 국내은행들이 현지화를 목표로 영업전략을 펼치는 배경이다.
C 주재원은 “은행이 각종 거래에 참여하는 건 기본적으로 은행의 신용등급 등 수치화된 정보를 바탕으로 한다”며 “하지만 네트워크가 형성되지 않으면 거래참여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그는 “오랜 기간 상호 네트워크를 쌓아온 글로벌은행에 비해 국내은행의 네트워크 수준은 아직 미약하지만 최근 현지전문인력을 채용하는 등 현지화를 통해 수준을 끌어올리는 중”이라고 말했다.
◆홍콩 입지 ‘흔들’… 새 먹거리 찾아야
이에 따라 홍콩 내 국내은행들은 틈새시장을 공략한다. 글로벌시장에 곧바로 참여하기가 어려워 선택한 차선책이다.
‘세컨더리 마켓’(Secondary market) 진출이 대표적이다. 이를테면 한 기업이 은행에 신디케이티드론을 요청하면 이 은행은 주간사가 돼 다른 은행을 모아서 이 기업에 대출해준다. 이 시장이 ‘프라이머리 마켓’(Primary market)이다. 그런데 프라이머리 마켓에 참여한 은행들은 자신의 대출채권을 이 거래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은행에 팔기도 한다. 별도의 은행을 모아 또 다른 신디론을 구성하는 것이다. 세컨더리 마켓은 신디론뿐 아니라 은행-기업간, 은행-은행간 금융상품 거래가 발생하는 모든 곳에서 활발히 형성된다.
D 주재원은 “홍콩에 진출한 국내은행들이 우량기업을 상대로 한 프라이머리 마켓에 참여하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현재는 세컨더리 마켓에 참여해 발을 넓히는 단계”라며 “홍콩시장에선 기업고객은 물론 은행간 네트워크도 중요하다. 은행을 프라이머리 마켓이나 세컨더리 마켓에 참여시키는 건 주간사의 재량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홍콩이 국제금융허브로서의 입지가 흔들리는 점도 국내은행으로선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부분이다. 금융허브가 형성된 건 막대한 자본수요가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홍콩은 현재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98%가 서비스업으로 제조업 기반의 수익창출 기회가 거의 없다. 홍콩을 발판삼아 중국에 진출하려는 기업이 있지만 중국경기가 과거에 비해 둔화된 상태다.
또 동남아시아에선 싱가포르, 중국은 상하이가 금융허브의 역할을 수행 중이어서 홍콩으로선 파이를 뺏길 수 있다. 특히 싱가포르는 홍콩과 세계 금융허브 3위 자리를 다툴 정도로 성장했고 중국정부는 상하이와 선전지역을 금융허브로 키우는 중이다.
여기에 홍콩을 발판삼아 해외로 진출하려는 국내기업들을 상대로도 영업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한 국내 대기업은 국내은행뿐 아니라 글로벌은행도 눈독을 들인다. 글로벌은행과의 경쟁이 불가피한 셈이다. 또 우량화된 기업은 채권 발행 등을 통해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여러모로 해외에 진출하는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도 투자수요가 과거에 비해 떨어진 실정이다.
E 주재원은 “몇년 전부터 헤지펀드 등이 운용거점을 홍콩에서 싱가포르로 옮기는 사례가 늘었는데 홍콩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이 주재원은 이어 “홍콩은 글로벌 투자기회를 찾기 위한 전쟁터 같은 곳”이라며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비한국계 고객을 발굴해 수익을 다변화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 본 기사는 <머니S> 추석합본호(제507호·제50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