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 시대
[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시대]⑧윤슬의 난반사가 아름다운 이유
초등학생 대상으로 AI 시대의 창의성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강연을 마치고, 강연과 상관없어 보여도 괜찮으니 궁금한 건 뭐든 물어보라고 얘기했다. 어른 청중과 달리 아이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다. 한 아이가 손을 들었다. "윤슬은 볼 때마다 예쁘고, 보다 보면 멍 때리게 되는데 이유가 뭔가요?" 강연장이 순간 조용해졌다. 창의성 이야기를 한 시간 가까이 했는데, 갑자기 물결 위 반짝이는 햇빛을 물었으니 말이다.인지과학자로서 답할 거리는 있었다. 잔잔한 호수는 거울의 역할을 하는데, 위에서 태양이 비추고 있다. 바람이 불어 수면이 흔들리면 잔물결 각각이 작은 거울이 되어 저마다 다른 각도로 빛을 보내고, 내가 어느 자리에 서든 내 눈으로 들어오는 빛점이 생기며, 물결이 움직이니 그 빛점들은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한다. 우리 눈과 뇌는 밝기가 갑자기 바뀌는 지점에 유난히 예민하다. 풀숲에서 움직이는 것을 놓치면 목숨이 위태롭던 시절의 유산일 것이다. 반짝임 자체에 끌리는 본능도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리처드 코스는 아기들이 광택 있는 접시를 무광 접시보다 더 오래 입에 대고 핥는다는 것을 관찰했고, 인류가 오랫동안 반짝이는 표면을 물이 있다는 신호로 읽어 왔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여기에 심리학자 카플란 부부의 설명을 보탤 수 있다. 물결·구름·모닥불처럼 반쯤만 예측되는 움직임은 힘들이지 않고도 주의를 끈다. 그들은 이것을 쉽게 피로해지지 않는 주의, 부드러운 매혹이라 불렀다. 대략 이런 것들이 윤슬 앞에서 우리가 멍하게 집중하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과학적 이유다.이런 과학적 설명이 내 머릿속에 스쳤으나, 아이 얼굴을 보는 순간 이 답을 접었다. 망막과 진화와 주의 체계를 늘어놓는 동안 아이의 눈에서 반짝임이 꺼질 것 같았다. 그래서 다르게 답하기로 맘먹었다. 윤슬이 예쁜 건 난반사 때문이라고 얘기해줬다. 난반사는 하나의 빛을 받아 여러 방향으로 돌려보내는 반사다. 매끈한 수면은 태양을 한쪽으로 비추지만, 잔물결은 태양 하나를 수천 개로 쪼개서 사방으로 보낸다. 그래서 반짝인다. 여러분의 생각도 그런 난반사로 빛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흑이냐 백이냐,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이렇게 둘로 가르는 생각은 매끈한 수면이다. 친구의 말을 한 방향으로만 받지 말고 여러 방향으로 돌려서 읽어보고, 그렇게 생긴 여러 방향을 버리지 말고 다 안아 보라고, 오늘 이야기한 창의성이 바로 거기서 자란다고 얘기했다.나름 아이가 이해하기 쉽게, 그리고 그날의 강연 주제와 붙여서 즉흥적으로 꺼낸 비유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곱씹어 보니 인지과학이 창의성을 다뤄 온 방식과 닿아 있었다. 창의성 검사 중에 벽돌 하나를 주고 쓰임새를 가능한 한 많이 말해 보라는 방법이 있다. 문진, 받침대, 연필꽂이, 길이를 재는 자 등을 답하는 식이다. 정답을 하나로 모아 가는 사고를 수렴적 사고, 하나의 자극을 여러 갈래로 펼치는 사고를 발산적 사고라 부르는데, 창의성 연구는 주로 후자를 잰다. 빛을 한 방향으로만 돌려보내는 거울과 여러 방향으로 흩뿌리는 잔물결. 아이에게 한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그 질문 자체도 그랬다. 창의성 강연에 윤슬이 왜 나왔을까? 아이는 내가 쏜 빛을 엉뚱한 각도로 돌려보낸 것이다. 그 질문이 없었다면 그날은 준비한 슬라이드 그대로, 매끈한 수면처럼 끝났을 것 같다.어른들의 세상을 돌아본다. 흑과 백, 좌와 우로 갈라 상대의 말을 한 방향으로만 읽고 다투는 이들을 날마다 본다. 한 문장을 받아 한 방향으로만 튕겨내는 대화는 강하게 느껴지지만 반짝이지는 않는다. 그날 아이들에게 했던 말을 어른들에게도 하고 싶다. 여러분 머릿속에 윤슬의 반짝임이 있기를. 하나의 빛을 받아 여러 갈래로 돌려보내는 마음, 그리고 그런 마음들을 품어주는 윤슬 같은 아량이 우리 사회에 가득하기를.━김상균 경희대 교수는 인지과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사고와 경험, 그리고 기술변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왔다. 최근엔 AI 확산과 인간의 확장된 미래를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저술활동 외에도 강연과 유튜브 등을 통해 기술 변화를 쉽게 풀어내며 대중적으로 폭넓은 공감과 인기를 얻고 있다.━
[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시대]⑦모두가 브랜드가 되는 시대, 당신의 선택은?
"교수님은 왜 유튜브 안 하세요?" 자주 받는 질문이다. 내가 개설한 유튜브 채널이 있기는 하다. 수업 자료를 올리는 용도로만 쓴다. 유튜브, 소셜 미디어, 블로그 중에서 내가 열심히 쓰는 매체는 거의 없다. 그나마 페이스북 정도다.우리가 이런 매체를 쓰는 이유는 대략 넷이다. 생각과 성과를 공유하고, 피드백을 받고, 정서적 교감을 나누고,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다.유튜브를 전문적으로 운영하는 교수들을 보면 혼자 하는 경우는 없다. 주제 선정부터 대본, 촬영, 편집, 댓글 관리까지 업체가 맡는다. 교수는 출연자이자 진행자다. 나도 그렇게 해보자는 제안을 몇 번 받았지만, 고민 끝에 접었다. 작가와 편집자가 붙어도 일주일에 한두 편을 만들려면 내 시간이 적잖이 들어간다. 더 걸렸던 건 따로 있다. 시의성과 조회수를 좇다 보면 언젠가 내 전문성과 철학을 넘어서는 콘텐츠에 손을 대게 될지 모른다는 부담감이었다. 결국 내가 택한 매체는, 고전적이지만 책이다. 한 해 한두 권의 책을 내는 것. 점점 책을 안 읽는 시대에 이게 맞는 길인지 여전히 고민이긴 하다.그런데 이 고민이 나만의 것은 아니다. 조직의 이름을 떼고 자기 생각을 세상에 내보내야 하는 순간은 직업과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온다. 조직 안에 있어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도, 다음 행보를 준비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게다가 두 번째 지능 덕분에 누구나 글과 영상을 쏟아낼 수 있는 시대가 됐다. 만드는 일이 쉬워질수록, 무엇으로 어떻게 소통할지 정하는 일은 오히려 무거워진다.그때 우리는 대개 이렇게 묻는다. 요즘 어디에 사람이 많이 몰리는가? 사람이 몰린 곳에서 소통하고자 하는 목적이다. 그런데 순서가 바뀐 질문으로 보인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이쪽이다. 나는 무엇을, 어떤 깊이로, 얼마나 오래 나누고 싶은가?미디어 학자 마셜 매클루언은 반세기도 전에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썼다. 무엇을 말하느냐 못지않게, 무엇에 담아 말하느냐가 내용을 규정한다는 뜻이다. 인지과학자로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다. 매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생각을 빚는 틀이다. 일주일 단위로 영상을 올리는 사람은 일주일 단위로 생각하게 되고, 일 년 호흡으로 책을 쓰는 사람은 일 년 호흡으로 생각하게 된다. 일주일은 나쁘고 일 년이 좋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마감의 리듬이 사고의 리듬이 된다. 독자만 바뀌는 게 아니다. 쓰는 사람이 바뀐다.받아들이는 쪽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칼럼니스트 이나다 도요시는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세대를 관찰하며, 감상이 아니라 소비라는 표현을 썼다. 줄거리를 파악하는 시청과 작품에 잠기는 감상은 다른 종류의 경험이다. 짧고 빠른 콘텐츠에 길들수록 우리의 주의는 짧고 빠른 리듬에 맞춰진다. 매체는 만드는 사람의 사고만 빚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사람의 사고까지 빚는다.그렇다고 소셜 미디어와 유튜브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나도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다. 공들여서 자주 쓰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소셜 미디어는 빠르다. 오늘 떠오른 생각이 오늘 독자에게 닿고, 댓글로 정서적 교감이 오간다. 대신 조금은 즉흥적이고, 금세 묻힌다. 어제 올린 글을 다시 찾아 읽는 사람은 드물다. 그 빠름이 장점이고, 그 빠름이 단점이다.내가 책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그 반대편에 있다. 빨리 감기가 안 되고, 띄엄띄엄 보기 어려운 매체. 읽는 사람도 쓰는 나도 좀 더 오래 붙잡아두는 매체는 여전히 책 같아서이다.흔히 브랜드를 노출의 총량으로 여긴다. 나는 다르게 본다. 브랜드는 한순간의 화제가 아니라, 오래 반복된 리듬이 상대의 마음에 남긴 무늬다. 무엇을, 얼마나 자주, 어떤 깊이로 내보내는지, 그 반복이 쌓여 당신이라는 인상이 된다.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무엇으로, 어떻게 소통하고 있는가? 왜 거기서, 왜 그렇게 소통하고 있는가? 당신은 어떤 사고를 빚어내고 싶은가? 어디에 사람이 많은지보다, 어떤 리듬으로 생각하며 살고 싶은지를 먼저 답해보길 바란다. 결국 그 선택이 당신으로 남는다. 그게 당신의 브랜드가 된다.━김상균 경희대 교수는 인지과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사고와 경험, 그리고 기술변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왔다. 최근엔 AI 확산과 인간의 확장된 미래를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저술활동 외에도 강연과 유튜브 등을 통해 기술 변화를 쉽게 풀어내며 대중적으로 폭넓은 공감과 인기를 얻고 있다.━
[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시대]⑥억울해하는 학생·직원이 사라졌다
기말 성적을 공지하고 일주일을 기다렸다. 예년 같으면 메일함이 차오를 시기다. 채점 기준을 묻는 메일, 부분 점수를 다투는 메일, 면담을 청하는 메일. 성적 정정 요청은 교수에게 성가신 연례행사지만, 그 성가심에는 생기가 있었다. 올해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학부와 대학원을 통틀어 정정 요청이 거의 없었다. 달라진 것은 하나다. 과제는 물론, 기말 시험까지 AI 활용을 허용하고 장려한 학기였다.처음에는 채점이 후했나 의심했다. 성적 분포를 확인하니 예년과 비슷했다. 점수가 달라진 게 아니라면, 뭐가 사라진 걸까? 나는 그것이 억울함이라고 생각한다.억울함은 아무 때나 튀어나오지 않는다. 내 것이라 믿는 결과물이 낮게 평가될 때 나타난다. 독일과 핀란드 연구진이 2024년에 발표한 실험이 있다. 사람들은 AI가 만들어 준 글을 자기 이름으로 제출하면서도, 그 글을 자기 것으로 느끼지 않았다. 연구진은 이 현상에 AI 대필 효과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름은 올리되, 마음은 담지 못하는 상태다. 좀 더 상세히 보면, 결과물에 자신의 영향력이 크게 들어갔다고 느낄수록, 사람들은 그 글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다. 소유감은 실제적 기여의 크기가 아니라, 스스로 기여를 인지하는 정도에 따라 움직였다. 더 오래된 연구도 있다. 2003년 미국의 한 소비자심리 연구는 사람이 컴퓨터와 함께 일할 때 좋은 결과는 자기 공으로, 나쁜 결과는 컴퓨터 탓으로 돌린다는 것을 실험으로 보여줬다.두 연구를 겹치면, 기말 성적 공지 후 내가 경험한 낯선 상황이 조금은 설명된다. 학생에게 성적은 더 이상 자신에 대한 판정이 아니다. AI 산출물에 대한 판정이다. 자아가 빠져나갔으니, 굳이 다툴 이유도 없는 셈이다.교실의 침묵은 예고편일지 모른다. 직장은 사정이 좀 더 복잡하다. 내 수업에서는 AI 활용을 허용하고 장려했으니, 학생들은 AI를 썼다고 드러내는 환경이었다. 그런데 직장인은 AI를 업무에 적극 활용했다고 드러내는 순간 자기 지분이 줄고, 평판이 깎일지 모른다는 압박을 받기도 한다. 2025년 미국에서 조사된 사례에서, 직장인 절반이 AI 사용을 숨긴다고 답했다. 흥미롭게도, AI를 가장 많이 쓰는 경영진이 도리어 가장 많이 숨겼다. 조사 기관은 여기에 AI 수치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실제로는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겉으로는 온전히 내 성과인 척해야 하는 상황이다. 소유감 없는 소유권, 이런 불안한 정서 속에서 성과 평가를 받는다. 평가가 박해도 따지기 어렵다. 따지려면 작업 과정을 펼쳐 보여야 하는데, 거기에 AI의 지분이 얼마나 큰지 드러내기 두렵고, 한편으로는 그 지분의 크기를 자신조차 정확히 가늠하지 못한다.성적에 억울해하는 학생이 사라진 이번 학기가 꽤 평화롭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의 침묵을 평화로 읽고 싶은 유혹이 생겼다. 그러나, 사라져버린 그들의 억울함이 적잖이 불편하다. 억울함은 성가신 감정이기 이전에 애착의 증거다. 성적에 항의하는 학생은 적어도 자기 답안을 다시 읽는다. 어디서 점수가 깎였는지 따지는 과정은 그 자체로 깊은 복습이다. 평가에 이의를 제기하는 직원은 적어도 자기 일을 자기 것으로 여긴다. 다툼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애착이 사라진 것이라면, 조용한 교실과 조직은 성숙해진 것이 아니다. 아무도 자기 학습, 일을 껴안지 않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껴안지 않은 학습, 일의 결과가 우리를 성장으로 이끌 수 있을지 의문이다.나는 다음 학기 과제, 시험에서도 AI 활용을 금지하지 않을 계획이다. 결과물만이 아니라, AI와 주고받은 과정을 함께 제출하게 하고, 어디까지가 자신의 판단이었는지 좀 더 상세하게 갈라보게 하려 한다. 기업에서는 AI 사용을 숨기게 만드는 문화부터 걷어내길 바란다. 드러내면 지분이 깎이는 조직에서, 구성원은 소유감뿐만 아니라 책임감도 상실한다.조용한 메일함을 다시 열어 본다. 고된 정정 작업에서 벗어난 안도감 뒤에 서늘한 감정이 크게 밀려온다. 다음 학기에는 그들의 억울함이 다시 소환되길 기대한다. 당신은 직장에서 어떤 일 때문에 가장 억울했는가? 억울함이 아직 남아 있다면, 그 일은 아직 당신의 것이다.━김상균 경희대 교수는 인지과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사고와 경험, 그리고 기술변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왔다. 최근엔 AI 확산과 인간의 확장된 미래를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저술활동 외에도 강연과 유튜브 등을 통해 기술 변화를 쉽게 풀어내며 대중적으로 폭넓은 공감과 인기를 얻고 있다.━
[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 시대]⑤왜 우리는 한국인만 유별나다고 믿고 싶을까
얼마 전 강연장에서 주제와 무관한 질문을 하나 받았다. 인지과학자에게 꼭 물어보고 싶었다며, 한 분이 손을 들었다. "고위험-고수익과 안정-확정된 수익 중에 고르라고 하면, 세계에서 한국인만 위험을 피하지 않고 고위험을 택한다던데 왜 그런가요?"행동경제학으로 노벨상을 받은 카너먼의 전망이론을 염두에 둔 질문이었다. 학교에서 여러 번 다뤄 온 내용이라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한국인만 위험회피 성향이 극단적으로 낮다는 실험이나 데이터를, 나는 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망이론을 일반적으로 설명드린 뒤, 한국인만 다르지는 않은 것으로 안다고 답했다. 질문하신 분의 표정은 끝내 석연치 않았고, 솔직히 내 마음에도 찜찜한 것이 남았다.그 찜찜함은 며칠 뒤 다시 돌아왔다. 넷플릭스로 다큐멘터리를 보는데, 바로 그 실험이 등장했다. 80% 확률로 4천만 원을 받거나 20% 확률로 한 푼도 못 받는 A안과, 100% 확률로 3천만 원을 받는 B안. 참가한 한국인 스무 명 중 열일곱 명이 안전한 B안을 골랐다. 카너먼의 원래 실험에서 B안을 택한 비율은 80%였다. 방송용 소규모 실험이었지만 결과는 거의 같았다. 한국인만의 반전 같은 건 없었다. 학술 데이터를 봐도 마찬가지다. 2010년 아크스 등의 연구에서 미국·중국·한국의 위험회피 성향에는 의미 있는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니 세계에서 한국인만 위험을 즐긴다는 말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반론도 가능하기는 하다. 한국인이 미국 증시에서 상대적으로 위험도가 높은 레버리지 ETF를 사들이는 비율은 유독 높다. 위험을 덜 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엔 다른 맥락이 있다. 카너먼 실험의 확률은 처음부터 못 박혀 있다. 80%는 80%다. 반면 주식시장의 불확실성은 정해진 숫자가 아니다. 투자자는 자기가 모은 정보와 판단으로 그 불확실성을 저마다 다르게 해석한다. 누군가에게 레버리지 ETF는 도박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계산을 끝낸 투자이다. 확정된 확률 앞에서의 선택과, 불확실성을 스스로 읽어내는 선택은 다른 종류의 일이다. 그러니 ETF 통계 하나로 한국인이 유별나다고 결론짓는 것 역시 성급하다.여기서 진짜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왜 한국인만 유별나다는 이야기에 그토록 솔깃할까? 생각해 보면 그런 이야기는 늘 인기가 많다. 한국인은 정이 많아서, 한국인은 빨리빨리라서, 한국인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어떤 것은 흉처럼, 어떤 것은 자랑처럼 들리지만 구조는 똑같다. 우리를 하나의 덩어리로 묶어 세상에서 떼어 놓는다. 한국인만 그렇다는 단정은 검증을 요구받기보다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데이터는 미국도 중국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데, 우리는 우리만 다르기를 바란다. 사실로 반박해도 그 믿음이 잘 꺼지지 않는 건, 그것이 세상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진술이기 때문이다.왜 하필 우리 자신에 대해 그렇게 말하고 싶을까? 나는 우리가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 한 세대 만에 가난을 벗고, 지금도 숨 막히는 경쟁 속에 서 있는 한국인. 우리에게는 그 과격했던 속도와 피 말리는 현재를 설명할 서사가 필요하다. 우리는 늘 남들과 달랐다는 이야기는 거기에 잘 맞는다. 달라서 이만큼 빨리 왔으니, 그 다름이 앞으로도 우리를 더 멀리 데려갈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경쟁도 견딜 만한 것이다. 한국인만 위험을 즐긴다는 거짓은, 안전을 택하는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알리바이, 달콤한 환상이었는지도 모른다.물론 다름이 참이라 해도, 그 결과에는 늘 양면이 있었을 것이다. 같은 다름이 우리를 빠르게 키운 만큼 어딘가를 빠르게 갈아 넣었을 텐데, 자기 위안의 서사는 밝은 쪽만 골라 담는다.강연장에서 끝내 석연찮아 하던 그분의 표정이 다시 떠오른다. 이제 와 생각하면 내 답이 틀려서 지었던 표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듣고 싶던 답이 아니어서였을 것이다. 다음에 어딘가에서, 누군가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뭐라고 답해야할지 고민해본다. 질문하는 이의 얼굴, 표정이 떠오르기에 고민이 쉬이 끝나지 않는다.━김상균 경희대 교수는 인지과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사고와 경험, 그리고 기술변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왔다. 최근엔 AI 확산과 인간의 확장된 미래를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저술활동 외에도 강연과 유튜브 등을 통해 기술 변화를 쉽게 풀어내며 대중적으로 폭넓은 공감과 인기를 얻고 있다. ━
[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 시대]④ 거절했는데 강연이 확정됐다
며칠 전, 한 유명 협회에서 강연 요청 메일이 왔다. 내 책과 연구 배경을 언급하며, 행사에서 인공지능 시대의 새로운 질서에 대해 강연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정중하고 반듯한 구성. 그런데 글 전체에서 AI가 쓴 듯한 느낌이 강하게 났다. 나 역시 AI를 많이 쓰니, 그 자체가 별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협회가 요청한 강연 시간에 나는 이미 선약이 있었다. 그래서 그 시간에는 어렵다고 답했다. 대신 가능한 다른 시간대를 알려드렸고, 참고하시라고 강연료도 함께 안내했다.얼마 후 답장이 왔다. 강연 수락에 감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확정된 강연 시간은 내가 분명히 어렵다고 말했던 그 시간이었다. 행사 계획서에는 내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더 이상한 것은 강연료였다. 내가 안내한 금액보다 25%가량 높게 적혀 있었다. 순간 멈칫했다. 내가 수락하지 않은 시간에, 내 이름이 들어간 행사 계획서가 만들어졌고, 강연료는 내가 말한 것보다 올라가 있었다. 강연료가 올라갔다고 해서 기분이 좋아지는 상황은 아니었다.다시 상세하게 메일을 보냈다. 뭔가 착오가 있는 듯하다고, 그 시간에는 선약이 있어서 강연이 불가능하다고, 이전 메일에서도 그렇게 말씀드렸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다시 답장이 왔다. 또 강연 수락에 감사한다는 내용. 또 행사 계획서에 내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이번에도 시간은 내가 불가능하다고 한 그 시간. 강연료는 처음 내가 안내한 금액보다 50%가량 높아져 있었다.기괴했다. 솔직히 잠깐 장난스러운 호기심도 생겼다. 여기서 한 번 더 같은 내용으로 거절 메일을 보내면 어떻게 될까? 이번에는 강연료가 100% 올라서 올까? 거절할수록 몸값이 오르는 이상한 경매가 시작되는 것일까? 그런 실험은 하지 않았다. 이메일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간의 이메일 소통 내역을 설명했다. 혹시라도 행사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되니, 지금 상황을 정확히 확인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전화를 받은 분은 몹시 당황한 듯했다. 이메일 소통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잠시 후 다시 전화가 왔다. 설명은 이랬다. 동명이인 교수가 있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설령 동명이인 교수가 있다고 해도, 내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시간에 왜 내 이름이 들어갔는지, 왜 강연료가 두 번이나 달라졌는지, 왜 같은 수락 감사 메일이 반복됐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조금 더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비슷했다. AI와 인지과학을 연구하는 교수 중에 김상균이 또 있다고?아이러니한 것은, 그 협회가 내게 요청한 강연 주제가 인공지능 시대의 새로운 질서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짧은 이메일과 통화 과정에서 내 머릿속은 새로운 질서가 아니라 새로운 무질서로 가득 찼다.나는 이 일이 반드시 AI 때문에 벌어졌다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사람의 착오였을 수도 있다. 내부 전달의 문제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원인이 무엇이냐보다, 이런 일이 앞으로 점점 더 자주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AI 시대의 무서움은 AI가 틀린 답을 낸다는 데만 있지 않다. 더 무서운 것은, 틀린 답이 아주 그럴듯한 문장과 공식 문서의 모양을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예전의 실수는 대체로 티가 났다. 그런데 이제는 다르다. 문장은 매끄럽고, 형식은 완성되어 있고, 첨부 파일은 그럴듯하다. 그런데 그 안의 사실관계가 틀려 있다. 더 곤란한 것은, 그 오류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아무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그 협회에 나는 크게 실망했다. 유명한 기관이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이번 일이 앞으로 우리 사회가 마주할 미래의 예고편처럼 느껴졌다. 인공지능 시대의 진짜 위험은 기계가 인간처럼 말하는 데 있지 않다. 인간이 기계 뒤에 숨는 데 있다.새로운 질서를 말하기 전에, 우리는 오래된 질서부터 회복해야 한다. 우리가 서로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사람 사이 신뢰의 원천은 무엇인지부터 말이다. 그 단순한 질서가 무너지면, 아무리 좋은 AI를 붙여도 세상은 좋아지지 않는다. 그저 더 빠르고, 더 공손하고, 더 그럴듯하게 무질서해질 뿐이다.━김상균 경희대 교수는 인지과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사고와 경험, 그리고 기술변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왔다. 최근엔 AI 확산과 인간의 확장된 미래를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저술활동 외에도 강연과 유튜브 등을 통해 기술 변화를 쉽게 풀어내며 대중적으로 폭넓은 공감과 인기를 얻고 있다. ━
[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 시대]③ 성적표가 없어서 불안해요
한 대학생이 말했다. 뭔가 해야 할 과제가 없어서 불안한 느낌이 든다고. 예전에는 시험 점수가 잘 나오면, 본인이 잘하고 있다고 안도하고, 점수가 부족하면 빈 부분을 채우려 애쓰면 되니까 편했다고. 성적표가 안 나오니 오히려 불안하다고. 얼마 전 시청한 KBS 다큐멘터리 <다큐3일>의 한 장면이다. 참으로 밝고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의 대학생인데, 인터뷰 말미에 시험과 성적표를 그리워하는 얘기를 남겼다.당신은 고등학교 시절로 다시 돌아가서, 매달 시험 보고, 등수가 적힌 성적표를 다시 받아보고 싶은가? 그때가 뭐가 좋아서 다시 돌아가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겠으나, 나는 영상 속 학생의 마음이 이해된다. 참으로 아프게 이해된다.예전, 그리 멀지 않은 얼마 전까지, 우리에게는 선명한 목표가 있었다. 대학에서 A라는 학과를 졸업하면, 대부분이 B라는 진로로 흘러갔다. 기업에서 한 직무를 맡으면, 최소한 몇 년, 운이 좋으면 수십 년을 그 일만 하면 됐다. 우리 삶의 흐름은 크게 세 단계였다. 인생의 첫 1/3은 공부하며 준비하고, 다음 1/3은 두어 개 직장에서 안정적으로 보내고, 마지막 1/3은 은퇴하며 여생을 보내는 식이었다. 인생 삼분론이 비교적 명확했다. 그런데 이제 이런 삼분론은 통하지 않는다. 내 수업에는 60대 나이의 석사과정 학생이 보이고, 70세가 넘으신 선배들도 직업 전선에서 물러날 기미가 없다.요컨대, 내가 젊었던 시절만 봐도, 우리 사회에서 각자의 삶에는 선배들이 걸어간 경로가 내비게이션 안내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각자의 취향, 꿈을 조금만 누른다면, 그 경로대로 안전하게 걸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제 내비게이션이 꺼졌다. 아니다. 먼저 경로를 보여주며 길을 갔던 선배가 말한다. 자신이 걸어온 길대로 따라오면 안 된다고. 그 길은 이미 끊어졌다고 말이다.모든 게 흔들리고 있다. 사회의 목표, 조직의 목표, 그에 따라 개인의 목표까지 동시에 흔들린다. 젊은 세대는 윗세대에게 묻고, 서로에게 답을 찾아보지만, 그 누구도 명확하게 답을 얘기하지 못한다. 보이스피싱처럼 보이는 강의, 300만 원 내고 자신의 강의만 수강하면 답이 보인다고 현혹하는 저질 온라인 콘텐츠만 범람하고 있다."교수님이 제 롤모델입니다." 가끔 이런 말을 듣는 경우가 있다. 나는 이 말이 참으로 부담되고, 틀렸다고 본다. 이 시대에는 롤모델이 없다. 많은 이들이 한 방향으로 일사불란하게 뛰어야 했던 고속 성장형 산업화 시대에는 롤모델이 명확했다. 자신이 바라보는 방향에서 제일 잘 뛰는 사람이 롤모델이었다.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좋게 말하면 무한한 자유와 꿈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두어 명을 롤모델로 삼아 쫓아가는 경로에서 벗어나야 한다. 새로운 시대를 살아야 한다. 한정된 자원으로 산업을 키우던 시대를 넘어서, AI라는 두 번째 지능을 새로운 레버리지로 삼아서 한없는 꿈을 꾸는 시대를 말이다. 여기서 '무한한 자유와 꿈'이란 표현이 불편한 가시처럼 느껴질 수 있다. 미세 먼지 가득한 듯 숨 막히는 현실인데, 무슨 자유와 꿈을 얘기하냐고 말이다. 갑작스레 찾아온 AI라는 거대한 전환이 우리에게 미세 먼지보다 더 큰 압박과 답답함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이 먼지 뒤편에는 그간 우리가 잊고 지냈던 자유와 꿈을 향한 여정이 펼쳐질 수 있다고 말이다.그때까지 선배가 후배에게, 어른이 아이에게, 그리고 때로는 후배가 선배에게, 아이가 어른에게, 이렇게 얘기해주면 좋겠다. 나도 방향은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이리저리 발을 내딛다 보면, 좋은 방향이 보일 것 같다고, 네가 사랑하고 빠져들 길을 멋지게 찾을 것이라고, 그때까지 내가 곁에서 친구가 되어줄 테니,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지내자고 말이다.<다큐3일>속 대학생은 젖은 머리로 수건을 들고 버스에 올랐다. 수면 바지 차림, 집 앞에 분리수거할 때 신을만한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런데 표정은 참 밝았다. 그 학생에게 꼭 얘기해 주고 싶다. 성적표는 없지만, 당신이 오늘 스스로 내린 결정은 충분히 가치 있다고 말이다. 미세 먼지를 통과해서 당신이 걸어갈 꿈의 여정을 응원한다고.
[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 시대]②노조는 AI와 싸워야 하나?
최근 내게 걸려 오는 전화의 발신지가 바뀌고 있다. 과거엔 기업의 전략기획 부서나 IT 팀이 주를 이뤘다면, 요즘은 노사협의체나 노동조합 측의 연락이 부쩍 늘었다. 질문은 단 하나로 수렴된다. "AI 도입을 앞두고 있는데, 도대체 우리 노동자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이 질문을 마주할 때 내 마음엔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우선 반갑다. 막연한 공포에 질려 눈을 감는 대신, 변화의 실체를 파악하고 대응하려는 의지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려가 엄습한다. 대화를 나눠보면 AI 도입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막상 "무엇을 논의할 것인가?"라는 각론으로 들어가면 테이블 위에 올릴 어젠다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협의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협의를 시작하려는 형국이다.이런 상황은 올 초 현대차 노조에서도 그대로 펼쳐졌다. CES 2026에서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가 공개되자 노조는 노사 합의 없이는 단 한 대도 들어올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노조 스스로도 덧붙였다. 도입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반대가 아니라 논의 요청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논의해야 하는가? 바로 거기서 말문이 막힌다.지금 우리에겐 기술보다 질문의 설계가 시급하다. 우리는 오랫동안 "AI가 내 일자리를 뺏을 것인가?"라는 빈약한 질문에 갇혀 있었다. 이제 질문의 틀을 바꿔야 한다. X축을 현재와 미래로, Y축을 AI가 대체할 수 있는 것과 대체하면 안 되는 것으로 나누어 보자. 대체할 수 있는 것은 기술의 발전에 따라 그 영역이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될 것이다. 이는 시간과 순서의 문제일 뿐, 거스를 수 없는 파도다. 진짜 핵심은 대체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이는 기술 수준과 무관하게 인간이 끝까지 붙들어야 할 존엄과 가치의 영역이다. 어떤 업무를 효율화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가치를 인간의 손에 남겨둘 것인가를 논의하는 조직은 거의 없다.우리가 겪는 혼란의 본질은 속도에 있다. 경제학자 카를로타 페레즈는 기술 혁명이 두 단계를 거친다고 설명한다. 새로운 기술이 폭발하며 기존 질서를 붕괴시키는 설치 국면과 새로운 법과 제도가 정착되며 번영을 이루는 전개 국면이다. 과거 산업혁명기에 이 과정은 수십 년이 걸렸다. 그러나 생성형 AI는 이 과정을 압축하며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국가와 산업, 기업마다 서 있는 단계가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어떤 곳은 여전히 디지털전환, DX의 연장선에서 프롬프팅 기법에 매몰되어 있고, 어떤 곳은 이미 AI 에이전트가 인간의 역할을 대체하는 2단계로 진입했다.이 전환이 조직 내부에도 그대로 관통한다. AI가 실행의 상당 부분을 맡게 되면서, 인간에게 요구되는 지능의 종류 자체가 바뀌고 있다. AI는 지금 KPI, 정량, 효율 중심의 산업화 지능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다. 동시에 구성원들을 "나는 왜 일하는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존재론적 물음 앞으로 내몰고 있다. 일은 빨라지고 많아졌는데 공허하다는 감각. 이것이 지금 수많은 조직 구성원들이 느끼는 본질적 혼란이다. AI가 이미 점유한 영역에서 인간이 계속 다투려 한다면, 개인도 조직도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조직 구조도 함께 변하고 있다. 소수가 비전을 제시하고 다수가 실행하던 리더, 팔로워의 이분법은 끝났다. 이제 모든 구성원은 직급과 무관하게 리더처럼 사고해야 한다. 정답을 빠르게 수행하는 능력보다, 정답이 없는 안개 속에서 방향을 설정하는 능력이 중요해졌다.현장에서 솔직히 말하면 안타까운 장면도 자주 목격한다. 기업은 새로운 역할을 요구하는데 구성원은 변화를 외면한 채 고용 보장만 요구하는 경우. 반대로 회사는 효율화에만 급급해 구성원이 새 역할을 배울 시간과 기회를 주지 않는 경우. 둘 다 지는 게임이다.노사가 마주 앉기 전,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야 한다. 우리 조직은 AI를 통해 사업을 확장할 것인가, 효율화할 것인가? 그 방향에 따라 구성원의 역할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그 역할에 맞는 역량을 노사가 어떻게 함께 키울 것인가? 이 세 질문이 정리되지 않으면 협의 테이블에 앉아도 서로 할 말이 없다. AI 기술의 동향이나 프롬프트 작성법보다, AI와 인간의 유사성과 차이를 이해하고 변화하는 구성원의 역할과 책임을 직시하는 일이 먼저다. 테이블에 앉기 전, 우리는 먼저 이 거대한 질문들과 독대해야 한다.
[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 시대]① 대단한 지능을 만났는데, 왜 우리는 더 고단한가?
HFK, 트레바리, 최인아책방, 리댁션. 최근 내가 방문한 모임들이다. 누군가에게는 낯설겠지만, 배움에 목마른 직장인들이 모여드는 뜨거운 현장이다. 대학 강단보다 더 역동적인 에너지를 기대하며 그들과 AI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나는 그 현장에서 비명에 가까운 질문을 받았다. "AI로 성과는 나는데 왜 허탈할까요?", "일은 빨라졌는데 숨 돌릴 틈 없이 다음 작업이 밀려와요.", "결국 내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 아닌가요?" 새로운 기회에 관한 기대보다 거대한 변화의 파도에 휩쓸려 자신이 마모될지 모른다는 불안과 우울이 짙게 배어 있었다.기업의 AI 교육 현장으로 가면 이 간극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경영진은 이런 요구를 던진다. "비전공자가 AI로 대박 성과를 낸 사례로 직원들에게 충격을 주세요.", "혼자서 팀 단위 성과를 낸 사례를 소개해 압박감을 주십시오." 이런 요구의 이면에는 직원들이 절박함이 없어 안 움직인다는 불신이 깔려 있다.반면, 강의장에 앉은 직원들의 눈동자는 흔들린다. 그들은 이미 AI라는 바다에 뛰어들었지만 나침반이 없다. 자신의 전문성이 지워지고 있다는 상실감, 조직의 성과가 개인의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소외감, 그리고 혁신이라는 이름 아래 홀로 생존을 감당해야 한다는 막막함에 짓눌린 모습이다. 사측은 몰아붙이고, 직원은 표류하는 형국이다.대단한 지능이 등장했는데, 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가? 우리가 여전히 과거의 성공 방정식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사측은 AI 전환을 외치지만, 정작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갈지에 대한 비전은 모호하다. 리더들은 자본과 노동력을 대량으로 투입해 성과를 뽑아내던 자본 레버리지 시대의 종말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이제는 AI라는 두 번째 지능이 개인과 산업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시대다. 리더가 먼저 이 본질을 이해하고 비전을 재설계하지 않는 한, AI 도입은 조직의 피로도만 높이는 재앙이 될 뿐이다.직원들 역시 직시해야 할 사실이 있다. 이런 혼란의 원인은 리더가 무능해서가 아니라, 변화의 속도가 통제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회사가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기대를 내려놓아야 한다. AI가 못하는 일을 찾으며 조직 내에서 도망 다니는 회피자, 지시를 기다리는 이행자의 정체성으로는 이 파도를 넘을 수 없다.해결책은 공존에 있다. 노사가 대립해 한쪽을 굴복시켜서 풀리는 사안이 아니다. 조직은 산업화 시대의 사고에서 벗어나 구성원과 고통을 분담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개인은 이제껏 학교와 직장에서 배운 친숙한, 그러나 이미 낡아버린 인지 시스템을 과감히 재구성해야 한다. AI라는 두 번째 지능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자기 업의 역할과 책임, 흔히 기업에서 R&R이라고 부르는 것을 근본부터 재정의해야 한다.올해 초 출간한 저서에서 나는 이렇게 강조했다. AI는 인간을 대체하는 경쟁자가 아니라, 인간의 판단을 보조하고 확장하는 새로운 인지 능력이라고. 우리가 이 대단한 지능을 곁에 두고도 힘든 이유는, 두 번째 지능의 본질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화려한 기술과 눈앞의 프롬프트에만 현혹되었기 때문이다. 도구에만 매몰될 때, 우리의 타고난 뇌인 첫 번째 지능은 오히려 퇴화하고 만다.두 번째 지능을 키우는 법은 단순히 코딩을 배우거나 생성형 AI 사용법을 익히는 데 있지 않다. AI를 외부에 존재하는 도구가 아니라 확장된 메타인지 시스템으로 수용해야 한다. AI가 내놓는 결과물에 감탄하거나 압도당하기보다, 그것을 내 생각의 재료로 삼아 더 높은 차원의 판단을 내리는 훈련이 필요하다. 가끔 돌아보기 바란다. 두 번째 지능을 받아들인 후, 당신이 더 깊게 성찰하고 있는지, 당신의 인간적 사고가 더 날카롭게 벼려졌는지, 우리 조직의 사고가 더 촘촘하게 연결되고 확장되고 있는지를 말이다.그리고 실험자의 길을 가기 바란다. 정해진 절차를 효율적으로 따르는 모범생이 산업화 시대의 인재상이었다면, 두 번째 지능 시대는 자신의 가설을 세우고 AI와 협업하여 끊임없이 시도하는 실험가를 원한다. 완벽한 결과물을 기다리지 말고, 부족한 결과물을 AI와 함께 다듬어가는 과정 자체가 곧 지능을 키우는 과정이다.나는 우리가 고단함을 넘어서, 큰 도약을 하리라 믿는다. 이제 그 길의 초입에 들어섰다. <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 시대>와 함께 그 여정을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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