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고성 50코스
철책 따라 걷는 길, 발걸음 멈춘 그곳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본 구선봉(사진 가운데)과 해금강(오른쪽). /사진=박정웅 기자
금강산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대결의 상징은 또렷했다. 궂은 날씨에도 북한의 351고지와 국지봉(레이더기지), 남한의 대북선전용탑과 경계초소가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금강산 1만2000봉의 완성인 구선봉을 비롯해 말무리반도, 해금강은 아득했다. 7번국도가 이어진 금강산육로와 금강산철로는 바로 발밑에 있어도 꼬리가 흔들렸다.
먹구름이 잔뜩 낀 지난달 25일, 강원 고성 통일전망대엔 꽤나 굵은 빗방울이 들이쳤다. 오전 11시,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를 나선 120여명은 북쪽으로 향했다. 사단법인 한국의길과문화(이사장 양병이)가 이날 '2017 해파랑길 770㎞ 완성하기' 고성 걷기행사를 주최했다. 이들이 향한 길은 우리 현실에서 가장 북쪽에 닿을 수 있는 남한의 끝이다. 해파랑길 마지막 코스인 강원 고성구간 50코스 통일전망대가 바로 그곳이다.


해파랑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걷기길이다. 동해안을 따라 부산 오륙도해맞이공원에서 강원 고성통일전망대까지 770㎞ 10구간 50코스로 구성됐다. 동해의 떠오르는 해와 푸른 바다를 길동무 삼아 함께 걷는다는 뜻이 길에 담겼다.

해파랑길은 최북단인 강원도 고성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고성구간은 총 5코스로 구성되는데 바로 50코스가 해파랑길의 종착지다. 현내면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봉화봉-명파해변-제진검문소-동해선남북출입사무소-DMZ박물관-통일전망대 12.7㎞ 코스다. 이 중 제진검문소부터는 민통선 구역이다. 15명 이상이 일주일 전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에 신고해야만 군부대 협조를 얻어 걸을 수 있다.


옛 7번국도를 따라 걷는 탐방객들. 왼쪽으로 금강산 육로관광 당시 붐볐던 한 휴게소가 10년째 문을 닫았다. /사진=박정웅 기자
봉화봉을 오르는 탐방객들. 이 봉을 넘으면 최북단 해수욕장인 명파해변이 나온다. 마차진 방향으론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부터 49코스다. /사진=박정웅 기자

◆ 10년째 끊긴 7번국도와 명파해변


해파랑길의 뜻처럼 남북이 언젠가 함께 걸을 수 있을까. 50코스는 분단 현장을 걷는 길임과 동시에 화해와 협력의 새로운 미래를 여는 길이기도 하다. 분단의 상징인 철책이 달갑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가시 날선 철책이 푸르고 푸른 동해를 갈기갈기 찢어놨다. 철책 틈을 비집고 나온 겨울바람 또한 매서웠다.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를 나와 옛 7번국도를 따라 걷자 낯익은 휴게소 하나가 눈에 띈다. 2007년 금강산 육로관광 도중 양미리를 맛나게 구워먹었던 곳이다. 당시 건어물과 해산물을 잔뜩 내다팔던, 문전성시를 이뤘던 휴게소는 10년째 문을 닫았다. 녹이 슨 간판과 자물쇠는 속수무책이던 지난 인고의 세월을 대신했다.

최북단 해수욕장인 명파해변. 인근에는 승마체험시설이 있다. /사진=박정웅 기자
북한 목함지뢰 식별도. 초병의 안내를 받고 이 안내판이 있는 통문으로 들어가면 명파해변이다. /사진=박정웅 기자
명파해변 인근 구름다리를 건너는 탐방객들. 이 구름다리를 지나면 민통선의 관문인 제진검문소가 나온다. /사진=박정웅 기자
철책을 오른쪽 옆구리에 끼고 걷던 길이 산으로 이어진다. 쭉 따라다녔던 철책이 잠시 사라진다. 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봉화봉이다. 진지와 통신선은 이곳이 일촉즉발의 전장임을 알릴 따름이다. 봉화봉을 넘으면 최북단 해수욕장인 명파해변이다. 명파해변은 이름값을 못하는 것 같았다. 철책 통문에 설치된 목함지뢰 안내판이 웃통을 시원히 벗지 못하게 했으리라. 초병의 안내를 받고 들어선 백사장은 때가 덜 타서 고왔다. 개천이 바로 옆에 있어 민물수영도 할 수 있다. 명파해변에는 DMZ하우스와 승마체험장이 있어 조용한 곳을 찾는 가족단위 여행객에게 추천할 만하다.

7번국도 인근의 DMZ박물관. /사진=박정웅 기자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탐방객들이 구선봉과 해금강을 보고 있다. /사진=박정웅 기자

◆ 걷고 싶지만 한걸음 더 뗄 수 없는 곳

명파해변에서 제진검문소로 향하는 길, 구름다리를 건너자 눈과 비가 흩날렸다. 금강산을 볼 수 있다는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인가. 군부대 에스코트 아래 민통선으로 발걸음을 뗐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과 밭은 여느 시골 정취와 같았다. 다만 오른쪽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철책은 공기를 더욱 차게 했다. 어디 그뿐이랴. 왼쪽 7번국도를 감싼 여러 겹의 철책은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농로를 지나 다시 국도로 접어든 뒤 통일전망대에 올랐다. 오후 4시쯤, 사방은 어둑어둑했고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뒤를 볼 겨를 없이 전망대로 뛰어올랐다. 명파해변 인근의 구름다리에서 스친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다. 발 아래의 금강산육로와 금강산철로가 숨이 붙은 듯 희미하게 꼬리를 물었다. 금강산은 얼굴을 감췄고 구선봉과 해금강만이 형체를 드러냈다.

통일전망대 주차장 쪽에 있는 6.25전쟁체험전시관. /사진=박정웅 기자
6.25전쟁체험전시관에서는 한국전쟁의 참상을 체험할 수 있다. /사진=박정웅 기자
통일전망대는 고성6경의 하나다. 해발 70m 고지에 2층 슬라브 구조로 지어졌다. 2층과 야외 전망대에서는 금강산과 해금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통일전망대 주차장 쪽에는 6.25전쟁체험전시관이 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교훈 삼고 민족화합과 평화통일을 염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전쟁의 참상을 사진과 영상, 자료와 유물 등으로 현실감 있게 체험할 수 있다. 7번국도 바로 옆에는 DMZ박물관이 있다. 한국전쟁 전후의 모습, 휴전선의 역사적 의미, 이산의 아픔, 군사적인 충돌, DMZ의 생태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해파랑길 인증수첩(패스포트)에 찍힌 50코스 스탬프와 해파랑길 안내지도. 50코스 스탬프는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와 통일전망대에서 찍을 수 있다. /사진=박정웅 기자
통일전망대에서 해파랑길 770km 완보를 자축하는 걷기동호회원들. 이 회원 중 7명은 42일간 기본 1박2일 일정으로 해파랑길을 걸었다. /사진=걷기동호회

"하루 18.3㎞, 42일을 걸었어요"
지난 여름, 단절구간을 이어 총거리 770㎞를 완전 개통한 해파랑길. 2009년 첫걸음을 뗀 해파랑길이 제 모습을 갖추기까지 어언 8년이 흘렀다. 기존 길과 자연을 최대한 살리면서 구축하느라 많은 시간이 걸렸다.

오랫동안 다져져 더 정겨운 해파랑길, 장장 770㎞를 완보한 이들이 있다. 한 걷기여행 동호회 회원들은 이날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인증수첩(패스포트)에 해파랑길 50코스의 종지부를 찍었다. 더불어 등산스틱 무지개 아치를 펼치고는 서로 완보를 자축했다.

이들은 지난 2년간 해파랑길을 걸었다. 2015년 11월21일 부산 오륙도해맞이공원을 나서 이날까지 1박2일을 기본 일정으로 42일간 이어걷기를 했다. 25명이 버스에 몸을 싣고 하루 평균 18.3㎞를 걸었다. 전 일정과 부분 일정에 참가한 이가 130여명이다. 이 중 7명이 50코스를 완보했고 15명이 20코스 이상을 걸었다. 완보한 7명은 이날 한국의길과문화로부터 해파랑길 완보 인증서를 받았다.

해파랑길 이어걷기 모임을 마련한 한 동호회원은 "피곤하고 힘든 여정 가운데서도 이해하고 배려하며 마음을 나눌 줄 아는 멋진 회원들이 함께했기에 완보가 가능했다"면서 "앞으로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길을 떠나자"고 말했다.

이 모임은 내년 1월부터 또 다른 길을 찾는다. 올해부터 구축이 한창인 코레아둘레길 남해안 구간이 다음 행선지다. 동해안을 따라 남에서 북으로 향했던 발걸음이 이제 남해안을 따라 동에서 서로 이어질 예정이다.

이들의 발걸음에 관심이 가는 까닭은 따로 있다. 완보라는 단순한 목표 이면에 길을 가꾸는 마음이 걸음마다 펼쳐지기 때문이다. 자연 풍광이나 삶의 모습을 보며 느끼는 만족감과 더불어 남이 걸을 길도 어루만지기 때문에 만족감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17호(2017년 12월6~12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