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평택캠퍼스 반도체 생산라인 전경. / 사진=삼성전자
재계가 잇단 ‘정보공개’ 요구로 사면초가에 빠졌다. 서비스의 원가나 작업현장의 민감한 정보를 공개하라는 정치권과 여론의 압박이 연일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와 근로자의 알 권리를 충족시킨다는 공공의 목적만을 앞세우다 자칫 우리나라 주요 산업의 핵심 영업기밀이 유출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대법원은 최근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등 이통3사의 2005~2011년 통신요금 원가를 공개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등 이동통신 3사는 2005~2011년 5월 통신비 원가 자료를 공개해야 한다.


공개 대상은 2·3G 서비스에 한정됐지만 이번 정보공개를 계기로 LTE 서비스 등에 대한 원가정보도 언제든 공개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통신비 원가공개에 대한 추가적이 압박도 이어진다. 김경협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3일 통신비 원가 공개를 제도적으로 정착시키는 관련 법안을 발의했다.

업계에서는 이번 서비스 원가 공개를 계기로 가계통신비 인하, 기본료 폐지 등의 여론에 힘이 실릴 것으로 보고 있다.

산업현장의 작업현황 정보공개 요구도 재계의 고민을 키운다. 삼성전자는 최근 고용노동부가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자 모임인 ‘반올림’ 등의 요청에 따라 화성·평택·기흥·온양 반도체 사업장의 ‘작업환경 측정보고서’를 공개하려고 하자 기밀유출을 이유로 가처분 신청 등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이런 가운데 산업통상자원부 산업기술보호위원회 반도체전문위원회는 지난 16~17일 이틀에 걸친 회의를 통해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 작업환경보고서에 국가핵심기술이 일부 포함됐다고 판단했다. 삼성전자는 이번 판정 결과를 법원에 제출, 국가기밀 유출 우려로 보고서를 공개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 활용할 방침이다.

업계에서는 조만간 나올 법원의 판단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만약 법원이 기술유출 등의 우려보다 국민의 알 권리가 먼저라는 논리를 내세워 정보공개를 명령할 경우 그 여파가 다른 기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재 탕정공장의 작업환경보고서 공개여부를 놓고 고용노동부와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삼성디스플레이도 삼성전자에 대한 법원 판단과 똑같은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비단 삼성뿐만 아니라 동종 업계 같은 기업을 비롯해 주요 산업현장에 대한 정보공개 청구가 우후죽순으로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가운데 고용부는 기업이 제조하거나 수입하는 화학물질의 정보까지 인터넷 등에 공개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재계는 정보공개 목적 자체에는 공감하면서도 기업의 영업기밀은 철저히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유해인자 노출수준 정보는 근로자의 질병에 대해 업무연관성을 규명하는데 필요한 자료이므로 해당 근로자에게 제공하는 것은 필요하다”면서도 “기업의 경영·영업상 비밀에 관한 사항은 최소한 보호돼야 한다”고 밝혔다.

경총은 “생산시설 구조, 장비 배치, 화학제품명과 같은 정보는 산재 입증과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경쟁사에서 생산 노하우를 추정할 수 있는 민감한 정보이기 때문에 공개 대상에서 제외하는 정책적 균형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진우 한국안전학회 정책부문장은 “기업이 생산하는 모든 화학물질의 명칭·함유량 정보를 정부에 제출하는 것은 과도한 규제”라며 “환경부가 보유 중인 화학물질 정보를 고용노동부가 공유할 수 있도록 근거규정을 개정안에 마련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