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낯선 존재를 대하는 태도는 사소한 예절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을 두드리는 이가 어쩌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찾아온 신일지도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 깊이 배어 있는 이런 세계관은 단순히 '외부에서 온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의 문제를 넘어선다. 그것은 공동체 속의 '타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리고 그 앞에서 자신의 힘과 욕망을 얼마나 절제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이 전통의 중심에 '크세니아(Xenia)'가 있다. 흔히 '환대'라고 옮겨지지만 그 핵심은 낯선 이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선다. 상대가 누구인지, 나와 같은 편인지 확인하기 전에 먼저 공동체 질서 내의 존재로 대우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규범이다. 그런 의미에서 크세니아는 이방인에 대한 친절이라기보다 타자에 대한 상호존중과 자기절제에 가깝다. 따라서 그것을 지키지 못할 때 결과는 치명적이다.
『오뒷세이아』에서 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존재는 구혼자들이다. 이들은 바다 건너에서 온 이방인이 아니라 오디세우스와 같은 공동체에 속한 이타카의 귀족들이다. 그러나 오디세우스가 부재한 사이 그의 집에 머물며 재산을 탕진하고, 페넬로페에게 결혼을 강요하며, 마침내 그 집의 주인이 되려 한다. 크세니아를 파괴하는 것은 반드시 외부의 낯선 사람이 아니다. 같은 공동체 안에 있는 자도 자신의 힘과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면 공동의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다.
외눈박이 거인 폴뤼페모스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동굴에 들어온 오디세우스 일행을 손님으로 보호하기는커녕 잡아먹는다. 그의 문제는 단순히 이방인에게 잔인하다는 데 있지 않다. 그는 자신과 타인의 관계를 조정할 어떤 규범도 인정하지 않는다. 제우스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극단적 자기중심성을 상징한다. 반대로 파이아케스인들은 난파해 온 오디세우스를 먼저 보살피고 난 한 후에야 그가 누구인지 묻는다. 관계의 출발점이 '당신은 내 편인가'를 묻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앞서 상대를 존중받아야 할 존재로 인정하는 데 크세니아의 정신이 있다.
이 점에서 크세니아는 공화주의와 만난다. 공화국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만든 정치공동체다. 따라서 공화주의의 핵심은 차이 속에서 자유와 법을 만들어 내고, 공존하는 데 있다. 공화주의에서 자유란 어느 한 개인이나 집단의 의지가 다른 사람을 자의적으로 지배하지 못하는 상태다. 그러므로 공화국에는 견제와 더불어 상호존중이 필요하다. 내가 다수라고 해서 소수를 무시하지 않고,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반대자를 제거하지 않으며, 내가 옳다고 확신하더라도 상대에게 말할 자리와 존재할 공간을 남겨두어야 한다.
그래서 공화국에는 상대가 필요하다. 여당을 불편하게 만드는 야당도, 권력을 비판하는 언론도, 다수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소수도 필요하다. 그들이 옳기 때문이 아니다. 누구도 자신만이 언제나 옳다고 확신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정치에서는 상대를 제거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는 극단적 언어에 익숙해지고 있다. 그러나 민주공화국은 상대를 없앰으로써 완성되는 체제가 아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끝내 함께 살아가기로 약속함으로써 유지되는 체제다.
크세니아가 가르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타자를 무조건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다. 내가 힘이 있다고 상대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상대 역시 자신의 욕망으로 공동체의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는 것, 서로를 하나의 인격과 시민으로 인정하면서 자신의 힘을 절제하는 것이다. 크세니아가 타자를 존중하는 윤리라 할 수 있다면, 공화주의는 그 상호존중을 정치의 원리로 만드는 체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낯선 사람이 신의 강림일 수도 있다고 믿었기에 스스로를 절제했고, 존중과 환대의 태도를 실천했다. 나와 다른 정치적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경쟁자는 적이 아니다. 그는 동료 시민으로서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혜안을 가진 것일 수 있다. 공화국은 바로 그 상호존중과 작은 의심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