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주 에프엔에스(FNS)벨류 대표이사

전승주 에프엔에스(FNS)벨류 CEO/ Architect(설계자)│20세기 두 차례 발발했던 세계대전은 인류의 비극이었지만, 군사기술이 견인한 과학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선사하는 결과를 낳았다. '웃픈' 아이러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살아있는 전쟁을 직시하고 있는 필자는 최근 '총성 없는 현대전'을 경험했다. 지난 2월21일부터 3월2일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ITU-T(국제전기통신연합 전기통신표준화부문) 국제회의장에서다.


기술의 세계표준화를 두고 국가간 팽팽한 신경전 혹은 연대는 세계대전의 연합군이나 동맹간 혈전을 연상시켰다. 총성만 없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ITU는 UN(국제연합) 산하 정보통신기술(ICT) 전문기구다. ITU-T SG17은 사이버보안 분야 세계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여 사이버보안과 관련한 국제표준(International Standardization)을 총괄하는 회의다. 연 2회 개최되는 SG17 회의에는 세계 각국의 기업과 연구원이 제출한 사이버보안 관련 기술의 국제표준화 심사와 채택이 이뤄진다.

필자도 회사의 블록체인 보안인증 솔루션 기술의 세계표준화에 도전장을 던졌다. 이번 제네바 회의에 참석해 당사 기술에 대해 미국, 영국, 일본 등 선진국들이 보인 반응은 한마디로 예민했다. 당사의 보안인증 솔루션은 코어기술이 블록체인이다 보니 SG17 중에서도 분산원장기술(Distributed Ledger Technology) 부문으로 기고문을 올렸는데, 각국 대표단이 참석한 검토 회의에 예정도 없던 미국 대표단이 등장했다.


그것은 등장으로 끝나지 않았다. 생체인증 기술로 유명한 자국 기업의 시장점유율이 높은 시장에 향후 새로운 솔루션이 등장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리뷰 회의에서 작정한 듯 날선 발언이 서슴없이 나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사이버 세상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졌다. 재택근무가 일상화돼 일터를 벗어난 제3의 업무 장소에선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국가, 기업 할 것 없이 해커들의 공격에 노출되면서 허술했던 보안 시스템을 앞다퉈 손봐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계 경제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코로나19가 IT 산업, 특히 보안시장의 급성장을 견인했다.

한국 역시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감염병 대유행) 기간 동안 사이버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특히 올해 연초부터 연이어 터진 통신사, 이커머스, 학회의 정보유출 사건으로 사이버보안에 대한 국민들의 예민함도 고조됐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한국에만 국한되지 않은 탓에 ITU의 여러 스터디그룹(SG) 중에서도 보안(Security)을 연구하는 SG17은 중요성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이렇다 보니 블루오션으로 등장한 보안시장에서 깃발을 먼저 꽂는 자가 승자가 될 수밖에 없다. 세계표준화는 그 '깃발'이 될 수 있다. 특정 기술이 세계표준화가 되는 것은 각국 정부에서 채용을 권고하는 기술이 됨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시장이 글로벌로 열린다는 뜻이다. 따라서 자국 기업의 이익을 등한시할 수 없는 각국 대표단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계산된 합종연횡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일지 모른다.

흥미로운 것은 ITU에서의 국가간 경쟁구도가 정치적 대립과도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물리적 충돌이 없는 전쟁터에서도 미국과 중국의 팽팽한 신경전, 미국과 러시아의 노골적인 대립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대립 속에 자기 밥그릇을 유리한 쪽으로 챙기려는 동맹국들도 보였다.

SG17은 한국인이 의장을 맡을 만큼 한국과 한국 대표단이 활발히 활동하는 연구반이다. 세계적인 기술 강국으로 알려진 미국, 그리고 미국을 놀라운 속도로 쫓고 있는 중국과 대한민국의 한판 승부를 지켜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보이지 않는 동맹을 형성한 대표단들의 움직임 또한 관전 포인트였다.

세계표준화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서너번 또는 그 이상 방어에 성공해야 완전히 승인을 받을 수 있다. 에프엔에스(FNS)벨류가 제출한 솔루션 기술도 앞으로 몇 차례 더 이어질 '설전'에서 방어를 해내야 한다. 올해 두 번째 국제회의는 오는 8월 한국에서 개최된다. 홈그라운드에서의 한 판은 제대로 이겨볼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