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역할은 있어도 작은 배우는 없습니다."
'앙상블'(Ensemble). 본래 프랑스어로 '함께, 동시에, 협력하여' 등을 의미하는 부사다. 영어로는 합주단·무용단·극단을 의미하는 단어로도 쓰인다. 이 때문에 뮤지컬에서 조연으로 합창과 군무를 맡는 코러스 배우들을 앙상블이라고 지칭한다.
화려한 무대와 볼거리가 눈과 귀를 사로잡고 최정상 스타들이 주연을 맡아 노래와 춤 연기를 펼치면 관객들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주인공에게 향한다. 관객들의 시선이 주인공을 향할 때 작품에서 여러 역할로 등장하며 극을 이끄는 숨은 이들도 있다. 다양한 삶을 살아보고 싶어 배우를 시작했고 뮤지컬을 하면서 앙상블의 매력에 빠졌다는 뮤지컬 배우 임하람씨(사진)다.
뮤지컬 '미녀는괴로워'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호프' '데스노트' '록키호러쇼' 등 20여개 작품에 출연하고 연극, 단편 영화, 웹 드라마까지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다. 뮤지컬 배우는 만능 재주꾼이어야 한다. 연기만 잘하는 배우도, 노래만 잘하는 가수여서도 안 된다. 연기·춤·노래 삼박자를 갖춰야 뮤지컬을 할 수 있다. 뮤지컬만큼 까다롭고 완벽해야 하는 분야는 흔치 않을 것이다.
하람씨는 어린 시절부터 노래에 소질이 있었다. 초등학생 때 동요대회에 참가했고 중·고등학교 합창대회 등에 출전하는 등 떡잎부터 남달랐다. 노래로 진로를 선택하려 했지만 공부도 잘했던 그는 고교 성적에 맞춰 한양대 일본언어문화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진학 전에도 연기·노래 분야인 예체능 계열을 선택할지 고민했었지만 주위의 만류와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포기해야 했다.
군대에서 시작된 뮤지컬배우의 꿈
대학 입학 후 고교 시절 우연히 접한 댄스가 생각나 댄스 동아리에 가입했다. 뮤지컬이라는 분야에 빠지게 된 건 입대하면서부터다. 군악대 활동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하면서 '꿈을 향해 한번 도전해 볼까'라는 마음을 갖게 됐다. 제대 후 휴학을 하고 1년 동안 뮤지컬 아카데미를 다녔다. 그곳에서 재즈·댄스·발레·보컬 등을 배워 다음 해 대학로 뮤지컬에 데뷔했다.
군대 후임이 대본을 쓴 군악대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었다. 군악대 내용의 시나리오를 흥미롭게 본 한 극단이 '상업공연으로 만들어 보자'고 제안해 뮤지컬이 만들어졌다. 2009년 당시만 해도 '액터 뮤지션' 뮤지컬이 흔하지 않았다. 액터 뮤지션은 말 그대로 연기자가 노래와 연기뿐 아니라 악기를 직접 연주하는 배우를 뜻한다. 당시 그는 24세 막내로 배우 겸 악기 코치를 해 작품을 이끌었다. 그는 "춤·노래·연기·악기 4개를 다 해야 하니 신인에겐 힘들었다. 원래는 비중이 작은 역할이었는데 감사하게도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 역할이 점점 커져 주인공과 엮이고 사건 발단의 중심 역할을 맡게 됐다"고 회상했다.
첫 상업 뮤지컬에 성공적으로 데뷔했지만 그는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면서 다시 뮤지컬에 대해 고민하게 됐고 복학했다. 3학년 2학기 때는 일본 가나가와현의 도카이대학에서 1년 동안 교환학생을 지냈다. 교환학생으로 있으면서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고 모든 준비를 완료했지만, 출국을 앞두고 2011년 대지진이 발생해 일본행이 좌절됐다.
의욕을 잃어 무기력증에 빠진 그때 집에 틀어박혀 TV만 보는 생활을 지속하다가 어느 날 집을 나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자극을 받은 하람씨는 오디션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하루에 오디션 1개씩 지원했다. 크고 작은 작품을 따지지 않고 꾸준히 오디션을 봤다.
번번이 낙방해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작품 경력은 1개뿐인데다 뮤지컬 전공도 아니어서 관계자들의 외면을 받아도 100번의 오디션을 채우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 결과 영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미녀는 괴로워'에 참여하게 됐다.
다양한 삶을 살 수 있는 앙상블의 매력
그는 이후 수많은 창작 뮤지컬에 주·조연으로 활약했다. 라이선스 뮤지컬에선 앙상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는 "뮤지컬 작품을 하면서 저와 맞는 것을 찾았는데 그것이 앙상블이었다"면서 "주인공들은 노래와 연기로 작품을 이끌지만, 앙상블은 춤·노래·연기를 해야 하고 장면마다 역할도 계속 바뀐다. 주·조연의 경우 한 역할밖에 할 수 없지만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앙상블의 매력"이라고 설명했다.출연한 수십 편의 작품들 가운데 정신적·육체적으로 힘들었던 경험에 대해 그는 최근 촬영을 마친 단편 영화 '당신의 동산'을 꼽았다. "오로지 연기만 보여줘야 했던 작품이었어요. 아들과 아버지 두 사람만 나오고 저는 아들 역할을 맡았어요. 하루 14시간 이상 촬영해 육체적으로 힘들었고 후반부에 제가 맡은 캐릭터가 아버지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고 오열하는 장면이 있었어요. 감독님이 30년의 인생을 표현해달라고 요청했는데 감정들을 표현하고 깊이감을 이해하는 게 어려워서 매우 힘들었습니다."
뮤지컬에 전념할 수밖에 없던 이유에 대해 그는 무대가 주는 희열이 크다고 밝혔다. "뮤지컬은 '커튼콜'을 하잖아요. 작품이 끝나고 출연 배우들이 한 명씩 나와 관객들에게 박수를 받는데, 지금도 신기하고 벅차올라요. 물론 주인공을 보기 위해 오는 관객들이 더 많겠지만 저 또한 앙상블로서 동료들과 좋은 무대 자체를 만들었음에 울컥할 때가 많아요. 관객분들의 박수에 늘 감사하며, 매번 힘을 얻고 더 열심히 임해야겠다 생각이 듭니다. 항상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