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국채가 세계국채지수(WGBI)에 편입되면서 약 70조~90조원 규모의 외국인 자금이 유입될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글로벌 주요 채권지수를 추종하는 패시브 자금(지수 편입 비중에 맞춰 자동으로 투자되는 자금)이 국내 국채시장으로 들어오면 국고채 금리 하락과 환율 안정에 힘을 보탤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편입이 금리와 환율 흐름을 단숨에 바꾸는 재료라기보다, 대외 불안에 따른 상승 압력을 완화하는 완충 장치에 가까울 것이라는 신중론도 함께 제기된다.
3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지난 1일부터 한국 국채의 WGBI 편입이 시작됐다. WGBI는 글로벌 연기금과 중앙은행, 대형 자산운용사 등이 벤치마크로 활용하는 대표적인 선진국 국채지수다.
한국은 11월까지 약 8개월에 걸쳐 지수에 단계적으로 편입될 예정이다. 시장에서는 이 기간 약 500억~600억달러 규모의 자금이 순차적으로 국내 채권시장에 유입될 것으로 보고 있다.
WGBI 편입의 핵심은 지수를 추종하는 패시브 자금의 '자동 유입 구조'다. 지수 내 한국 비중이 확대되는 만큼 글로벌 투자자들이 기계적으로 한국 국채를 매입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달러를 원화로 환전하는 수요가 발생한다. 이에 따라 채권시장에서는 수요 증가에 따른 금리 하락 압력이, 외환시장에서는 달러 공급 확대에 따른 환율 안정 효과가 기대된다.
실제 편입을 전후로 외국인 자금 유입도 확인되고 있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WGBI 편입 공식 개시 전후로 외국인은 사흘간 약 4조4000억원 규모의 국고채를 순매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지수 편입에 따른 자금 유입이 실제로 시작됐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된다.
WGBI란 무엇인가…'선진국 국채 클럽' 들어간 한국
WGBI는 영국 런던증권거래소그룹(LSEG) 산하 지수 산출기관인 FTSE 러셀이 산출하는 지수로, 미국·일본·영국·독일 등 주요국 국채가 편입돼 있다. 글로벌 연기금과 중앙은행, 대형 자산운용사들이 벤치마크로 활용하는 핵심 지수로 꼽힌다.
편입 요건도 까다롭다. 국채 발행 잔액 등 시장 규모를 보여주는 지표, 국가 신용등급을 비롯한 정량 요건뿐 아니라 외국인 투자 접근성 등 시장접근성 요건까지 충족해야 한다.
한국은 2022년 9월 관찰대상국에 오른 뒤 외국인 투자자 등록제 폐지, 국채 투자 비과세, 국채통합계좌 개통, 외환시장 거래시간 연장, 제3자 외환거래 허용 등 제도 개선을 이어왔다.
그 결과 FTSE 러셀은 2024년 10월 한국의 WGBI 편입을 최종 확정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국채 발행 잔액, 신용등급, 시장 접근성 등 세 가지의 까다로운 요건을 충족해 WGBI에 편입되면 '채권 선진클럽'으로 꼽힌다"고 설명했다.
돈은 어떻게 들어오나…지수 편입 비중만큼 '기계적으로' 매수
WGBI 편입의 핵심은 패시브 자금 유입이다. 이 지수를 추종하는 글로벌 자금은 통상 2조5000억~3조달러 수준으로 추산된다. 한국의 편입 비중은 시점에 따라 2.08~2.22% 수준으로 제시되고 있다. 편입국 26개국 가운데 9위권이다. 이를 감안하면 한국 국채시장에 유입될 자금은 약 500억~600억달러로 예상된다.
한국금융연구원은 "세계국채지수를 추종하는 전 세계 자금 규모는 2조5000억달러 내외"라며 "우리나라의 편입 과정에서는 500~600억 달러에 달하는 외국인 채권투자자금이 유입될 것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작동 원리는 단순하다. 지수를 따라 운용하는 글로벌 채권 펀드와 연기금은 한국 비중이 늘어나는 만큼 한국 국채를 일정 비율 사들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해외 투자자는 달러를 원화로 바꿔 국채를 매입하게 되고, 그만큼 채권 수요가 늘어나 금리 하락 압력이 생긴다.
동시에 외환시장에는 달러 공급이 늘어 환율 상승 압력을 낮추는 효과가 기대된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지수의 편입액 만큼 우리 국채에 무조건 투자하겠다는 '약속'과도 같다"며 한국 국채시장에 대한 신뢰를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채권시장엔 어떤 효과…국채 금리 내리고 조달비용 낮춘다
채권시장에서 가장 직접적인 변화는 수급 개선이다. 외국인 자금이 국채를 사들이면 채권 가격이 오르고 금리는 내려간다. 국고채 금리는 회사채와 은행채, 대출금리의 기준점 역할을 하기 때문에 국채 금리 하락은 정부뿐 아니라 기업의 자금조달 비용을 낮추는 방향으로 이어질 수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대규모 자금이 들어와 국채 금리가 낮아지면 정부 입장에서 조달비용이 줄어드는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며 "국채 금리를 기반으로 하는 회사채 금리가 낮아지는 효과가 있어 기업의 자금조달비용도 감소할 수 있다"고 했다.
WGBI 편입 개시를 전후로 채권시장은 변동성이 확대되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 1일 종전 기대감과 WGBI 편입 영향으로 국고채 금리가 큰 폭으로 하락했지만, 2일에는 다시 상승 전환했다. 2일 서울 채권시장에서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전 거래일보다 0.107%포인트 오른 연 3.477%에 마감했고, 10년물 금리는 0.115%포인트 상승한 연 3.804%를 기록했다. 시장에서는 중동발 지정학 리스크가 다시 부각되면서 WGBI 편입 효과가 단기적으로는 금리 흐름을 압도하지 못한 것으로 분석했다.
외국인은 편입 하루 전인 3월 31일 약 2조7000억원 규모의 국채를 순매수한 것으로 추정됐고 국채선물 시장에서도 3년·10년 선물 순매수세가 확인됐다. 편입 기대가 '숫자'로 나타난 셈이다.
정부도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지난 1일 "오늘 대한민국 국채가 세계국채지수(WGBI)에 편입됐다"고 밝히며 "중동전쟁으로 변동성이 커진 우리 외환·금융시장의 안정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이어 2일 진행된 시장상황점검회의에서도 "일본계 자금을 중심으로 외국인 자금이 원활히 유입되고 있다"며 "관계기관 합동 점검체계를 통해 자금 유입 상황을 면밀히 모니터링하겠다"고 밝혔다.
환율에도 호재지만…'급반전'보다는 완만한 하방 압력
외환시장 역시 WGBI 편입의 수혜처로 거론된다. 한국 국채를 사기 위해선 결국 원화가 필요하기 때문에 달러가 원화로 바뀌는 환전 수요가 발생한다. 이는 달러 공급 증가로 이어져 원·달러 환율의 상단을 누르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국채 투자를 위한 원화 수요가 늘면 외환시장 수급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다만 "주로 환 헤지를 동반하는 외국인 채권자금의 특성상 직접적인 원화 매수 수요보다는 외화자금 시장의 수급개선 효과가 더 클 것"이라는 의견도 내놨다.
실제 지난 1일 원·달러 환율은 전날보다 28.8원 급락한 1501.3원에 마감했다. 미국과 이란의 종전 기대, 당국의 구두개입성 발언, WGBI 편입 개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해석됐다.
하지만 시장은 환율이 단숨에 방향을 바꿀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자금이 8개월에 걸쳐 분산 유입되는 데다 4월에는 외국인 배당금 역송금 수요도 겹치기 때문이다. 결국 WGBI 자금은 환율을 끌어내리는 '강한 요인'이라기보다 고환율 흐름의 속도를 늦추는 '완충 장치'로 기능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평가다.
단순한 수급 효과 넘어…자본유입이 신용팽창으로 이어질 수도
이번 편입이 단순히 금리와 환율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한국금융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외국인 채권자금이 대거 유입되면 시장금리 하락과 자산가격 상승, 금융기관의 대차대조표 강화, 자금조달 여건 개선을 거쳐 국내 신용공급 여력이 확대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금융연구원은 "외국인 채권 수요 확대에 따른 시장금리 하락이 국내 금융기관이 자금을 조달하기에 용이한 여건을 조성함으로써 국내신용 공급 여력을 확대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또 자산가치 상승 역시 금융기관의 대차대조표를 강화해 신용 확대를 자극할 수 있다고 짚었다.
이는 WGBI 편입이 단기 호재를 넘어 금융시장의 체질을 바꾸는 사건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만 그만큼 관리가 중요하다. 자본유입이 과도한 신용팽창이나 자산가격 상승으로 번질 경우, 오히려 금융안정 측면의 과제가 생길 수 있어서다. 한국금융연구원은 향후 "자본유입-신용팽창 파급경로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기대만큼 다 들어올까…신중론도 여전
물론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중동발 지정학 리스크와 고유가, 인플레이션 우려, 원화 약세가 이어지면서 WGBI 편입 효과가 기대보다 약할 수 있다는 신중론도 만만치 않다. 환율이 높게 유지되면 WGBI 내 한국 비중이 낮아질 수 있고 글로벌 채권형 자금의 운용자산(AUM) 자체가 줄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미 일부 자금이 선반영 형태로 먼저 들어왔을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김지나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원화 약세가 심화될 경우 지수 내 편입 비중이 1%대로 낮아질 가능성도 있다"며 "주식시장으로의 글로벌 자금 이동과 전쟁에 따른 채권 투자심리 위축 역시 WGBI 추종 자금 규모 자체를 줄이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WGBI 편입은 전쟁과 인플레이션 등 금리에 비우호적인 환경을 일부 상쇄하는 수준의 효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며 "편입이 마무리되는 11월 이후 자금 유입이 둔화될 경우 다시 수급 부담이 부각될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WGBI 편입은 한국 국채를 글로벌 '선진 국채' 반열에 올려놓은 상징적 사건이자, 국채 수급과 환율 안정에 실제 도움을 줄 수 있는 구조적 호재다. 다만 지금처럼 전쟁과 고환율, 고물가 우려가 겹친 국면에서는 이를 만능 재료로 보기 어렵다는 게 시장의 평가다.
금리를 끌어내리는 절대 변수라기보다 상승 압력을 누르는 버팀목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 채권시장이 제도 개선을 통해 세계 투자자금의 자동 유입 구조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한 변화다. WGBI 편입의 진짜 의미는 당장의 하루 금리 움직임보다 한국 국채가 이제 글로벌 자금의 기준 포트폴리오에 상시 포함되는 시장이 됐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