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여성단체들이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집회를 열었다.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낙태죄와 관련한 사회적 갈등의 출발점이다. 여성단체들의 낙태죄 폐지 요구가 이어지던 2017년 6월 천주교와 기독교 단체들이 낙태 합법화에 반대하는 맞불 집회를 열며 낙태죄 찬반 논란이 본격화됐다. 이후 여성단체가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자처한 문재인 정부에 낙태 합법화를 요구하면, 종교단체들은 낙태죄 폐지 법안을 낸 의원에 대한 낙선운동을 전개하는 등 팽팽한 대결 구도가 이어졌다.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여성의 임신 중지권을 헌법상의 권리로 인정하면서 갈등은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갈등 상태'다. 헌재는 2년 안에 대체 법안을 마련하도록 주문했지만, 정치권은 7년째 손을 놓고 있다. 여성이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최대 주(週) 수, 의료인의 시술 거부권 인정 여부, 건강보험 적용 문제 등 핵심 쟁점을 두고 정치권이 조정할 의지도, 능력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갈등을 증폭시킬 때는 진영 결집을 위해 나서지만, 갈등을 조정해야 할 때는 양쪽으로부터 비판받을 수 있기에 발을 빼는 정치권의 '이중적 행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례다.
지난 32년간 갈등 비용 2682조…이념 갈등 압도적 1위
정치권이 이해관계를 조율하기보다 갈등을 부추기는 과정에서 시민들은 정치에 대한 불신이 심해지고 무력감이 커진다. 이를 실질적 피해 금액으로 따진 게 '사회적 갈등 비용'이다. 사회적 문제로 발생한 이슈에 대해 다수의 이해관계자가 충돌하고 대립하면서 발생한 비용의 총합이다.산출식은 '최저시급×1일 법정근로시간×참여자 수×평균 갈등 지속 기간'이다. 갈등으로 인해 집회 및 시위에 참여하면 생산활동을 하지 못하게 된다. 국민마다 사회활동을 하면서 얻는 경제적 수입은 각자 다르지만, 가장 기본적인 최저시급과 법정근로시간을 적용해 1일 갈등 비용을 산출한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또 얼마나 오랫동안 참여했는지가 중요 고려 사항이다.
2024년 국무조정실이 단국대 분쟁해결연구센터에 발주한 '사회적 갈등으로 인한 경제적 비용분석'에 따르면, 1990년부터 2022년까지 32년간 한국이 지출한 사회갈등 비용은 2628조원에 이른다. 같은 기간 대한민국 전체 국가 예산(약 6345조원)의 41%에 달하는 막대한 비용을 내부 갈등으로 날린 셈이다.
문제는 그 비용이 갈수록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1990년대 10년간 사회적 갈등 비용은 31조원이었다. 하지만 2011년부터 2022년까지 12년 동안 발생한 사회적 갈등 비용은 2352조원에 이른다. 우리 사회 갈등의 골이 그만큼 깊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갈등 유형별로 살펴봤을 때 지난 32년간 이념 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1981조원으로 압도적 1위였다. 2위인 노동 갈등 비용(307조원)의 6배에 이른다. 보고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진단했다.
'정치적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면서 이념 갈등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 최근에는 일반적, 경제적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까지 이념 갈등으로 비화하고 있다. 이념 갈등의 경우 광범위한 이해관계자가 가치적인 측면에서 개입하기 때문에 갈등이 장기화된다. 이념적인 이유로 갈등이 발생하는 건 당연한 과정이지만, 일반적 갈등이 이념 갈등으로 전환되는 건 쟁점을 흐리게 하고 갈등 비용을 더욱 크게 유발한다. 이념 갈등의 경우 한번 발생하면 갈등이 완화되기보다 갈등이 고조되는 경향이 높으므로 갈등이 심화하기 이전에 관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번 '배재고 사태'에 적용하면 이렇다. 이 사태의 본질은 일부 야구부 선수들의 잘못된 역사 인식에서 비롯된 일탈이다. 하지만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조롱이라는 이념 프레임에 갇히면서 여권 일각에선 '야구부 해체'라는 극단적 주장까지 제기됐다. 야권에선 배재고에 응원 화환을 보내며 '학생들의 일탈'을 '이념 전쟁'으로 키웠다. 그 사이 청소년들이 '혐오 표현'에 무방비로 노출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실종됐다. 스타벅스의 '탱크데이' 마케팅 논란에서 촉발한 이념 갈등은 배재고 사태를 거쳐 급기야 극우 커뮤니티의 표현이란 주장과 함께 한 아이돌의 '무섭노' 발언까지 정치 쟁점화하기에 이르렀다. 두 달 가까이 이어진 이번 이념 갈등으로 많은 시민들은 심리적 피로감이란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다.
정치권 향한 일침…"배재고, 광주일고 보고 배워야"
시민들 역시 '이념 갈등의 블랙홀'을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2025년 12월 국민통합위원회가 발표한 '국민통합을 위한 5대 사회갈등 국민 인식조사'에 따르면 '보수-진보 간 갈등이 심각하다'는 비율은 92.4%였다. 소득 계층 간 갈등(77.3%)이나 세대 간 갈등(71.8%)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일반 시민들이 보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의 대립은 국민 사이의 불신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응답도 90.6%였다. '정치 문제를 생각하면 무력감이나 분노를 느낀다'는 이들도 81.3%에 달했다.이 보고서에는 자유발언 방식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시민들이 정치권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구체적으로 담았다. 응답자의 약 25%는 '정치권이 사회갈등을 적극적으로 관리하거나 완화하지 않고, 오히려 지지층 결집이나 대립 구도를 유지하기 위해 활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치권이 (갈등을) 계속 이용하면서 갈등이 점점 커진다', '서로 갈라서 싸우게 만드는 게 정치인들한테는 이익이 된다'는 게 많은 시민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그런 만큼 사회 갈등을 줄이기 위해 정치·지도층의 변화를 가장 먼저 주문했다.
최근 배재고 야구부 선수들에 대한 선처를 호소한 홍경표 광주제일고등학교 총동창회장은 '동행미디어 시대'와의 전화 통화에서 "정치가 사회적 문제를 치유하고 상처를 아물게 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덧나게 하고 있다"며 "자기 이득을 얻으려고 악용하는 일부 정치인들이 보수, 진보 진영 가릴 것 없이 많다. 용감하게 사과한 배재고와 그것을 넓게 포용한 광주일고의 정신을 정치인들이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극단적 지지층에 기댄 '팬덤 정치'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는 데 대한 우려가 크다. 김종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정치가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의 의견을 대변해줄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양당 구도에서 정당들은 선명한 목소리를 내는 지지층을 중심으로만 결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러니 중도층은 떠나가고, 그 빈자리를 점점 더 급진적인 언어들이 채워 나가고 있다"며 "정치권이 사회의 큰 담론을 대변할 수 있는 통로가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회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대안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정치가 갈등 증폭의 소모전을 치르는 사이 배재고와 광주일고의 학생과 학부모, 교육자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용서와 화해'를 통한 갈등의 치유의식을 진행했다. 정치가 제 기능과 역할을 상실한 상황에서 과연 사회적 갈등 비용을 줄이기 위해 우리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3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