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팅 상대는 다리에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고 나왔다. 스위스에서 스키를 타다 다쳤다며, 대단히 재밌는 일이라도 겪은 듯 웃었다. 한국에 돌아와 이 회사가 궁금해 찾아봤다. 성과는 분위기보다 더 남달랐다. 21세기 IT 산업이 세콰이어의 자본을 먹고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바탕에 깔린 철학은 홈페이지에 걸린 '우리의 신조(Our Ethos)'라는 글에 담겨 있었다.
"창의적인 영혼들. 언더독들. 결연한 자들. 굳센 자들. 지치지 않는 자들. 아웃사이더들. 굴하지 않는 자들.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자들. 파이터들. 그리고 진정한 신봉자들."
타임지 기자로 실리콘밸리를 취재하다 투자자가 된 마이클 모리츠가 쓴, 세콰이어가 '파트너로 삼고 싶은 창업자상'이다. 모리츠는 곧장 "이런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덧붙였다.
드문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날 세콰이어 로비를 장식했던 얼굴들은 기질만 남달랐던 게 아니다. 상당수가 코딩에 능통하거나, 그런 공동창업자를 곁에 둔 이들이었다. 의지와 아이디어만으로는 혁신의 문턱을 넘을 수 없었다.
"가장 '핫한' 새 프로그래밍 언어는 영어다."
요즘 AI 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 안드레이 카파시가 2023년 한 말이다. 오픈AI 공동창업자이자 테슬라의 자율주행을 이끈 그는 파이썬 같은 프로그래밍 언어가 아니라 사람의 말로 컴퓨터를 부리는 시대가 온다고 내다봤다. 3년이 지난 지금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됐다.
카파시는 지난해 이 새로운 방식에 '바이브 코딩'이라는 이름도 붙였다. 영국 콜린스 사전은 지난해 이 신조어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카파시는 2025년 강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LLM은 기술이 확산하는 방향을 뒤집는다." 전기와 컴퓨터, 인터넷까지 거의 모든 기술은 정부와 대기업이 먼저 쥐었다가 한참 뒤에야 대중에게 흘러왔다. 반면 AI는 평범한 개인들이 먼저 썼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에게 먼저 도착한 기술'인 셈이다.
세계 최고 개발자로 꼽히는 카파시조차 올해 "프로그래머로서 이렇게 뒤처졌다고 느낀 적이 없다"고 했다. AI 도구가 그만큼 좋아져, 전문가의 우위마저 빠르게 무너진다는 뜻이다. 최고와 보통의 거리가 좁혀지는 것, 그것이 '기술 민주화'의 가장 선명한 증거다.
'바이브 코딩' 덕에 한 사람이 만들 수 있는 임팩트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커졌다. 이스라엘의 한 개발자는 말로 설명하면 앱을 통째로 만들어주는 서비스를 혼자 개발해, 외부 투자 없이 6개월 만에 1000억원 넘는 금액에 매각했다. 예전 같으면 엔지니어 수십명이 매달렸을 일이다. 한국에서도 같은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Z세대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영상 일기 앱 '셋로그'는 AI 시대 1인 창업의 산물이다. 입소문만으로 애플과 구글 앱마켓 SNS 부문 1위에 올랐고, 지금도 두 마켓 모두 1위다. 데이터 분석 업체 와이즈앱·리테일 집계로는 5월 월간활성이용자(MAU)가 778만명에 달했다.
이렇게 코드가 흔해질수록 귀해지는 건 '질문'이다. 와이어드를 공동창업한 기술사상가 케빈 켈리는 2016년 저서에서 AI가 발전할수록 "답은 값싸지고 질문은 값비싸진다"고 내다봤다. 답은 기계의 몫이 됐고, 질문은 인간의 몫으로 남았다. 무엇을, 왜 만들 것인가. 그 답은 현실의 문제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2024년 아이들에게 코딩 대신 생물학과 제조업, 농업 같은 현장 전문성을 가르치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제 프로그래밍 언어는 인간의 언어"이고 "모두가 프로그래머"이기 때문이다.
12년 전 세콰이어 로비의 벽을 채웠던 얼굴들을 기억한다. 그들처럼 되는 데 기술은 더 이상 필요조건이 아니다. 더 절실해진 건 현실을 이해하는 깊이, 그리고 더 나은 무언가를 만들려는 의지다. 거창한 무대도 필요 없다. 변화는 각자의 일터에서, 눈앞의 문제를 스스로 풀어내는 순간마다 일어난다. 혁신의 문은 이제 더 많은 언더독과 아웃사이더, 파이터들에게 열려 있다. 불합리·모순과 타협하지 않는 이단아들이여 그 문으로 들어서라. 기다리던 우리의 시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