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 한 관계자가 최근 사석에서 한 말이다. 서울 토박이인 그는 "부모님이 왜 자신을 부산이나 경남에서 낳아주지 않았는지 원망스럽다"며 말을 이어갔다.
직장인들이 회사에서 승진하려면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라인'이다. 이른바 누구 줄에 서느냐에 따라 자신의 승진과 권력, 급여명세서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학연·지연·정권인맥 난무한 금융권
금융권에서 최근 가장 부각되는 지역은 이른바 PK(부산·경남)다. 금융권 직원이 "경상도 사투리를 배워야 하는 것 아니냐"며 던진 볼멘소리를 결코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처럼 금융권에 PK 논란이 본격화 된 것은 신동규 농협금융지주 회장이 선임되면서부터다. 지난 6월27일 공식 취임한 그는 현 정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PK출신이라는 점에서 보은인사와 낙하산 논란이 일었지만, 결국 농협중앙회 노조와 타협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농협금융을 비롯해 KB·우리·산업·신한·하나금융 등 국내 6대 금융권 수장들이 모두 PK출신들로 채워졌다.
경남 거제 출신인 신동규 회장은 경남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행정고시(14회)를 거친 그는 재무부 자본시장과 과장, 재정경제원 기획관리실 실장, 한국수출입은행장, 전국은행연합회장 등을 역임한 모피아(기획재정부의 전신인 재무부 출신)의 일원이다.
강만수 산은금융 회장(경남 합천)과 이팔성 우리금융 회장(경남 진해), 어윤대 KB금융 회장(경남 진해), 한동우 신한금융 회장(부산), 김정태 하나금융 회장(부산)도 모두 PK 출신이다. 이밖에 김석동 금융위원장과 박병원 은행연합회장, 김종준 하나은행장의 고향이 모두 부산이다.
이들을 묶는 고리는 또 있다. 강만수 회장(1965년 졸업)과 신동규 회장(1969년 졸업), 김정태 회장(1971년 졸업)은 서로 경남고 선후배 사이다. 또 강 회장과 신 회장은 경제관료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강만수 회장과 신동규 회장, 한동우 회장은 서울대를 졸업했고 어윤대 회장과 이팔성 회장, 신충식 농협은행장은 고려대 출신이다. 아울러 윤용로 외환은행장과 김용환 수출입은행장 등은 정부 관료 출신이다.
◆낙하산 인사 표적된 금융권
금융권에서 낙하산 논란이 일어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새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최고경영자(CEO) 선임 과정은 늘 낙하산과 보은인사로 시끄러웠다. 하지만 현 정부의 경우 보은인사가 어느 정권때보다 심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MB정부 초·중반까지만 해도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코드가 논란이 됐다. 'MB노믹스'를 설계하고 현 정부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강만수 회장과 대선 승리에 공을 세운 어윤대 회장, 이팔성 회장 등이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신동규 회장도 현 정부 인수위에서 자문위원을 지낸 경험이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현 정권이 바뀌면 금융권 수장들이 대거 국회청문회나 검찰의 특별검사를 받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지주 수장들 대부분이 현 정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라며 "금융권에서 정권의 입김이 얼마나 크게 작용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또 "만약 정권이 교체된다면 부실수사 논란을 빚은 저축은행 영업정지 사태를 시작으로 낙하산·보은인사 논란이 더 확대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금융권 관계자도 "특정 지역과 학연으로 엉킨 사람들이 서로 밀고 당겨주기를 반복하고 있다"면서 "고객들의 소중한 자산을 지켜주고 안전하게 운용해 나가야 할 곳이 누군가의 놀이터가 되고 있는 느낌"이라고 지적했다.
정치권에서도 못마땅한 것은 마찬가지다. 여당의 한 관계자는 "가뜩이나 저축은행 부실사태로 금융권의 신뢰가 뚝 떨어졌는데 이제는 금융지주 수장들이 대부분 특정지역과 학연으로 엉켜있다"면서 "현 정권이 민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야당의 한 관계자도 "금융권은 예전부터 정부와 가까운 인사가 좋은 자리를 다 꿰찬다며 말이 많았다.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농협금융 회장은 현 정권과 무관한 사람을 선임해야 했다"면서 "만약 보은인사에 따른 부작용이 발생하기라도 한다면 모든 책임은 또 다시 국민들에게 전가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TK 몰아낸 PK 권력?
최근 금융권의 PK 권력이 부상하면서 그동안 실세(?)로 통하던 TK(대구·경북) 출신들은 상대적으로 위축된 양상이다. 실제로 라응찬 전 신한지주 회장(경북 상주)이 2010년 10월 사퇴한 이래 TK출신 금융지주 회장은 단 한명도 나오지 못했다. 2008년 라 전회장과 황영기 전 KB금융 회장(경북 영덕)이 포진돼 있을 때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TK 출신이 위축된 셈이다.
그나마 금융권에서는 권혁세 금융감독원장(대구)과 이순우 우리은행장(경북 경주), 서진원 신한은행장(경북 영천), 조준희 기업은행장(경북 상주), 안택수 신용보증기금 이사장(경북 예천) 등이 TK 인맥으로 자리잡고 있는 정도다.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권 수장들의 권력이 과거 TK에서 PK출신으로 이동한 것은 맞다"면서 "이는 요직을 맡은 일부 PK 출신 인사들이 자신의 라인에 맞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현 정권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일부 특정 인사들이 서로 밀고 끌어주는 배려(?)가 금융권에서도 심한 것 같다"면서 "과연 이들의 임기가 정권이 교체된 이후에도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고 꼬집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3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