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은 대형 보안사고로 '멘붕'에 빠진 금융권이 보안전문가 영입에 혈안이 됐다. 금융당국이 최근 발표한 '개인정보 유출 재발방지 종합대책' 등을 통해 CIO(최고정보책임자)가 CISO(정보보호최고책임자)를 겸임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IT업무와 보안업무간 충돌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금융사들로서는 CIO·CISO를 하루빨리 모셔와야 하는 상황. 특히 이들이 인재를 찾기 위해 보안시장으로 눈을 돌리면서 고급 보안인력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반면 보안업체들은 인재유출 우려로 고민이 많다. 연간 1000만원을 투자해 키워놓은 인재를 금융권이 고액 연봉을 무기로 뺏어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보안 핵심 능력을 갖춘 인재가 스펙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국내에서 외면받고, 본인의 능력을 인정해주는 외국으로 떠나는 씁쓸한 장면도 목격된다. 사고가 터져야 뒤늦게 인재 찾기에 혈안이 되는 이 사회의 문제는 과연 무엇이고, 대안은 없는지 짚어봤다.
글로벌 정보기술(IT)업체인 A사 말레이시아 지부에는 친숙한 얼굴이 한명 있다.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며 직원들에게 이것저것을 지시하는가 하면, 어느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열심히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한국인 지영철(37·가명)씨. 그는 국내 S사 하청업체에 근무하다 '학벌사회'가 싫어 떠난 이들 중 한명이다.
지씨는 웬만한 기관과 회사 등의 사이트를 해킹해도 들키지 않을 정도로 출중한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지방의 모 전문대 소프트웨어(S/W)학과 졸업이 최종학력인 그에게 조국은 기회를 주지 않았다. 자신보다 실력은 없어도 좋은 대학·대학원 등을 나온 '학벌'들에게 밀려 허드렛일을 하느라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길은 해외취업이었다.
"한국은 좋은 대학 출신이 아니면 기회가 없습니다. 언어장벽으로 인해 취업이 쉽지 않고 특별히 많은 월급을 받지 못한다 해도 나를 인정해주는 곳에서 일하고 싶었습니다."
전화로 인터뷰에 응한 지씨는 한국사회에 대한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말레이시아로 떠나기 전 S사 하청업체 보안담당으로 근무한 그는 학벌사회가 주는 불합리함과 격무에 시달렸던 경험을 털어놨다.
"비정규직으로 S사에 입사해 연봉 1800만원을 받으면서 매일 3교대 근무를 했습니다. 컴퓨터에 대한 실무능력도 없으면서 좋은 대학 나왔다는 이유로 으스대는 본사 직원들과 한국사회의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컴퓨터에 대한 열정과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한국 땅이 그에게는 야속할 뿐이었다. 지씨는 한국의 부모님과 누나가 마음에 걸렸지만 영구 이주를 꿈꾸며 해외로 나갔다. 어렸을 때부터 재미로 실력을 쌓은 그에게 해외취업은 수월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아일랜드와 말레이시아 등에 원서를 넣었다. 면접을 보기 위해 날아간 그곳은 학벌로 인한 차별이 없는 기회의 땅이었다. 면접을 통해 그의 S/W에 대한 실무적 능력을 본 그곳 회사들은 당장 계약할 것을 원했고 한국보다 높은 연봉과 집, 그리고 일정기간 동안의 통역까지 보장해준다며 서로 데려가고 싶어 했다. 여러 상황을 고려한 그는 A사의 말레이시아 지부를 택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더 높은 직책과 함께 연봉도 덩달아 올랐다. 한국사회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셈이다.
이처럼 이곳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지씨에게 몇해 전부터 여러 나라 기업들이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물론 그 안에는 한국 기업도 있다. 그에게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지씨는 "마음은 한국에 가고 싶지만 머리가 허락을 안 한다. 실력보다는 학벌과 획일적인 기업문화에 적응해야 하는 한국은 일종의 경제 식민지"라며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에게 있어 한국은 '기회의 땅'이 아닌 '기회를 빼앗는 땅'이란 생각이 자리 잡은 것이다.
이처럼 한국사회가 학벌문화에 젖어 숨어있는 인력을 다른 나라에 빼앗기고 있는 사이 해외 각국은 IT분야의 고급 인재들을 모시기 위해 파격적인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중국은 2009년부터 '천인계획'을 시행하고 있다. 취약한 IT산업을 강화하기 위해 해외인재를 유치하는 정책이다. 해외 IT인재 영입 시 의료보험과 퇴직금을 비롯해 가족에게 '외국인 영구거류증'까지 제공한다. 이 같은 지원으로 지난 3년간 2000여명의 해외거주 IT인재를 유치했다.
이스라엘 역시 2011년부터 우수 IT인력을 유치하기 위해 연간 12만달러(1억3000만원)의 연구보조비를 지급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밖에 미국, 프랑스, 스위스 등도 해외에 있는 IT고급인재 모시기에 나서고 있다.
이들 나라가 고급 IT분야 인재 유치에 적극적인 이유는 이 분야의 중요성이 날로 강조되면서 고급 인재 유치가 어려워지고 있어서다. 또 자체 인력양성 정책을 통해 고급 인재를 육성하려면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점도 작용했다.
이 같은 세계적인 흐름과 달리 우리나라의 해외 IT인재 유치를 위한 움직임은 거의 없고 오히려 뒷걸음질치고 있다. 우리나라의 사회·기업문화가 학벌을 우선시하다보니 숨은 인재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IT 코리아'
우리나라는 IT강국으로 알려져 있다. 국민들도 IT에 관한 한 우리가 어느 나라보다도 앞서 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최근 발생한 KB국민·롯데·NH농협카드의 대규모 고객정보 유출사고와 매년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사이버테러에 대한 미흡한 대응 등으로 현재 우리나라는 IT강국으로서의 위상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특히 보안이 생명인 금융권에서의 사고는 우리사회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에 금융당국과 금융권들은 부랴부랴 대책마련에 나섰다. IT전문인력 확보에 혈안이 돼 다른 기업의 인재들까지 빼오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국내 사정에 대해 지씨는 안타까워했다. IT강국으로서의 위상이 떨어진 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한국사회가 만들어낸 병폐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컴퓨터가 좋아서 뜯고, 조립하고, 즐기며 자신의 모든 시간과 열정을 투자해 노력해온 사람과 공부를 잘해 좋은 대학에서 뒤늦게 배우기 시작한 사람 중 누가 더 실무에 강하겠습니까. 우리나라는 이 같은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다시 IT강국으로 올라서기 힘들 겁니다."
지씨의 말처럼 우리사회가 만든 불합리성, 학벌과 같은 겉모습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사회 병폐는 숨어있는 우수한 인재로 하여금 이 나라를 떠나서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만들고 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2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