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급락, 4%대 급락, 5년5개월 만에 최저’. 국제유가 얘기다.

국제유가가 최근 바닥을 모른 채 급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1월 인도분 선물가격은 배럴당 50달러선에 진입했다.

이로 인해 미국의 휘발유가격도 큰 폭으로 하락해 1갤런(약 3.78리터)당 1달러 시대가 조만간 열릴 전망이다. 석유 생산지역인 미 오클라호마주와 텍사스주의 일부 주유소는 최근 한시적으로 휘발유를 1갤런당 1.99달러에 팔고 있다. 1리터당 우리 돈으로 약 580원인 셈이다.

마켓워치 등 주요 외신들은 휘발유 관련 세금이 낮은 미국 8개주의 기름값이 몇달 안에 1갤런당 1달러대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보도했다. 8개 주는 미시시피, 텍사스, 알라바마, 루이지애나, 오클라호마, 사우스 캐롤라이나, 미주리, 테네시 주다. 기자가 사는 뉴저지주의 기름값도 최근 1갤런당 2.4달러 수준으로 떨어졌다.

미국 전역의 평균 휘발유가격은 지난 7일(이하 현지시간) 현재 1갤런당 2.72달러(1ℓ당 약 800원)로 2주 전보다 약 12센트 하락했다. 이는 올해 정점을 찍은 지난 6월보다 1달러 가까이 낮아진 것이다.

유가하락은 통상 소비증가로 이어진다. 휘발유가격 하락은 소비자들의 소비지출 여력을 그만큼 높여주기 때문이다. 미국처럼 자동차를 이용하는 소비자가 많을수록 휘발유가격 하락은 소비지출 확대로 연결된다. 이 때문에 미국경제와 뉴욕증시는 저유가에 대한 기대가 컸다. 저유가로 연말 소비가 급증할 것이고 이는 경제와 증시에 호재가 될 것으로 전망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기류가 변하고 있다. 유가급락에 대한 기대보다 우려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경제 부진이 유가약세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사상 최고 행진을 이어가던 다우와 S&P500지수도 지난 8일부터 10일까지 사흘 연속 하락하며 한달 만에 최저수준으로 떨어졌다. 저유가가 증시 랠리의 촉매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했던 투자자들은 유가하락이 시장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하는 실정이다.

월가에서는 ‘유가하락은 양날의 검과 같다’고 표현한다. 유가하락은 에너지 관련 기업들에게는 악재지만 소비자에게는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앞으로 유가약세가 경제와 증시에 약이 될지, 아니면 독이 될지에 관심이 모인다.

◆ 석유전쟁에 6개월 새 반토막 난 유가

전세계 석유생산량의 약 40%를 차지하는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지난달 27일 감산 합의에 실패하면서 유가하락세는 더욱 가팔라졌다. 지금부터 불과 6개월 전인 지난 6월12일 서부텍사스원유(WTI) 선물가격은 배럴당 106.53달러까지 치솟았다. 이라크 등 지정학적 불안정이 고조됐기 탓이다.

그러나 이후 하락세로 돌아서 OPEC의 감산 합의 실패 직후 배럴당 70달러선이 무너졌고 지난 11일에는 배럴당 59.95달러까지 떨어졌다. 이는 지난 2009년 7월 이후 5년5개월 만에 최저다. 지난 6개월 동안 43% 급락하며 배럴당 50달러선에 진입한 것이다. 북해산 브렌트유도 지난 11일 5년5개월 만에 최저인 배럴당 63.68달러에 거래됐다.

유가의 이 같은 급락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영향을 미쳤지만 에너지 패권을 둘러싼 산유국들의 보이지 않는 전쟁이 주요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글로벌경제 부진으로 원유수요가 감소했음에도 에너지 패권을 지키기 위해 중동 등 산유국들이 의도적으로 공급을 늘린 게 유가급락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미국이 셰일오일 개발에 적극 나서면서 미국의 원유생산량이 급증했는데 이는 최대 원유생산국인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국가에 위협이 됐다. 이에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이 추진 중인 다수의 신규 시추프로젝트가 수익악화로 중단되기를 바라면서 유가하락을 방치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미국의 석유업체들이 최근 신규 개발프로젝트 투자를 줄였지만 내년 상반기까지 계획된 것을 갑자기 감축하기는 힘들어 공급과잉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존 킬더프 어게인캐피탈 애널리스트는 “유가하락에 공급이 즉각 대응할 수는 없고 시간이 걸린다”며 “생산증가세를 내년까지 줄이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모건스탠리는 최근 내년 브렌트유 평균 전망치를 종전 배럴당 98달러에서 70달러로 대폭 하향조정하면서 내년 하반기 브렌트유가격이 배럴당 43달러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OPEC는 지난 10일 월간 보고서를 통해 내년 전세계 원유수요가 하루 2890만배럴로, 올해의 하루 2940만 배럴보다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중국과 일본, 유럽 등 주요국의 성장이 둔화되는 데다 미국 셰일가스 개발 여파로 원유수요가 줄어들 것이라는 게 OPEC의 판단이다.

◆ 유가약세, 美 소비증가 기여 vs 시장 불확실성 커져

유가약세는 미국의 소비증가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시장조사업체 IHS에 따르면 휘발유가격이 지난 1년간 1달러 가까이 하락함에 따라 올해 미국인들의 1인당 연평균 가처분소득은 500달러 늘어날 것으로 분석됐다.

글로벌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는 미국 내 에너지가격이 하락하면서 1250억달러 규모의 소비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분석했다. 기름값 지출부담이 줄어든 가계가 자동차나 다른 물품을 사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 미국 제너럴모터스(GM)의 11월 판매가 7년 만에 최대를 기록하는 등 대형 자동차업체들의 11월 판매실적이 호조세를 보였다.

반면 유가하락에 따른 석유업계의 투자위축으로 미국 GDP(국내총생산)가 일정부분 위축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석유업계의 대규모 에너지 붐에 힘입어 미국 GDP가 0.3~0.6%포인트 상승한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석유업계의 대규모 투자가 주춤할 경우 GDP가 0.5%포인트가량 하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월가는 유가약세가 소비자에게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면서도 유가하락에 따른 시장 불확실성을 우려한다. 또 4분기 경제성장률과 연말 소비지표를 봐야 유가약세의 영향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글로벌 어드바이저스의 전략가인 톰 리는 “미국경제는 올해 강한 회복력을 보여줬다”며 “낮은 휘발유가격이 지속적인 회복을 지원할 것이고 이로 인해 증시랠리는 내년에도 이어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반면 폴 젬스키 보야인베스트먼트 매니지먼트의 투자전략 대표는 “유가급락이 시장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며 “휘발유가격 하락은 소비자에게 이익이지만 이는 나중의 일이며 지금 시장에선 두려움이 크다”고 밝혔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6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