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중견 상장사 재무팀은 지난주 자사주 대장을 새로 만들었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무슨 목적으로 샀는지에 따라 칸을 나눴다. 지난해까지는 총액 한 줄이면 충분했던 표다. 취득 시기와 방식에 따라 소각 시한이 달라지면서 관리해야 할 항목도 늘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소각할 물량, 주주총회 승인을 받아 보유할 물량, 시한 전에 처분할 물량을 나눴다. 경영권 방어용으로 묶어두던 물량을 어느 칸에 넣을지는 정하지 못했다. 지난해까지 자사주는 사두면 끝나는 결정이었다면 이제는 취득 이후 계획까지 정해야 하는 안건이 됐다.
기준은 지난 3월6일 공포와 동시에 시행된 3차 개정 상법이다. 회사가 새로 취득하는 자기주식은 취득일부터 1년 안에 소각하는 것이 원칙이 됐다. 시행 전부터 보유하던 자사주도 예외가 아니다. 6개월의 유예가 끝나는 9월6일부터 1년 안, 법 시행일을 기준으로는 1년6개월 안에 소각을 마쳐야 한다.
기산점이 다른 물량도 있다. 질권이 설정됐던 주식은 해제일부터 교환·상환사채에 걸린 주식은 채권 소멸일부터 각각 1년이다. 임직원 보상이나 경영상 목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는 회사는 자기주식 보유처분계획을 만들어 매년 주주총회 승인을 받으면 예외적으로 보유하거나 처분할 수 있다.
이번 개정으로 자사주는 취득 이후 활용 계획까지 관리해야 하는 대상이 됐다. 소각은 발행주식 수를 줄여 남은 주식 한 주의 몫을 키우는 대표적인 주주환원 수단이다.
활용 범위도 좁아졌다. 의결권과 배당권 등 자사주의 권리가 전면 제한되고 담보 제공과 질권 설정도 금지됐다. 자사주를 담보로 한 대출이나 교환사채 발행처럼 변칙적 자금 조달에 활용하던 길도 막혔다.
부담이 집중되는 곳은 자사주를 우호지분 관리 수단으로 활용해 온 기업이다. 자사주는 그 자체로 의결권이 없지만 우호세력에 넘기는 순간 의결권이 되살아난다.
2003년 영국 헤지펀드 소버린이 SK를 공격했을 때 SK는 보유 자사주 10.41% 가운데 4.5%가량을 하나은행과 신한은행 등 우호세력에 넘겨 방어에 성공했다. 2015년 삼성물산은 미국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이 제일모직과의 합병에 반대하자 자사주 5.76%를 백기사인 KCC에 매각해 찬성표를 확보했다. 법원은 두 건 모두 적법하다고 판단했다.
지금은 같은 카드를 같은 방식으로 꺼내기 어렵다. 취득한 자사주는 1년 내 소각이 원칙이어서 공격이 시작된 뒤 물량을 확보해 백기사에게 넘기는 방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미리 보유하려면 경영상 목적을 정관에 규정하고 매년 주주총회 승인을 받아야 한다. 방어 계획을 주주 앞에 공개하고 표결에 부치는 셈이다.
재계는 그동안 기업 재편 과정 등에 불가피하게 보유한 자사주는 의무 소각 대상에서 제외해 달라고 요구해 왔다. 자사주를 대신할 경영권 방어 수단이 마련되지 않은 채 기존 수단만 사라졌다는 주장이다. 대주주 지분율이 낮은 중소·벤처 상장사가 적대적 인수합병에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도 뒤따른다.
경제계는 지난 2월 3차 상법 개정안 통과 직후 "이번 개정이 주주가치 제고와 자본시장 선진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인수합병(M&A) 등의 과정에서 취득한 특정 목적 자사주 문제는 향후 추가 논의를 통해 보완되길 바란다"고 밝힌 바 있다.
자사주는 노사와 주주, 투자 재원 등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성과급 일부를 자사주로 지급하는 방안이 대기업 노사 협상에서 논의되고 있기도 하다. 임직원 보상 목적의 보유는 예외 사유에 해당하지만 해마다 주총 문턱을 넘어야 한다. 보상 설계도 이사회와 주총 일정에 묶이게 됐다.
기업들은 자사주 현황을 점검하느라 분주하다. 취득 형태별·시기별로 물량을 나눠 시한부터 확정해야 한다. 이어 소각·보유·처분 가운데 방침을 정하고 보유를 택한 물량은 보유처분계획의 주총 승인 일정을 잡아야 한다. 경영상 목적의 보유는 주주총회 특별결의로 정관에 사유를 규정해야 가능하다. 내년 정기주총을 기준으로 역산하면 정관 개정 준비는 올해 안에 시작해야 한다.
중견기업 관계자는 "자사주는 기업이 필요에 따라 소각하거나 경영권 방어, 임직원 보상 등에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며 "이제는 활용할 때마다 주주 승인을 거쳐야 해 기업의 선택지가 상당히 좁아졌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