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회사에서 근무하는 김모씨(27‧남)는 요즘 아이돌 안무 연습에 한창이다. 회사 송년파티에서 선보일 장기자랑을 위해서다. 김씨 회사는 연말마다 부서별 댄스 경연대회를 개최한다. 20대 신입사원부터 40대 과장까지 총출동하는 자리다. 김씨는 “작년엔 여장을 하고 브레이크 댄스를 췄다”며 “연습실 대관, 소품 대여 등 사비까지 들여가며 준비하는데 대체 누구를 위한 댄스파티인지 모르겠다. 그 파티를 즐기는 건 오로지 대표뿐이다”고 토로했다.
본격적인 송년회 시즌이 다가왔다. 송년회는 한해를 돌아보고 회포를 푸는 자리지만 직장인들은 오히려 스트레스를 호소한다. 술자리 중심의 송년회로 인해 몸과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이다. 직장인들은 송년 술자리에서 오가는 폭탄주와 건배사의 압박에 시달린다. 게다가 최근엔 이색 송년회를 선호하는 경향이 늘면서 직장인들이 아이디어를 짜느라 골머리다. 대다수 직장인들은 송년회를 불편해 한다. 취업포털 인크루트와 설문조사 플랫폼 두잇서베이가 패널 3057명을 대상으로 한 ‘2018 송년회 설문조사’에 따르면 성인남녀 10명 중 6명은 송년회가 불편하다고 밝혔다. 그 이유로는 ▲불편한 분위기 ▲음주강요 등이 꼽혔다. ▲장기자랑 ▲사내정치 거부감 ▲멘트준비 부담 등의 이유도 눈길을 끌었다.
/사진=이미지투데이 ◆송년회가 고역인 직장인들
포털사이트에 ‘송년회’를 검색하면 ‘송년회 건배사’, ‘송년회 이벤트’, ‘송년회 게임’ 등이 연관 검색어로 뜬다. 송년회를 앞둔 직장인들의 고민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건배사는 매년 직장인을 괴롭히는 송년회 단골 아이템이다. 참신한 건배사를 해야 센스 있는 인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한 대기업 신입사원 김모씨(25‧여)는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 건배사를 고민 중”이라며 “다들 아는 건배사를 하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고 말했다.
참신함을 요구하다보니 건배사는 매년 진화한다. 재작년에는 국정농단 사태 주인공들이 줄줄이 술자리에 소환됐다. ‘최순실(최대한 마시자/순순히 마시자/실려갈 때까지 마시자)’, ‘장시호(장소 불문/시간 불문/호탕하게 마시자)’ 등이 대표적이다. 작년에는 유행어를 활용한 ‘내년에도 그레잇(Great·위대한)’ 등의 건배사가 인기를 끌었다.
/그래픽=뉴스1 DB 장기자랑도 직장인들을 괴롭힌다. 경기도에서 근무하는 은행원 김모씨(27‧여)는 “송년회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의무적으로 장기자랑을 해야 한다”며 “작년에는 한 직원이 노래하는데 상사가 ‘일부러 못하는 거냐. 술 맛 떨어진다’며 중지시키는 일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일부 직장인들은 장기자랑을 위해 댄스학원을 방문하기도 한다. 광화문이나 강남 등 오피스상권에 위치한 댄스학원은 1인당 8만~10만원의 비용을 지불하면 속성으로 노래 한곡의 춤을 가르쳐준다. 또 무대의상이나 분장, 여장 등을 위해 사비를 지출하는 경우도 있다.
송년회 장기자랑은 반강제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지난해 직장인 341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 61.9%가 장기자랑에 참가한 적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중 74.5%는 반강제적으로 참가했다고 답했으며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사람은 11.8%에 불과했다. 특히 지난해에는 한림대 성심병원 간호사들이 선정적인 의상을 입고 춤을 강요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직 내 장기자랑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래픽=머니투데이 DB ◆송년회, 없애거나 줄이거나
송년회를 꺼리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새로운 문화도 등장했다. 술 없이 저녁만 먹고 곧장 헤어지는 송년회부터 점심 송년회, 브런치 송년회 등이 생겼다. SPC그룹, 신세계백화점 등은 몇년 전부터 점심 송년회를 치르고 있다. 영화나 공연을 즐기는 ‘문화 송년회’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장르는 영화와 뮤지컬, 연극, 클래식, 발레 등으로 다양하다. 기업 측의 수요가 늘자 일부 공연장은 기존 공연 외에 별도의 공연 기획, 연주자 섭외 등의 서비스도 제공한다.
한 공연계 관계자는 “연말을 앞두고 기업별 단체관람 문의가 끊이지 않고 있다”며 “소모적인 술자리 대신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송년회가 직장인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고 설명했다.
송년회를 아예 없애는 회사도 있다. 올해 ‘주 52시간 근로제’의 시행으로 워라밸(Work-life balance‧일과 생활의 균형)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결과다. 한 금융사 관계자는 “올해는 송년회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며 “저녁에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워라밸을 침해한다는 의견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게다가 올 초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의 영향으로 직장 내 성희롱이 사회문제로 대두된 점도 영향을 끼쳤다. 여성가족부의 ‘2015 성희롱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성희롱 피해 경험이 있는 남녀 직장인 500명 중 39.8%가 상급자로부터 성희롱을 당했고 여성 직장인(440명)의 46.7%는 회식 자리에서 이런 일을 겪었다고 답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