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경제인연합회가 이순(耳順)의 나이가 됐다. 수십년 동안 국내 고도성장기에 재계의 맏형으로서 경제·산업 발전 청사진을 제시하고 때로는 정치권에 쓴소리도 주저하지 않았다. ‘정경유착의 진원지’라거나 ‘재벌들의 사교장’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존립 자체가 흔들리는 위기도 맞이했다. 60년 역사의 전경련이 공과를 안고 있으면서 기업 이익 증대와 국민 신뢰 회복을 위해 현 상황을 어떻게 돌파해나갈지 주목된다.
한강의 기적 중추 역할
전경련은 지난 60년 동안 경제발전의 한쪽 수레바퀴를 담당하며 국내 경제·산업 성장을 이끌었다. 창립 첫해 경제 재건에 필요한 재원 조달을 위한 민간 외자 도입 교섭단을 미국과 유럽에 파견하며 민간 경제 협력에 발을 디뎠고 시멘트·제철·화학·자동차 등 10개 분야 ‘기간산업 건설 계획안’을 내놨다. 울산공업단지와 수출산업공단, 종합무역상사 설립 등을 정부에 건의하며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정부가 은행 민영화를 시도하고 1980년대에는 노동운동이 격화하자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를 구성해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대응했다. 1990년대부터 반기업 정서가 커지자 ‘사회공헌위원회’를 구성하는가 하면 경상이익의 1% 이상을 사회공헌 활동에 쓰는 ‘1% 클럽’을 발족하기도 했다.
이밖에 ▲민간개발 금융기구인 한국개발금융 창립 ▲특허청 설립 건의 ▲의료보험연합회창립 ▲정보산업협회 창립 ▲주식 대중화 건의 ▲중소기업 창업 지원을 위한 한국창업투자 설립 등 크고 작은 일들을 해냈다.
최준선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과거 전경련은 전경련·대한상공회의소·한국경영자총협회·한국상장회사협의회·코스닥협회·한국중견기업연합회 등 6대 재계 단체 중에서도 맏이 역할을 했다”며 “경총이 노사 관계 중심에서 기업 목소리를 대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대한상의도 입김이 세졌지만 전경련 네트워크와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의 연구기능은 뛰어넘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경련은 장기간에 걸쳐 해외 네트워크도 촘촘히 구축했다. 전경련이 1982년부터 일본 게이단렌(일본경제단체연합회)과 개최해온 한일재계회의 같은 민간 교류는 대체 불가능하다는 평가다. 세계경제단체연합과 아시아 비즈니스 서밋 등 국제회의체는 물론 30개가 넘는 국가와 경제협력위원회도 운영하고 있다.
전경련 관계자는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 오랫동안 각국 경제계 및 정치권 등과 교류해 오며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며 “국가 관계가 경색됐을 때나 무역협상이 필요할 때 민간 차원의 네트워크 자원은 윤활유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조동근 명지대 명예교수는 “경총은 노사 관계가 주 업무이며 대한상의는 법정단체로 전경련과는 역할이 다르다”며 “전경련이 지금까지 존재하는 이유”라고 평가했다.
“재벌 이익만 대변” 비판도
국내 기업이 성장한 것처럼 전경련의 조직도 커졌다. 연 매출 5000억원 이상이 돼야 회원자격이 주어진다. 전경련은 회원사들에게 매년 400억원의 회비를 걷었다. 5대 그룹이 절반 정도를 내다가 삼성·현대차·SK·LG가 탈퇴한 이후 회비는 100억원대로 줄었다.
이런 전경련의 구성은 말썽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전경련은 정치자금 제공이나 로비 활동 등을 통해 국내 중요한 경제조치에 직·간접으로 간여하며 재벌의 이익을 대변했다는 의혹을 끊임없이 받았다. ▲전두환 일해재단 자금 모음 ▲노태우 전 대통령 대선 비자금 제공 ▲불법 대선 자금 차떼기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2016년에는 국정농단 사태에서 미르와 K스포츠재단 설립을 위한 기업의 후원금 모금을 주도한 것으로 드러나며 홍역을 치렀다. 하지만 머지않은 과거에도 친정부 활동이 꽤 있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북한 현물 지원 사업을 주도했고 이명박 정부가 서민을 대상으로 했던 저리 대출 사업 전담 ‘미소금융재단’을 설립할 때도 앞장섰다. 박근혜 정부 당시 ‘청년희망펀드’ 추진에서도 주요 역할을 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박정희 정부는 기업 통제 수단으로서 전경련을 설립하고 유착을 통해 경제·산업을 발전시켰다”며 “현재는 정부 주도와 재벌 중심 발전에 한계가 왔고 전경련의 역작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재계 관계자는 “현 정부는 전경련 해체를 외쳤지만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며 “정경유착 끈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매출이 크거나 회비를 많이 내는 기업의 이익에만 집중했다는 회원사 불만도 나온다. 제조업 중심에서 최근 서비스와 IT 등 사업이 다변화하고 있고 ‘문어발식 경영’이 활발히 진행되는 만큼 기업별 중심이 아닌 업종별 대표가 주도하는 식으로 변화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다른 재계 관계자는 “(전경련은) 모든 기업을 대변했다기보단 큰 재벌을 위한 이익단체였다”며 “관련 위원회가 있지만 이름만 걸렸을 뿐 활동은 많지 않았고 상법 개정안 등 재계 이슈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회장 리스크 관리도 미흡했던 점으로 꼽힌다. 김우중 회장은 워크아웃에 들어간 대우를 살리기 위해 전경련 회장직을 방패 삼고 있다는 의혹을 받았다. 전문경영인 손길승 SK 회장은 정치자금 문제에 연루되는 등 두 회장 모두 불명예 퇴진했다.
재계에서는 전경련이 ‘수금 창구’가 돼 정경유착의 끈을 유지해온 지금과 같은 구조는 반드시 개혁돼야 한다고 보면서도 ‘기업 서포터’의 필요성을 동시에 주장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다음 10년에 걸맞은 역할을 찾아야 한다”며 “사회적 여론을 살피고 의견을 수렴해 그동안 펼친 사회공헌 활동을 인정받아야 한다. 대기업 그룹의 독주를 막고 중견업체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줘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