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튜브에서 빌 게이츠와 일론 머스크가 대중을 대하는 온도 차를 비교한 영상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촬영자가 여러 번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걸어도 게이츠는 빠른 걸음으로 제 갈 길을 갔다. 머스크는 달랐다. 질문을 받자 걸음을 멈추고 카메라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어지는 질문에도 성의 있게 답했다.
기자 입장에서는 머스크 같은 오너가 반갑다. 현장에서 만나면 웃으며 인사하고 어떤 질문에도 답해주는 경영자는 좋은 취재원이다. 언론에 자주 얼굴을 내비치고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소위 약간의 '관종기'까지 있다면 더 좋다.
산업부 기자로 기업을 오래 들여다보면 좋은 취재원과 좋은 경영자는 다른 문제라는 걸 알게 된다. 적절한 전략과 판단으로 매출과 이익을 키우고 이를 재투자해 기업가치를 높이는 것. 이것이야말로 경영자의 본업이다.
정유경 신세계 회장은 은둔의 경영자로 불린다. 인터뷰는커녕 파파라치 컷도 드물다. 회장 승진 이후 열린 첫 정기주주총회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아 주주와 기자들을 서운하게 했다. 등기이사가 아니라는 이유가 있었지만 아쉬움은 남았다.
그의 경영 성적표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은 2019년 국내 백화점 최초로 연매출 2조원을 넘겼고 2023년 단일 점포 최초로 3조원을 돌파했다. 지난해까지 3년 연속 3조원대를 기록했고 올해는 4조원을 바라본다. 비교 대상은 이제 국내에 없다. 영국 런던 해러즈, 일본 도쿄 이세탄 신주쿠점이 경쟁 상대다. 한국 백화점이 글로벌 리그에 진입한 것이다.
그 자리에 오르는 데 12년이 걸렸다. 정 회장은 2014년 강남점 증축·리뉴얼을 시작으로 핵심 점포에 자금을 투입했다. 2016년 강남점 확장 개장 이후에도 식품관과 명품관을 다시 손봤다. 본점도 대대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본관과 신관, 옛 제일은행 본점 건물을 럭셔리 공간으로 재편했다. 명품과 VIP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짜고 외국인을 겨냥한 K콘텐츠를 접목했다.
그동안 분기마다 수익성 지적이 따라붙었다. 언론은 영업이익이 투자에 비해 적다고 비판했고 주주들은 원성을 냈다. 운도 따라주지 않았다. 코로나19가 왔고 내수는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정 회장은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여기서 짚어야 할 지점이 있다. 12년에 걸친 대규모 투자는 전문경영인의 영역이 아니다. 임기가 정해진 CEO가 먼 미래의 열매를 위해 영업 공간을 공사장으로 만들고 매 분기 실적을 깎아 먹는 결정을 밀어붙이기는 쉽지 않다. 이것은 오너의 영역이다. 글로벌 수준의 경쟁력을 갖고 싶다면 오너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정 회장은 그걸 해냈다.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는 '검객'이라는 시에서 '십년마일검'(十年磨一劍)이라 썼다. 10년 동안 칼 한 자루를 갈았다는 뜻이다. 서릿발 같은 칼날을 아직 시험해보지 못했다는 구절이 뒤에 따라붙는다. 정 회장의 12년이 그랬다.
외국인이 언제 얼마나 돌아올지 2014년에는 알 수 없었다. 올해 외국인 관광객이 늘면서 백화점 3사가 일제히 호실적을 거뒀다. 순풍은 셋 모두에게 똑같이 불었다. 신세계 백화점 부문은 2분기 매출이 15.5% 늘어 3사 가운데 성장세가 가장 가팔랐다. 매출 증가율보다 영업이익이 늘어난 폭은 더 컸다. 리뉴얼을 마친 점포가 이익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시장의 평가도 달라졌다. 지난해 초 13만원대까지 내려갔던 신세계 주가는 올해 6월18일 장중 79만원대까지 올라섰다. 이후 증시 전반이 흔들리며 백화점주도 조정을 받았지만 시장이 신세계를 보는 눈이 바뀌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신세계 강남점의 도약은 한 점포의 성과로 끝날 일이 아니다. 기준선이 올라가면 업계 전체가 따라 올라간다. 경쟁력 있는 브랜드 유치와 공간 혁신 등 대규모 투자는 백화점 3사의 공통 과제가 됐다. 외국인 관광객 매출이 사상 최대 기록을 경신하는 지금의 그림은 캠페인이나 프로모션 하나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먼저 글로벌 수준으로 점포를 끌어 올렸기에 가능했다.
주주와 소통하고 경영 전략을 설명하는 것은 여전히 오너의 중요한 책임이다. 그 생각은 지금도 같다. 다만 침묵을 비판했던 기자로서 그 침묵 뒤에 무엇이 있었는지도 함께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 회장은 여전히 말이 많지 않다. 대신 12년간 갈고닦은 신세계가 말하고 있다. 숫자보다 명쾌한 해명은 없다.

![[뉴스언팩] 지금 달러 사야 하나…환율 변동의 방정식 / 임신중지약 '미프진' 도입되나](https://i.ytimg.com/vi/rdwHE0omcGE/hqdefault.jpg?width=1920&quality=75)
.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