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키 찬(성룡)이요. 나랑 똑같이 생겼거든요. 다만 키보드에 타이핑하는 '스턴트 연기'는 내가 직접 할 생각이에요." 실리콘밸리 발상지인 캘리포니아주 팔로알토 'HP(휴렛패커드) 창고'에서 촬영된 온라인 토크쇼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한 말이다. 2023년 말 방영된 이 쇼에서 젠슨 황은 "당신 일대기를 다룬 자서전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어느 배우가 당신 역을 맡으면 좋겠나"라는 질문에 위트있게 답했다. 참고로 1963년 태어난 젠슨 황은 1954년생 성룡보다 9살 젊다.
중국계이자, 둥글둥글한 인상에 주먹코란 점 말고도 둘은 비슷한 점이 많다. 1970, 80년대 홍콩 영화 전성기에 코믹무협으로 아시아에서 성가를 높인 성룡은 1990년대 후반 헐리우드에 진출해 월드스타가 됐다. 대만 출신 이민자 2세 젠슨 황은 비디오게임용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인공지능(AI)에 적용해 세계 AI 가속기 시장을 독점한 AI 시대의 스타다. 둘 다 한국과 인연도 깊다. 성룡은 홍콩 무협영화를 한국에서 많이 찍던 1970년대 한국에 산 적이 있어 한국말을 곧잘 한다. 엔비디아가 중소기업이던 시절 젠슨 황은 'PC게임 종주국' 한국의 게이머들에게 GPU를 팔기 위해 용산 전자상가에 자주 왔다고 한다.
성룡의 공식 방한은 '폴리스 스토리 6' 홍보차 온 2014년이 마지막이었지만 젠슨 황의 공식 방한은 작년에 시작됐다. 지난해 10월 말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CEO 서밋'에 참석한 그는 이재명 대통령, 4대 그룹 총수와 만났다. 당시 최신 AI 가속기로 공급이 달리던 '블랙웰' 26만 장을 한국에 우선 공급하는 내용의 '한국 AI 이니셔티브'도 발표했다. 판매액만 20조 원이 넘는 규모였다. 검정 가죽재킷을 걸치고 서울 삼성동 '깐부치킨'에 등장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치맥회동을 한 젠슨 황에 한국인들은 환호했다.
엔비디아에 직접 투자한 '서학개미',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엔비디아에 공급하는 SK하이닉스, 삼성전자 주식을 보유한 '동학개미'들에게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관심거리가 됐다. 올해 6월 초 방한 때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과 홍대 앞 고깃집에서 삼겹살을 굽고 소줏잔을 기울이자 AI 팩토리, 피지컬 AI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이 고조됐다. 지난달 이 대통령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한 'AI서밋'의 핵심인물도 젠슨 황이었다.
아쉽게도 한국인의 '젠슨 황 환호 지수'와 코스피는 따로 움직였다. 작년 11월 초 APEC 정상회의 폐막 다음 거래일에 반짝 상승한 주가는 이후 이틀간 5% 넘게 하락했다. 2차 방한한 올해 6월 5일 코스피는 5% 넘게 내렸고, 한국을 떠난 8일엔 8% 넘게 빠졌다. 지난달 24일 샌프란시스코 AI 서밋에서 엔비디아 등 미국 빅테크와 한국 기업들의 9500억 달러(약 1350조 원) 투자협력 계획이 발표됐지만, 다음날 코스피는 11% 가까이 폭락하고 장중 한때 6,000선이 무너졌다. 매번 다른 돌발 악재가 있었다곤 해도 한국 주가에 미친 젠슨 황 효과는 신통치 않았던 셈이다.
요즘 글로벌 AI 시장에서 펼쳐지는 숨 가쁜 기업들의 움직임을 보면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오픈AI, 앤스로픽, 구글, 아마존, 메타(페이스북) 등 AI의 미래 패권을 다투는 기업들은 지금 천문학적 투자 비용을 대느라 허덕이는 중이다. 한두 곳만 살아남아 이익을 모두 챙기는 '승자독식 게임'이라 중단하기도 어렵다. 힘에 부쳐 먼저 기권하는 기업이 나오기 시작하면 엔비디아 AI 가속기 수요는 급감할 가능성이 있다.
'△△ 기업 돈줄이 말라 간다'는 월가 리포트 한 장에도 엔비디아 주가가 급락하고,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등 메모리반도체 주가 역시 덩달아 춤춘다. 비싼 엔비디아 GPU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빅테크들은 저렴한 자체개발 칩들을 속속 내놓고 있다. AI기업들이 엔비디아 칩을 계속 살 수 있도록 돈을 빌려주거나, 보증을 서주는 미심쩍은 '순환금융'에 엔비디아는 더 깊이 말려들고 있다. 금값이 된 메모리반도체 구입비용을 아끼려고 HBM을 절반만 쓰는 기술도 개발 중이라고 한다.
당연하게도, 젠슨 황은 한국 투자자, 반도체 기업에 조건 없이 혜택만 주는 '키다리 아저씨'가 아니다. 성룡이 과거 한국을 자주 찾았던 이유가 한국인에 대한 애정 때문만이 아니었던 거나 마찬가지다. 엔비디아 칩을 계속 사주도록 고객을 관리하고, 세계 최고 경쟁력의 메모리반도체를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것이 그가 한국에서 달성해야 할 목표일 것이다. 아직 2년 이상 뒤처졌지만, 빠르게 한국을 추격 중인 중국 창신메모리(CXMT)가 한국과 비슷한 제품을 반값에 팔 때에도 젠슨 황의 태도가 지금과 같길 기대하는 건 순진한 일이다. 미중 냉전의 틈새를 뚫고 중국 AI 시장에서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그의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을 향한 젠슨 황의 많은 약속과 애정 어린 메시지들을 이젠 좀 냉정하게 되짚어볼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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