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전기차 시장이 예상보다 더디게 개화하면서 배터리 업계가 투자 속도 조절에 나섰다. 전기차 시장 성장에 대한 불투명성이 확산되고 있지만 배터리업계는 전기차로의 전환 자체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데 이견이 없다.
17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글로벌 완성차 업계는 전기차 투자를 축소하거나 계획을 철회하고 있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은 지난해 중반부터 내년 중반까지 전기차 40만대를 생산하기로 했던 계획을 철회하고 미국 미시간주에 짓기로 한 전기차 전용공장 가동 시점도 1년 늦추기로 했다. 혼다와 2027년부터 보급형 저가 전기차를 만든다는 계획도 백지화했다.
폭스바겐그룹은 유럽 전기차 수요 둔화 전망을 고려해 동유럽 지역에 4번째 배터리 생산공장을 지으려던 계획을 연기하기로 했다. 포드 역시 전기차 투자액 중 120억달러(약 16조2600억원)를 축소한다고 발표했다.
완성차 업계가 투자를 축소하는 배경은 전기차 수요가 둔화하고 있어서다. SNE리서치는 글로벌 전기차 시장이 올해 상반기 예측한 1484만대에 비해 107만대 줄어든 1377만대로 전망된다고 하향조정했다.
고금리에 따른 경기침체 등의 여파로 중국과 유럽 등에서 성장세가 둔화하며 전기차 시장이 '캐즘'(Chasm·침투율 16% 부근에서 나타나는 일시적 수요 둔화) 영역에 진입했다는 설명이다. 높은 가격과 보조금 감축, 충전 인프라 부족 등이 소비심리를 위축하면서 전기차 수요 둔화는 내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완성차 업계의 투자 계획 조정에 따라 배터리 업계도 투자 완급 조절에 들어갔다.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포드, 튀르키예 기업 코치 3사가 신중한 논의 끝에 올해 초 튀르키예에 합작법인 설립을 위해 체결된 3자 양해각서(MOU)를 철회했다. 배터리셀 생산시설에 대한 투자를 지속하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는 점에 상호 동의했다는 설명이다. SK온도 켄터키 2공장 건설을 2026년 이후로 늦추기로 했다.
인력도 줄이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 미시간 법인은 일시적인 전기차 수요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일부 생산라인 합리화 작업의 일환으로 현장직 인력 약 170명을 정리해고하기로 했고 SK온 역시 미국 법인인 SK배터리아메리카(SKBA)도 조지아주 생산공장 가동률을 조정하기 위해 생산 근로자를 대상으로 무급휴직 조치를 실시하기로 했다.
전기차 시장에 대한 부정적인 지표가 나타나고 있지만 관련 업계는 향후 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보고 있다. 배터리업계 관계자는 "최근 전기차 시장 수요가 당초 기대했던 것에 미치지 못할 뿐 성장률은 마이너스로 돌아선 게 아니라 지속 상승하고 있다"며 "전기차 시장 자체는 꾸준히 성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SNE리서치 관계자도 "현재는 경쟁이 과열된 시기를 지나 잠시 숨 고르기를 하는 단계이며 중장기적으로 전기차 시장 성장세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예상했다.
한국배터리산업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권영수 LG에너지솔루션 부회장도 최근 "배터리 사업은 마라톤으로 치면 이제 4km 정도 뛴 것"이라며 "우리가 급히 성장하다보니 간과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다지는 해가 되면 K-배터리가 한 번 더 도약할 수 있는 시기가 분명히 올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