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그룹이 글로벌 인공지능(AI) 생태계를 선도하고 있는 엔비디아의 핵심 파트너로 급부상했다. 과거 그룹의 유동성 위기를 거치며 중공업에 치중됐던 사업구조를 탈피해 '에너지·로봇·반도체' 등 3대 신사업을 중심으로 체질개선을 주도한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의 전략적 판단이 결실로 이어지고 있다는 평가다.
2일 재계에 따르면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오는 5일 한국을 찾는다. 지난해 10월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이후 8개월 만의 방한이다.
황 CEO는 주요그룹 총수들과 회동할 것으로 알려졌으며 박정원 두산 회장과도 만날 예정이다. 두산그룹과 엔비디아가 현재 주요 사업부문에서 긴밀한 협력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양사 경영진의 만남을 계기로 두 기업 간 동맹이 더욱 두터워질 것이란 관측이다.
황 CEO는 방한 기간 서울 잠실야구장을 찾아 두산 베어스 홈경기의 시구자로 나설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두산과의 관계가 단순 사업 파트너를 넘어 끈끈한 '깐부'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 될 것이란 게 재계의 예상이다.
배경에는 박정원 회장이 주도해온 두산그룹의 체질개선이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다. 박 회장은 지난 2016년 그룹 회장직에 오른 이후 중공업과 건설 등에 치우쳐 있던 그룹의 포트폴리오를 에너지, 로봇, 반도체 소부장 등 미래지향적 3대 신사업 중심으로 과감하게 재편해왔다.
그룹이 최악의 유동성 위기를 겪으며 주요 계열사와 자산을 매각하는 대규모 구조조정 속에서도 미래를 위한 투자는 지속했다.
취임 첫해 연료전지·협동로봇을 신성장동력의 승부처로 낙점하고 두산퓨얼셀과 두산로보틱스에 과감한 투자를 단행했다. 이를 기반으로 현재 두산퓨얼셀은 수소를 이용한 발전용 연료전지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두산로보틱스는 2018년부터 줄곧 국내 협동로봇 시장 점유율 1위 자리에 있으며 글로벌 협동로봇 업계 톱5에 진입했다.
반도체 분야에선 2022년 후공정 테스트 기업 테스나를 인수했고, 연내 웨이퍼 전문 제조기업 SK실트론 인수까지 마무리 지으면 반도체 전·후공정을 아우르는 소재 밸류체인 수직 계열화를 구축하게 된다.
이를 통해 소재부터 로보틱스에 이르기까지 AI 하드웨어 공급망 전 주기에 걸친 포트폴리오를 완성, 엔비디아가 추진하는 AI 생태계 구축의 핵심 파트너로 입지를 더욱 굳건히 할 것이란 관측이다.
두산은 이미 반도체 핵심 소재 영역에서 엔비디아 핵심 공급망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두산그룹 내 전자BG 부문은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가속기인 '블랙웰' 시리즈에 하이엔드 동박적층판(CCL)을 공급 중이며, 수요 증가에 선제 대응해 2028년까지 1800억원을 들여 태국에 하이엔드 CCL 생산공장을 구축하기로 했다. 전세계 CCL 생산 1위 기업인 대만 EMC가 엔비디아 납품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두산의 독점적인 지위가 점차 공고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후공정 부문에선 두산테스나가 엔비디아의 언어처리장치(LPU) '그록3' 웨이퍼 테스트 물량을 수주하며 사업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양사 협력 전선 중 가장 주목받는 분야는 '피지컬 AI'이다. 지난해 박정원 회장의 동생인 박지원 두산그룹 부회장 등 회사 수뇌부가 미국 엔비디아 방문한 데 이어 올해 4월 젠슨 황 CEO의 딸인 매디슨 황 엔비디아 옴니버스 및 로보틱스 제품 마케팅 수석 이사가 성남 두산로보틱스 이노베이션센터를 찾아 피지컬 AI 협력을 구체화하고 있다.
현재 두산로보틱스는 엔비디아와 파트너십을 바탕으로 2027년까지 '에이전틱 로봇 O/S' 기반의 지능형 솔루션을 개발 중이며, 이를 고도화해 2028년에는 산업용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를 시장에 공개한다는 구체적인 로드맵을 가동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 위기 속에서도 미래 성장 동력에 대한 투자를 멈추지 않았던 박 회장의 뚝심이 오늘날 엔비디아라는 글로벌 선두 기업과의 독보적 협력 관계로 이어진 셈"이라고 평가했다.
추가 협력 확대도 기대된다. 엔비디아의 본업인 AI 가속기(GPU)를 구동하려면 막대한 전력과 이를 식힐 냉각 시스템이 필수적인데 두산그룹은 이미 두산에너빌리티와 두산퓨얼셀 등 두산의 에너지 솔루션을 통해 AI 데이터센터에 필수적인 전력 및 에너지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어 장기적인 인프라 협력 가능성도 열려 있어서다.
이나예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두산은 자체 사업인 CCL 외에도 그룹사 전반에 걸쳐 갖춰진 차세대 에너지 밸류체인과 로보틱스 중심의 포트폴리오 가치가 부각될 전망"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