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F리테일이 운영하는 편의점 CU에서 선보인 '스마트그로서리' 매장이 유통업계의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SSM(기업형 슈퍼마켓) 시장이 지각 변동을 맞은 가운데 신선식품과 생필품을 강화한 새로운 점포 모델로 장보기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는 모습이다. 이를 두고 단순한 매장 형태 변화가 아닌 변화한 소비 환경과 규제 체계를 동시에 반영한 전략적 실험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4일 업계에 따르면 CU가 최근 경기 수원 권선구에 오픈한 스마트그로서리 1호점은 소용량·근거리 소비 확산이라는 흐름 속에서 등장했다. 고물가와 1~2인 가구 증가로 대량 구매보다 필요한 만큼만 구매하는 소비 패턴이 확산하면서 집 근처에서 장을 보는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CU의 채소·과일 등 소용량 신선식품의 전년 대비 매출은 2024년 20.4%, 2025년 18.5% 증가했고 올해 1~4월 26.2% 늘어나며 성장세를 이어갔다.
이 같은 변화에 맞춰 CU는 기존 편의점의 기능을 확대했다. 스마트그로서리는 간편식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신선식품·냉동식품·생필품을 결합한 장보기형 점포다. 과거 동네 마트가 운영되던 부지에 들어선 1호점은 약 195㎡(59평) 규모로 일반 편의점(15~20평)의 3배 이상에 달한다. 상품 구성과 점포 크기 측면에서 사실상 동네 마트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셈이다.
CU는 1호점의 운영 성과와 효율성을 검토한 후 확대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이다. 단순한 출점 확대가 아니라 새로운 점포 모델로서 수익성과 고객 반응을 검증하는 단계로 장보기 시장 공략의 거점으로 활용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현재 약 110개 수준인 장보기 특화 점포를 500개 안팎까지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운영 방식 역시 주목된다. 업계에서는 스마트그로서리가 초기 단계에서는 본사 직영 중심으로 운영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신규 사업 모델은 일반적으로 직영점을 통해 상품 구성, 동선 설계, 고객 반응 등 데이터를 축적한 뒤 확산 여부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가맹 중심으로 양적 확대를 추구했던 기존 전략에서 벗어나 직영 기반으로 새로운 포맷을 시험하는 질적 확장 전략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스마트그로서리는 기존 편의점의 확장이 아니라 새로운 고객 수요를 겨냥한 모델"이라며 "초기에는 직영 중심으로 운영 데이터를 확보한 뒤 성과에 따라 확장 속도와 방식이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움직임이 최근 변화의 기로에 선 SSM 시장과도 맞물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커머스 성장과 소비 패턴 변화로 최근 수년간 성장 정체를 겪은 SSM 업계는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매각 추진을 계기로 재편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가운데 CU는 스마트그로서리를 앞세워 동네 마트와 SSM이 담당하던 근거리 장보기 수요 공략에 나서는 모습이다.
경쟁사들도 대응에 나서고 있다. GS25는 신선식품 강화 매장을 800여개까지 늘렸고 연내 1100개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이마트24는 PB 노브랜드를 통해 가격 경쟁력 중심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CU는 신선식품과 장보기 기능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마트형 편의점에 가까운 모델을 지향하고 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규제 형평성 문제를 제기한다. 현행 유통산업발전법상 대형마트와 SSM은 자정부터 오전 10시까지 영업이 제한되고 월 2회 의무휴업이 적용되는 등 각종 규제를 받고 있지만 편의점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영업이 가능하다. 다만 이를 변화한 소비자 수요에 대응한 사업 전략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기존 규제가 시장 환경 변화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이번 시도가 유통업계 구조 변화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대형마트는 대량 구매, SSM은 근거리 장보기, 편의점은 즉시 소비라는 기존 역할 구분이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 쇼핑과 새벽 배송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오프라인 유통은 근거리·즉시성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스마트그로서리는 편의점의 진화이자 유통 구조 변화의 실험장으로 평가된다. 규제 환경과 소비 트렌드가 맞물린 지점에서 등장한 이 모델이 향후 오프라인 유통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대형마트와 SSM, 편의점 간 역할 구분이 과거보다 흐려지고 있다"며 "돈보다 시간을 아끼려는 '머니 리치 타임 푸어'(Money Rich, Time Poor) 소비자가 늘어나면서 근거리 소비 수요가 커지는 상황"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업태 간 경계가 허물어지고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편의점이 장보기 시장까지 사업 영역을 확대하는 흐름은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