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항의하며 개표소 봉쇄 시위를 이어가는 시민들이 지난 6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에 설치된 개표소 앞에서 재선거를 요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성조기가 아닌 태극기만 흔들어 주세요." "부정선거 말고 재선거만 외쳐 주세요."

지난 5일부터 서울 송파구 잠실 올림픽공원 개표소 앞에서 열리고 있는 재선거 요구 시위에 모인 청년들이 내세우는 지침이다. 6·3 지방선거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반발해 잠실에 모인 시위대의 주축은 20·30대 청년이다.


이들은 대체로 보수 성향을 보이지만 자신들이 '극우' 또는 '부정선거론자'로 인식되는 건 경계한다. 민주화 이후 태어나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자란 이들은 기성세대와 달리 진보 진영을 '기득권 세력'으로 인식한다. 문재인 정부의 조국 사태 등을 거치면서 청년들에게 '공정'은 진보가 아닌 보수의 가치로 각인됐다.

6.3 지방선거 지상파 3사(KBS·MBC·SBS) 출구조사 결과 성·연령대별 서울시장 후보 지지율. /사진=신재민 편집위원

보수 우위의 '서울 2030'


9일 서울시 실시간 도시 데이터에 따르면 일요일인 지난 7일 낮 12시 기준 잠실 재선거 시위가 열리는 올림픽공원 내 실시간 인구는 20대(17.9%), 30대(23.1%)로 2030세대가 41%를 차지했다. 이들은 월요일 이후 주중엔 출근 또는 등교했다가 저녁에 다시 시위 현장에 모이는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

잠실 재선거 시위에 직접 참가한 20대 남성 회사원 황모씨는 "시위 현장에는 투표용지 부족으로 참정권을 침해받은 사람들이 모였고 청년부터 노인까지 각 연령층이 재선거를 주장하는 평화로운 분위기"라며 "시위 구호나 단체 행동을 주도하는 사람도 없다"고 전했다. 잠실 현장에 부정선거 시위대가 합류한 것을 두고는 "평화로운 청년 시위대가 극우로 비춰지는 것이 아쉬웠다"고 말했다.


청년 시위대 가운데 보수 정당 지지자의 비중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이는 서울지역 2030세대 전체의 투표 성향과 맞물린다.

지상파 3사(KBS·MBC·SBS)가 발표한 6·3 지방선거 출구조사 결과, 오세훈 국민의힘 서울시장 후보는 20대 남성 75.3%, 30대 남성 66.8%의 지지를 받았다. 4년 전 지방선거 당시 오 후보의 20·30대 남성 득표율과 비슷한 수준이다. 이는 전국적으로는 국민의힘의 2030세대 남성 득표율이 하락한 것과 대조된다. 2022년 지방선거 당시 20대 남성 65.1%, 30대 남성 58.2%가 국민의힘에 표를 던졌지만 6·3 지방선거에서는 20대 남성 55.8%, 30대 남성 48.6%에 그쳤다.

주목할 점은 서울지역에서 2030 여성의 더불어민주당 후보 지지율이 4년 전보다 낮아졌다는 사실이다. 6·3 지방선거에서 정원오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는 20대 여성 48.5%, 30대 여성 42.8%의 지지를 받는 데 그쳤다. 2022년 지방선거에서 송영길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가 20대 여성의 67.0%, 30대 여성의 54.1%라는 과반 지지를 받은 것과 대비된다. 이번 선거에서 전국적으로는 20대 여성 66.4%, 30대 여성 63.5%가 민주당 후보에 표를 던진 것과도 차별화된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2030세대의 보수 지지율이 높아진 것에는 집값 문제와 삼성전자 성과급 논란 등이 종합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며 "집값·전월세 가격이 올라가면서 살기가 어려워졌고, 전국민주노동총연맹(민노총) 출신 고용노동부 장관이 삼성전자 노사 갈등을 중재해 귀족 노조 손을 들어줬다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상대적 박탈감이 커졌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수도권의 경우 다른 지방보다 이런 문제에 더 민감한 측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반발한 시민들이 9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에 설치된 개표소 앞에서 재선거를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사진=뉴스1

"주류 기득권은 민주당 아닌가요"


기성 세대와 달리 2030세대는 진보를 '주류 기득권' 세력으로 간주한다. 이들의 사회적 분노가 보수 진영보다 진보 진영을 먼저 향한다는 뜻이다.

취업준비생인 20대 남성 윤모씨는 "현재 기득권 주류는 민주당 아닌가"라며 "민주당에서 이재명 대통령을 배출했고 국회 다수당도 민주당"이라고 했다. 실제로 민주당은 2016년 이후 총선에서 3차례 연속 승리하며 10년째 제1당 지위를 지키고 있다. 또 1998년 이후 28년 동안 민주당은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전 대통령에 이어 이재명 대통령까지 4명의 대통령을 배출했다.

허창덕 영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2030세대는 특정 정치 진영에 갇혀 있지 않다. 이번 잠실 시위는 기본권이 침해됐다는 인식 아래 움직인 것"이라며 "그동안 정치에서 소외됐던 청년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선택하는 선거에서까지 권리를 빼앗기고 배제됐다고 느끼니 공정성에 불만을 가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2030세대의 또 다른 특징은 '공정'을 보수의 가치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서울에 거주하는 20대 남성 박모씨는 "처음 투표용지 부족 관련 뉴스를 접하고 분노가 치밀었다. 사회가 공정과 상식에서 벗어나 보였다"며 "공정·상식 측면에서는 진보보다 보수가 낫다. 그런 측면에서 진보 진영보다는 보수 진영의 생각이 나와 더 부합한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청년들이 '보수=공정, 진보=불공정'이란 인식을 갖게 된 것은 문재인 정부 시절 ▲조국 사태 ▲인천국제공항공사(인국공) 비정규직 직원의 정규직 전환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 ▲청와대 청년비서관 임명 등을 둘러싼 논란과 무관치 않다.

허 교수는 "2019년 조국 사태 당시 2030세대는 자신들의 입시와 직결된 문제로 받아들이며 분노했던 것"이라며 "이번 참정권 침해 사건도 2019년 조국 사태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했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반발한 시민들이 9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에 설치된 개표소 앞에 피켓이 붙여져 있다./ 사진=뉴스1 /사진=(서울=뉴스1) 김성진 기자

"재선거, 현행법에선 사실상 불가능"


야당은 광장으로 나온 청년들의 재선거 요구에 부응해 입법 추진에 나섰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재선거 실시를 위한 특별법을 발의할 수 있도록 신속하게 당내 논의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지난 8일 국회 토론회에서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서울 동작구을)은 "현행 법상 재선거는 원칙적으로 어렵다. 선거법 개정이 먼저다"라며 소급 적용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한병도 민주당 원내대표는 7일 재선거 요구에 대해 "국민의힘이 (선거)무효소송을 제기한다고 한다"며 "법원의 신속한 결정을 지켜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현행 공직선거법상 재선거는 선거가 일부 또는 전부 무효가 되거나 당선인이 임기 개시 전에 사퇴 또는 사망하거나 당선무효가 된 경우 등에만 치러질 수 있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관련해 재선거가 성립하려면 선거 절차상 위법성을 이유로 선거의 전부 또는 일부가 무효라는 판단이 나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선거소청과 선거소송 절차를 거쳐야 한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의 경우 선거 효력에 이의가 있는 유권자나 정당 또는 후보자는 선거일부터 14일 이내에 중앙선관위 등에 선거소청을 제기할 수 있다. 소청을 접수한 중앙선관위는 공직선거법에 따라 60일 이내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

정치권은 선관위가 소청을 인용할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 선관위가 이미 "공직선거법상 선거의 연기나 재선거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는 점에서다.

선관위가 소청 인용 결정을 내리더라도 재선거가 바로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선거소청 결과에 소청인이나 당선인이 불복할 경우 결정서를 받은 날부터 10일 이내에 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시도지사 선거는 대법원이 소송을 관할하며 대법원은 소 제기일로부터 180일 이내에 판결해야 한다.

선거소송에서 선거 규정을 위반한 사실이 인정되더라도 실제 재선거가 치러질지는 미지수다. 공직선거법상 선거에 관한 규정에 위반 사실이 있다 하더라도 해당 위반 행위가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는 인과관계가 명확히 인정돼야 하기 때문이다.

문종탁 대한변호사협회 이사(법률사무소JT 대표변호사)는 "선관위의 무능과 위법으로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했지만 그 자체는 현행 공직선거법상 재선거 사유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며 "선거무효 판결을 받으면 재선거가 가능하지만 이 역시 투표용지 부족이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고 인정될 때에만 가능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