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후 10시 15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1-1 게이트 인근 주차장에서 사람들이 연신 휴대전화 카메라 스위치를 눌러댔다. 이곳이 이날 시위 현장의 '인기 포토존'이 된 것은 핑크색 테슬라 사이버 트럭 때문. 카메라 앞에 선 2030 남녀들이 들고 있는 '재선거' 요구 푯말이 없었다면 월드컵 응원 현장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테슬라 사이버 트럭의 보닛은 열려있었다. 거기엔 '마음껏 편하게 드세요. 약소하지만 작게나마 힘이 되고 싶은 마음♡'이라는 푯말과 함께 김밥과 음료수가 있었다. 사이버 트럭 한쪽에는 '누구든 편히 앉으세요'라며 캠핑 의자가 놓여 있었다. 정작 사이버 트럭 주인은 어디론가 사라져 찾을 수가 없었다.
시위대는 있으나, 주최하는 단체는 없다. 그러다 보니 구역마다 시위 방식도, 인원도 제각각이다. 1-2구역에서 애국가 합창이 끝나면 1-3구역에서 애국가를 이어 부르는 식이다. 한쪽으로 인파가 쏠리면 누군가가 외친다. "지금 1번 게이트가 많이 혼잡하니 4번 게이트로 이동하면 좋겠습니다." 누구 하나 시키는 사람이 없는데도 빨간 경광봉을 든, 말 그대로 '자원봉사자'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그리로 안내한다.
핸드볼 경기장 인근 벤치 앞에선 20대 젊은 여성들이 돗자리에 스케치북을 펼쳐 놓고 태극기 문양을 그린 뒤 '재선거'라고 적어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곳곳에 생수병과 과자 등이 놓여 있어 누구나 가져갈 수 있었다. '저희는 절대 후원금을 받지 않습니다'라는 푯말이 누군가가 기부한 물품임을 알려줬다. 한쪽에선 20대 청년이 머리 위로 생수를 뿌리고 양팔을 휘저었다. 마치 '싸이의 흠뻑쇼' 콘서트 현장에 온 것처럼. 그러자 주변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과연 이들은 누구이며,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코까지 올라오는 회색 마스크를 쓴 박모(25)씨. 시위를 위해 마스크를 쓴 게 아니다. 박 씨와 함께 20대 청년 예닐곱 명이 마스크에 목장갑을 끼고 종이박스를 치우고 있었다. 한쪽에서 "부정선거, 재선거" 구호가 반복해서 울려 퍼졌지만 그들은 묵묵히 분리수거만 했다. 박 씨는 "제가 한마디 하는 것보다 100명이 와서 한마디씩 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 분리수거를 돕고 있다"고 했다. 뜻밖의 답변이었다. 박 씨는 "예전 다른 집회처럼 주최 측이 명확하면 안전사고가 나도 그 사람들이 책임질 텐데 이번엔 주최 측이 없다고 해서 집회 현장으로 달려왔다"고 했다. 아무도 부르는 사람이 없어 오히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박씨는 인터뷰가 끝나자 곧바로 청소 현장으로 향했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서 온 최은영(38)씨 자매는 이날 새벽 4시부터 전기차를 끌고 왔다. '휴대전화 충전 지원이 필요하다'는 소셜미디어의 글을 보고 회사에 연차까지 낸 뒤 참석한 것. 그들은 전기차에 멀티탭을 꽂고, 멀티탭에 충전기와 보조배터리를 연결해 장기간 집회에 참석하는 이들의 휴대전화 배터리 충전을 도왔다. 집에서 멀티탭 3개, 충전케이블 15개를 싹싹 모아왔단다. 최씨는 "투표를 못한 사람이 있다. 참정권을 침해당했으니 당연히 목소리를 내야 한다"며 "동생에게도 '너도 꼭 봐야 하는 역사의 한순간'이라고 말해 데려왔다. 나는 오세훈 후보를 뽑았지만 재투표로 당선자가 바뀌어도 상관없다"고 했다.
소정수(23)씨는 이날 오후 7시 30분쯤 간병인의 도움으로 휠체어를 타고 시위 현장에 도착했다. '부정선거 재선거'라고 매직으로 쓴 A4용지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지만 바람에 날아갔다. 그는 손을 움직이지 못해 그 종이를 잡을 수 없었다. 소 씨는 5년 전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 일을 하다가 택시와 충돌해 전신이 마비됐다. 그럼에도 시위에 참석한 건 지금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다. 지난 대선 때는 이재명 대통령을, 이번 지방선거에선 오세훈 후보를 선택했다는 소씨는 "투표를 하지 않으면 책임감이 없는 거라 생각해 꼬박꼬박 참여했는데, (이번 투표지 부족 사태를 보니) 반드시 재투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 난생 처음 집회에 참석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토요일, 시위에 참석하기에 앞서 오른팔에 태극기 문신을 새겼다고 했다.
다양한 방식, 다양한 모습으로 '재투표' 시위에 힘을 실은 이들의 주장은 유사했다.
배모(21)씨는 "수능에 비유하면 시험을 보러 갔는데 시험지가 없다고 해서 시험을 보지 못한 꼴"이라며 "헌법에 명시된 기본권이 침해됐는데, 어떻게 조용히 있을 수 있나. 스타벅스 사태 때 머그잔 깨부순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기 수원에서 이틀 연속 시위에 참석했다는 박윤정(32)씨는 "그냥 넘어가면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생각에 계속 (시위에) 나오고 있다"며 "핵심은 선거가 공정했느냐다. 내가 지지한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절차상 문제가 있다면 투명하게 확인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기 광명에서 1시간 20분이 걸려 시위 현장을 찾은 전호진(23)씨는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며 "이것이 바로 내 참정권을 지키는 길"이라고 했고, 도현(27)씨는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말하고 그것을 수용하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위가 닷새째에 접어들면서 정치색이 짙어지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날 시위대의 메인 구호는 '부정선거, 재선거'였다. 시위 시작 단계만 해도 상당수 시위대가 '부정선거'란 표현에 부정적이었으나 예전부터 '부정선거'를 주장해온 측이 다수 합류한 결과로 보인다. 한 50대 여성이 '부정선거'를 외치는 시위자들을 향해 "부정선거라는 표현을 쓰지 말라"고 하자 "마음대로 구호를 바꾸지 마라"는 핀잔이 돌아왔다. 지난 주말 시위에선 '극우 집회'라는 인식을 우려해 성조기 지참을 자제하자는 분위기였지만 이날 시위에선 성조기 역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한쪽에선 보수-진보 성향 유튜버 간에 거친 설전이 오갔고, 손에 아무 푯말도 들지 않은 시민들을 향해 "어디 소속이냐. 무슨 이유로 왔느냐"며 날 선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알 수 없기에, 언제 어떻게 끝날지도 예측하기 힘들다. 다만 광장에 모인 이들은 '내 권리는 내가 스스로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서로의 시간과 열정을 나누고 있었다. 정치권이 적절한 대안과 해법을 내놓지 못한다면 상당 기간 이들의 목소리가 이 공간을 떠나지 않을 것이란 사실만은 분명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