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지난 9일 4박 5일간의 방한 일정을 마치고 출국했다. 짧은 일정 속에서도 숨 가쁜 행보를 이어가며 한국 사회를 온통 '젠슨 황 열풍'으로 물들였다.
특히 우리에게 친숙한 장소들을 잇달아 방문하며 소탈하고 격의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방한 첫날 입국 직후 곧바로 e스포츠 게임단 T1이 운영하는 PC방을 방문했고, 같은 날 저녁에는 최태원 SK그룹 회장·구광모 LG그룹 회장·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과 홍대 인근에서 삼소(삼겹살에 소주) 회동에 나서며 이례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이후에도 국내 유명 예능 토크쇼 촬영에 임하거나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 홈경기에서 시구자로 나서는 등 글로벌 기업 총수로서 보기 드문 일정을 잇달아 소화했다.
황 CEO의 꾸밈없는 모습에 대중들 역시 열광했다. 그가 가는 곳곳마다 구름 인파가 모였고 악수와 사진 촬영 요청 역시 끊임없이 쏟아졌다. 일부 사람들은 그의 얼굴이 그려진 팬아트를 들고 다니며 특별한 애정을 과시했다. 젠슨 황 특유의 셀럽 마케팅이 본인과 엔비디아의 호감을 높이며 긍정적인 브랜딩 효과로 이어졌다는 평가다.
다만 황 CEO가 한국을 떠난 지금, 화려하고 유쾌했던 순간들은 뒤로하고 우리가 보낸 환호에 걸맞은 성과가 있었는지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국내 유수 기업 및 대학, 정부와 AI 팩토리·로보틱스·자율주행을 아우르는 AI 파트너십을 공고히 한 건 사실이나 주요 협력 계획을 구체화하기까지는 상당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관측되기 때문이다.
일례로 SK하이닉스·SK텔레콤 등은 엔비디아와의 협력을 바탕으로 AI 팩토리 구축에 나서기로 했으나 구체적인 로드맵과 생산 규모 등은 아직 논의 단계에 머물러있다. LG그룹도 엔비디아와 피지컬 AI 분야에서 협력을 진행 중인 건 맞지만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양사는 더 세부적인 협력 내용을 추후 캘리포니아에서 논의하기로 했다.
일각에선 엔비디아로부터 AI 주도권을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GPU 시장에서 독보적 지위에 있는 엔비디아가 피지컬 AI 시장까지 선도하면서, 국내 기업들 역시 엔비디아를 중심으로 사업 전략을 구상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어서다. 반도체 기업에는 엔비디아가 최대 고객이고, 피지컬 AI 업체는 엔비디아 소프트웨어 생태계 없이 사업을 확장하기 어려운 구조가 되어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조준희 한국인공지능·소프트웨어산업협회장도 "GPU의 지배 사업자에 의해 피지컬 AI의 핵심인 로보틱스 파운데이션 모델(월드모델)까지의 종속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며 "제조강국인 대한민국이 왜 그들에게 상응하는 막대한 지원 없이 (단순한 쇼잉만으로) 협력할 이유가 있을까"라고 조언했다.
역설적이지만 우리에겐 2가지 숙제가 생겼다. 먼저 AI 시장의 핵심축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선 이를 선도하고 있는 엔비디아와의 협력을 계속해서 고도화해 나가야 한다. 이벤트성으로 마무리되는 협력이 아닌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AI 생태계에서 상부상조할 수 있는 관계가 돼야 한다. 국내 AI 인프라에 대한 실제적인 투자를 이끄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동시에 지나친 종속을 막기 위한 노력도 병행돼야 한다. 한국만의 AI 독자 기술 개발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하며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전력·제도적 인프라 등도 적극 지원돼야 한다.
황 CEO와 함께했던 즐거운 축제는 막을 내렸다. 이제 그를 향해 보냈던 환호가 일회성 열기로 끝나지 않도록 내실을 다지고 AI 생태계를 선도하는 핵심 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노력에 집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