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 기자로 일하던 2022년, 어느 독자가 보낸 이메일 첫머리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우리처럼 쓸모 없어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뤄줘서 고맙습니다."
메일을 보낸 분은 당시 70대 중반의 작가 김지수 씨. '이런 인생2막'이란 인터뷰기사 후보로 남편 박삼령 씨의 사연을 소개해줬다. 박씨는 국내 은행에서 정년퇴직한 뒤 병마를 이겨내고 산림치유지도사로 일하고 있었다. 지방의 개방직 공무원으로 일하던 65세 무렵 대학병원에서 눈 뒤쪽 림프선에 숨어있던 악성 종양을 발견했다. 수술은 고사하고 방사선 치료조차 어렵다는 말을 들었지만 6차례의 항암치료를 이겨내고 2019년 완치판정을 받았다.
박씨는 치료에 집중하는 동시에 삶의 환경을 180° 바꿨다.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일하기 위해 항암치료 틈틈이 숲 해설사, 산림치유지도사 자격증에 도전했다. 73세에 산림치유지도사 자격을 얻고는 국립공원 근무를 위해 몇 달씩 지방에서의 자취생활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졌고 7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나이의 한계에 부닥쳤다. 인터뷰 당시 그는 하루 일자리를 따내기 위해 이틀을 현지답사를 나가는 노력을 거듭하고 있었다.
대체 그는 왜 이렇게까지 애를 쓰는 걸까.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세상에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읽혔다. 이런 분투를 지켜보며, 젊은 시절 신춘문예 당선 작가였던 부인 김씨도 10여 년의 공백을 딛고 다시 펜을 잡았다. 그로부터 3년 뒤인 지난해 보내온 소설집 제목은 '명자꽃이 피었다'. 스스로를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두 사람은 누구보다 자신들의 존재 의의를 새롭게 창조해가고 있었다.
일본의 신인 만담가 '오바아짱(할머니라는 뜻의 예명)'의 활약상도 재미있다. 오바아짱은 71세에 데뷔했고 79세인 지금도 전용극장 무대에 서고 각종 행사를 뛴다. 또박또박 기품 있는 어투에 겸손하고 예의바른 태도, 목소리는 성우를 했어도 좋았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만담은 센류(川柳)라는 한줄짜리 정형시를 활용한 경우가 적지 않다. '오늘 아침도 활기차게 일어나 병원에 간다' 같은 식이다. 한국에도 '사랑인 줄 알았는데 심부전' '그때 뽑은 흰 머리, 지금 아쉬워' 등의 '실버 센류' 작품들이 알려져 있다.
정년퇴직 뒤 취미삼아 고령자극단에 들어갔다가 '연기 폭을 넓히기 위해' 개그계의 연예기획사 교육과정에 등록했다. 졸업까지의 힘든 과정을 젊은 동기들의 도움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고 회고하는 그녀는, "나이 들었다고 비슷한 연령대만 만나면 자극이 없다"며 "젊은이들과의 소통이 만담가 생활에서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의사 출신 젊은 개그맨과 콤비를 이룬 '의사와 할머니' 무대는 두 사람이 진료실에서 투닥거리는 대화가 따스한 웃음을 자아내며 인기를 끌었다. 그녀의 유튜브 사이트에는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난다"거나 "건강 유의해서 오래오래 만담을 보여달라"는 류의 따뜻한 댓글들이 넘쳐난다. 그녀가 보여주는 노년의 여유와 유머는 동년배에게는 용기를, 젊은 세대에게는 나이듦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선물하는 듯하다.
필자는 지난해 말 36년간 다닌 언론사에서 정년퇴직했다. 퇴직 전 약 5년간 초고령 시대를 맞이한 한국의 여러 현상과 과제들을 다룬 기획기사와 칼럼들을 연재했다. 퇴직 후 반년 여, 생각보다 상실감은 적고 홀가분함은 크다. 앞으로 펼쳐질 시대에 대한 기대감도 적지 않다.
인구구조 면에서 세계는 유례없는 고령화를 경험하고 있다. 한국은 아예 초고령사회에 접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이든 사람들은 쓸모없다는 통념은 사회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 인구 20% 이상을 차지하는 고령자가 모두 쓸모없는 존재라면 사회 전체로 볼 때 얼마나 손해인가.
다만 각자 자신의 쓸모, 즉 새로운 역할을 찾되 다음 세대가 주인공이 될 무대는 양보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조심스레 덧붙이고 싶다. 사회 여러 곳에서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 버티는 시니어들이 종종 보이기 때문이다. 시니어 세대는 산업화, 민주화 시대를 거치며 이미 충분히 주인공 역할을 해보지 않았던가. 주연이 아니어도 작품을 빛내는 명품 조연이 있듯이, 초고령사회의 시니어에게도 시대에 맞는 저마다의 자리가 있을 터다. 세상에 쓸모없는 세대는 없다.
서영아 동서대 일본연구센터 객원교수는 동아일보 도쿄지국장과 논설위원, 콘텐츠기획본부장을 지낸 언론인 출신이다. 한일관계와 고령 사회 문제 등에 천착해 왔다. 정년퇴직 직전 5년간 동아일보에 '서영아의 100세 카페'를 연재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