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은 유책 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허용하지 않는 유책주의를 유지하고 있으나 혼인 관계가 실제 회복 가능한 상태인지를 따지는 실질적 파탄주의 판결이 늘고 있다. /클립아트코리아


혼인 파탄의 책임이 있는 배우자는 이혼을 청구할 수 없다는 '유책주의'는 우리 법원의 오랜 원칙이다. 배우 김민희와의 관계를 인정하며 아내를 상대로 이혼 소송을 냈던 홍상수 감독이 2019년 패소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혼인 생활 파탄에 주된 책임이 있는 홍 감독은 이혼을 요구할 수 없다며 법원은 이혼을 거부한 홍 감독 아내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최근에는 혼인 관계가 실제 회복할 수 있는 상태인지를 따져 유책 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인정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이미 남남이 되어 각자의 삶을 사는 부부관계를 법적으로만 묶어두는 것은 양쪽 모두에게 무의미한 고통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다. 법조계에서는 이를 두고 '실질적 파탄주의'라고 부른다. 법원은 '누가 잘못했는가'를 넘어 '혼인 관계가 실제로 회복 가능한가'를 함께 따지고 있다.



변화의 출발점은 2015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다. 당시 대법관들은 유책 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허용할 것인가를 두고 7대6으로 팽팽하게 맞섰다. 치열한 논의 끝에 유책주의가 유지됐다. 유책 배우자의 이혼을 폭넓게 허용할 경우 잘못이 없는 배우자와 자녀가 충분한 법적 보호 없이 혼인 관계에서 축출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만 대법원은 당시 예외 가능성을 열어뒀다. ▲상대방 역시 혼인을 계속할 의사가 없는 경우 ▲상대방과 자녀에 대한 보호·배려가 충분히 이뤄진 경우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의 유책성이 이혼 청구를 배척할 정도로 남아있지 않게 된 경우 등에 한해 유책 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예외적으로 허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후 판결에서 이런 예외 법리가 실제 사건에 적용되면서 '실질적 파탄주의' 판결이 축적되고 있다.

2020년 대법원은 가정폭력으로 형사처벌까지 받은 유책 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받아들였다. 이 부부는 협의이혼 절차나 이혼 소송을 신청했다가 취하하는 일을 10여 차례에 반복해 정상적인 부부관계 회복이 사실상 어려운 상태였다. 특히 부부 사이의 분쟁이 자녀들의 정서에 악영향을 주고 있고, 상호 간 애정과 존중이 없는 형식적인 혼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새로운 갈등과 고통을 초래할 수 있다고 재판부는 봤다. 유책 사유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 혼인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를 함께 따진 판결이었다.



이듬해에는 과거 외도를 저지른 배우자의 현재 유책성을 다시 따져봐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결혼 초기 남편은 아내의 외도를 알고도 눈감아줬는데, 이후 의심이 심해져 아내의 외출을 통제하고 아내가 연락하는 남자마다 부정행위를 의심하기도 했다. 결국 아내는 참지 못하고 이혼을 요구했다. 대법원은 유책 배우자인 아내가 외도 당시 남편이 가정을 유지하겠다고 선택했고, 아내가 그 이후 다른 부정행위를 저지르지 않은 채 오랜 기간 부부생활을 이어온 점을 두고 아내를 현재의 유책 배우자로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과거 유책 사유가 현재까지 이어지지 않는 이상 유책이 있던 당사자도 이혼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새로운 판례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판례 이후 2022년부터 '실질적 파탄주의' 흐름은 더욱 뚜렷해졌다. 대법원은 유책 배우자가 이혼을 원하는 상황에서, 상대방이 "혼인을 유지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두 사람의 이혼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유책 배우자가 먼저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상대가 혼인 관계를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의 언행이나 비난을 계속하고, 별거가 고착화되었다면 과거의 유책은 희석되었다고 본 것이다.

결혼 초기 일방적으로 집을 나가 오랜 기간 자녀들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은 유책 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기각한 원심을 깨고 대법원이 사건을 다시 심리하도록 돌려보낸 사례도 있다. 대법원은 24년의 혼인 기간 중 13년간 별거했다면 부부가 모두 혼인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라고 판단했다.

지난 9일 선고된 권혁빈 스마일게이트 창업자의 이혼 소송도 '실질적 파탄'을 둘러싼 최근 법원의 판단을 보여주는 사례다. 권 이사장은 이혼을 원하지 않았지만, 서울가정법원은 "혼인 관계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탄에 이르렀고, 그 책임은 양측 모두에게 있다"며 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인용했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 대부분은 파탄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대다수 선진국 사법부는 혼인 파탄의 귀책 사유를 가리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관계가 회복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면 이혼을 빠르게 성립시킨 뒤 '자녀 양육권 보호'와 '정확한 재산 평가 및 분배'에 집중한다.

가정법원 판사 출신 변호사는 "대법원은 여전히 혼인 파탄에 주된 책임이 있는 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실제 재판에서는 실질적인 혼인 파탄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라는 이유로 법적 굴레에 묶어두기보다 합리적인 재산 배분을 통해 각자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정리해주는 것이 사법부의 역할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