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훈 성신여대 경제학과 교수


바야흐로 안보의 시대가 열렸다. 1991년 소련 해체로 냉전이 서방의 승리로 끝나자, 세계에는 평화와 번영의 낙관론이 퍼졌다. 이를 상징한 것이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결합이 인류 정치 체제의 최종 형태가 되리라는 전망이었다. 그로부터 30여 년, 세계는 다시 전쟁의 시대를 맞고 있다. 유럽에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이 5년째 이어지고 있다. 중동에서는 이란 핵 프로그램을 둘러싼 미국과 이란의 충돌이 현재 진행형이다. 아시아에서는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이 심심찮게 거론된다. 역사는 끝나지 않았고, 오히려 더 복잡한 얼굴로 돌아왔다.

세계 안보 지형은 근본부터 바뀌고 있다. 미국은 동맹을 기여에 비례하는 거래로 바꾸고 있다. 러시아의 침공과 미국의 안보 청구서에 놀란 유럽은 자주 안보를 외치지만, 방위산업 기반과 정치적 결속력을 감안할 때 쉬운 목표가 아니다. 한국도 북핵 위협에 더해 북·러 밀착과 북·중 밀월이 구조적 위협으로 굳어지고 있다. 주목할 점은 안보가 더 이상 군사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경제, 정치, 금융, 문화와 결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를 '안보 결합 시대'라 부르고자 한다.



첫째는 경제 안보다. 핵심은 하나의 글로벌 공급망이 아니라 동맹 단위로 묶인 공급망이다. 한국 메모리 반도체의 초호황은 AI 수요가 주된 동력이었지만, 미국이 극자외선(EUV) 장비의 대중 수출과 중국산 반도체의 미국 수입을 막지 않았다면 그 폭은 훨씬 작았을 것이다. 한국 반도체의 미래는 경제 논리만이 아니라 안보와 동맹, 거래의 논리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둘째는 정치 안보다. 개인적으로 중국의 대만 무력침공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본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대만의 독립 선언이나 핵무장, 외국군 주둔 같은 상황이 아니라면, 막대한 희생을 치르는 침공보다 친중 지도자를 세우는 편이 손 안 대고 코 푸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강대국이 주변국에 우호 정권을 세우려는 유인은 패권 경쟁이 계속되는 한 더욱 커질 것이다.

셋째는 금융 안보다. 지금까지의 금융위기 이론은 재정·경상수지 적자나 자산가격 급락 같은 경제변수에서 원인을 찾았다. 그러나 앞으로는 안보 갈등이 금융위기를 촉발할 수 있다. AI로 고도화된 해킹은 한 나라의 금융 시스템을 마비시킬 수 있고, 북한 해킹 조직의 대규모 가상자산 탈취는 이미 현실이다. 금융망이 멈추면 실물경제도 함께 멈춘다. 미국이 국제금융통신망(SWIFT)으로 이란과 러시아를 제재하고 중국이 위안화 결제망(CIPS)을 키우는 것도 금융안보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넷째는 문화 안보다. 소프트 파워의 중요성은 오래전부터 알려졌지만, 생성형 AI의 영향력은 차원이 다르다. 대규모 언어 모델(LLM)은 학습 데이터에서 확률 높은 단어를 고르는 구조이므로, 강대국의 AI에는 그 나라의 가치관과 역사관, 세계와 한국을 보는 시각이 담길 수밖에 없다. 머지않아 많은 국민이 강대국의 AI에 자신의 정보를 맡기고 중요한 문제를 상의하며 고민을 털어놓을 것이다. 국적은 한국인이지만 정신은 한국과 외국이 뒤섞인 '혼합형 국민'의 등장이다. 이것이 국가의 미래와 안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장기적으로는 범용 인공지능(AGI)이나 초지능(ASI)보다 이 문제가 더 중요해질 수도 있다.

안보 결합 시대는 본질적으로 미·중 경쟁의 산물이다. 두 나라가 군사는 물론 정치, 경제, 금융, 문화 전반에서 안보와 결합해 맞서는 구도는 상당 기간 세계를 지배하는 기반구조가 될 것이다. 무엇이 답인지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무엇이 답이 아닌지는 분명하다. 중요한 국가 문제를 AI에 묻고 답을 구하는 방식은 답이 아니다. 안보를 자주와 굴종의 양자택일로 보는 시각도 답이 아니다.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기업을 규제와 분배의 대상으로만 보는 시각은 더더욱 아니다.

다양한 차원이 얽힌 만큼 경제학자와 안보 전문가, 기술자가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한다. 대안의 방향은 전략적 하이브리드다. 시장의 활력을 극대화하되 전략 자산과 공급망 병목은 국가가 지원하는 하이브리드 경제 모델이 필요하다. 민간의 창의적 연구개발과 국가의 안보 투자를 결합한 기술·인재 육성 체계도 필수적이다. 한국의 가치와 역사를 지켜내는 데 특화해, 세계가 한국을 알고 싶을 때 반드시 찾는 소버린 AI도 필요하다. 사이버 복원력을 갖춘 금융 인프라 구축도 시급하다.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국내 정치에서는 치열하게 경쟁하되, 국경 밖 안보와 통상 앞에서는 일관된 국익을 추구하는 초당적 국가 거버넌스다. 초불확실성의 시대에 국가의 미래를 기획하는 '국가 전략원'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 진영 논리를 초월한 각 분야 최고 전문가들이 참여해 경제·정치·금융·문화 안보를 통합적으로 기획하는 임무를 맡아야 한다.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도록 여야 합의로 설립하고 운영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정치가 해야 할 일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안보 결합 시대다. 안보가 안 보이는 정치는 존재 이유가 없다.
강석훈 성신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과 한국산업은행 회장 등을 지낸 경제학자다. 19대 국회의원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