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약품 비만 신약 '에페'의 개발과 상용화 과정. 독자 플랫폼 '랩스커버리'를 적용한 에페글레나타이드는 2015년 사노피에 기술수출됐다가 2020년 권리가 반환됐다. 한미약품은 자체 개발로 품목허가에 성공했으며 29일 일부 의료기관 처방을 시작으로 상용화에 나선다./그래픽=신재민 편집위원


글로벌 제약사가 반환한 신약 후보물질이 국내 첫 GLP-1 계열 비만 신약으로 재탄생했다. 한미약품은 에페(에페글레나타이드)를 상용화 단계까지 끌어올리며 플랫폼 기술 개발부터 임상, 허가, 생산에 이르는 신약 개발 전주기 체계를 입증했다. 기술수출(후보물질 개발 권리 이전) 이후 반환된 물질을 자체 개발로 상용화까지 연결했다는 점에서 국내 제약산업의 연구개발 경쟁력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받는다.

한미약품은 오는 29일부터 GLP-1 계열 비만 신약 에페를 일부 의료기관에 공급한다. 에페는 이달 식품의약품안전처 품목허가를 받은 국내 개발 45호 신약이자 국산 첫 GLP-1 계열 비만치료제다.



에페 상용화의 기반은 한미약품의 독자 플랫폼 기술인 '랩스커버리'다. 약효를 내는 단백질과 펩타이드에 항체 꼬리 부분인 Fc 단편을 결합해 체내 체류 시간을 늘리는 기술이다. 투여 횟수를 줄이면서 약효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미약품은 치료 물질과 Fc 단편 사이에 연결체(링커)를 적용해 약효를 내는 부위가 제 기능을 유지하도록 설계했다. 2020년 발표된 제2형 당뇨병 환자 대상 임상 연구에 따르면 에페글레나타이드의 반감기는 135~180시간으로 나타났다. 약물 농도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데 최대 일주일 이상 걸려 주 1회 투여가 가능하다는 의미다.

한미약품 관계자는 "랩스커버리는 약물 지속성을 높이는 플랫폼 기술"이라며 "비만과 당뇨병뿐 아니라 희귀질환 등 다양한 치료 영역으로 확장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랩스커버리는 한미약품 연구개발 전략의 중심축 역할을 해왔다. 회사는 해당 기술을 적용한 에페글레나타이드를 2015년 사노피에 기술수출했다. 당시 개발 목표는 당뇨병 치료제였다.

사노피는 글로벌 임상을 진행했지만 사업 전략 조정 과정에서 2020년 개발 권리를 반환했다. 상당수 기술반환 물질이 개발 중단 수순을 밟는 것과 달리 한미약품은 후속 개발을 이어갔다. 물질 자체의 가능성보다 사업 우선순위 변화가 반환 배경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업계는 이 과정에서 한미약품의 강점이 드러났다고 평가한다. 후보물질 발굴과 플랫폼 기술, 임상 개발, 생산시설을 모두 보유한 연구개발·생산 일체형 구조를 갖추고 있어서다. 기술수출에 집중하는 바이오벤처와 달리 상용화 여부를 자체적으로 판단하고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했다는 의미다.

한미약품은 에페의 적응증을 비만으로 전환한 뒤 개발을 이어갔다. 사노피가 축적한 약 6000명 규모의 글로벌 임상 데이터에 한국인 448명이 참여한 비만 임상 결과를 추가해 품목허가를 획득했다.

생산 기반 역시 직접 구축했다. 평택 바이오플랜트에서 원료의약품과 완제의약품을 생산한다. 후보물질 발굴부터 임상, 허가, 생산까지 하나의 체계 안에서 수행하는 구조를 완성한 셈이다.

랩스커버리의 활용 범위는 에페에 그치지 않는다. 자동차 업체가 하나의 플랫폼으로 여러 차종을 개발하듯 약물 지속성을 높이는 공통 기술을 다양한 치료제에 적용하는 방식이다. 실제 호중구감소증 치료제 롤론티스 역시 같은 플랫폼을 기반으로 개발돼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획득했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플랫폼 기술은 특정 제품 하나에 머물지 않고 후속 후보물질 개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며 "성과가 축적될수록 신약 개발 성공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신약 개발 성과가 시장 안착으로 이어질지는 별도의 과제다. 비알피인사이트에 따르면 올해 5월 국내 주사형 비만치료제 시장에서 위고비와 마운자로의 합산 점유율은 93%에 달했다. 에페 역시 효과와 안전성, 가격 경쟁력을 토대로 의료진과 환자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나동희 중앙대 약대 교수는 "국내 기업이 독자 기술로 GLP-1 계열 신약을 개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기술적 성과와 시장 경쟁력은 다른 문제인 만큼 향후 처방 현장에서 평가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