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헌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전 한국은행 부총재)가 10월26일 서울 동작구 숭실대학교 글로벌브레인홀 교수 연구실에서 동행미디어 시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조현호 기자


2021년 8월 26일.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연 0.50%에서 0.75%로 올렸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물가 상승을 일시적 현상으로 보고 제로금리를 유지하던 때였다. 한국은 미국보다 6개월 이상 먼저 움직였다. 당시 한은 부총재이자 금융통화위원이었던 이승헌 숭실대 교수도 인상에 힘을 실었다. 미국의 소비가 회복되는 동안 통화량은 빠르게 늘었고 국내에서는 집값과 가계대출이 함께 뛰었다. 물가 상승이 일시적 현상에 그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그는 다른 금통위원들을 설득했다.

5년 뒤 그의 평가는 달라졌다. 한은은 올해 7월과 8월 기준금리를 잇달아 올린 뒤 지난달 22일 연 3.00%로 동결했다. 지난달 26일 서울 동작구 숭실대학교에서 만난 이 교수는 연속 인상이 다소 성급했다고 평가했다.

저금리 시대 끝…인플레는 '회색 코뿔소'

-금리 인상을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인가.
▷과거 같은 낮은 2%대 금리 시대는 이미 지났다. 인플레이션 위험이 오래갈 수 있어 높은 금리에 대비해야 한다. 그렇다고 연속 인상을 서두를 이유는 없다. 경제주체들이 적응할 시간을 주면서 통화정책 방향을 충분히 알려야 한다. 천천히 가는 게 멀리 간다는 말도 있다.

-앞으로 어떤 경제위기를 경계해야 하나.
▷기존처럼 외환위기와 같은 전형적인 위기만 떠올려서는 안 된다. 위기의 형태가 달라지고 있다. 금융시장 변동성이 새로운 위험이며 특히 인플레이션은 계속 다가오는 '회색 코뿔소'와 같다. 미리 방어선을 마련하지 못하면 거대한 충격에 휩쓸릴 수 있다.

-인플레이션 위험이 커진 배경은.
▷국제유가 상승이 장기화하면 생산비가 오르고 기업들이 이를 제품 가격에 반영한다. 인공지능(AI) 투자 확대도 소득과 투자 수요를 자극할 수 있다. 늘어난 돈이 부동산으로 몰리면 자산시장 과열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금융시스템은 과거보다 안전해지지 않았나.
▷시장이 흔들리면 중앙은행이 유동성을 공급할 것이라는 기대가 커졌다. 이를 믿고 금융기관이 위험을 더 감수하면 신용 팽창이 이어진다. 연쇄 부도 같은 전통적 위기는 줄었지만 물가 잡기는 더 어려워졌다. 미국 인플레이션이 길어지는 이유다. 결국 금리를 올려야 하지만 급격한 인상은 채권시장과 빚 많은 가계·기업에 충격을 준다. '포워드 가이던스(사전 정책방향 안내)'를 활용해 경제주체들이 높은 금리에 적응할 시간을 줘야 한다.

"이승헌, 이거 해도 돼?"…청년 한은맨의 기억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어떤 일을 하고 있었나.
▷입행 7년 차였다. 금리 자유화 실무를 맡아 저축예금 도입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보를 비롯한 기업들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부장이 사무실에 와서 "이승헌, 이거 해도 돼?"라고 물었다. 새 예금상품을 만들고 금리 자유화의 마지막 단계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이미 짜놓은 계획을 중단하기도, 계속 추진하기도 어려웠다. 이후 태국 외환시장 불안이 번지고 한국까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기업이 쓰러지고 은행이 합병되는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정말 놀랐고 황당했다. 중앙은행에서 일하고 있었기에 자괴감도 컸다.

-젊은 시절 생각했던 중앙은행과 실제 업무는 달랐나.
▷경제학을 공부할 때는 중앙은행이 금리로 경제를 움직이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들어와 보니 처음 맡은 일은 은행의 자금 흐름과 금융제도를 다루는 실무였다. 선배들은 돈이 어떻게 오가는지, 은행 사이의 '환(換)'이 왜 중요한지 알려줬다. 처음에는 와닿지 않았다. 훗날 부총재가 돼 결제 관련 제도 문제를 다루면서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중앙은행의 핵심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결제 기능이다. 서로 다른 은행의 예금은 각 은행의 채무인데도 한은의 결제시스템을 거쳐 자유롭게 오간다. 한 나라의 돈의 흐름을 보장하는 일이다. 이런 기반이 있어야 중앙은행이 금리를 조절하고 통화정책을 펼칠 수 있다. 돈은 결국 신뢰가 뒷받침돼야 통용된다.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은행의 돈을 믿고 주고받을 수 있는 기반을 지키는 것이 중앙은행의 존재 이유다.

-대학 시절부터 돈의 정체를 궁금해했다는데.
▷졸업논문을 준비하다 도서관에서 제목이 '돈'인 책을 찾아 읽었다. 경제학을 공부했으니 답을 얻으리라 기대했지만 오히려 더 궁금해졌다. 33년간 한은에서 일했어도 돈이 무엇인지 한마디로 답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살기 위해 만든 돈에 거꾸로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돈을 이해하고 돈의 주인이 돼야 한다.

-최근 신현송 한은 총재가 정부의 확장적 재정정책 기조에 대해 "유의할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를 냈는데.
▷한은 총재가 할 말은 해야 한다. 재정정책도 물가와 금융시장에 영향을 미친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정부 정책에 침묵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통화정책과 금융안정에 관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필요한 의견을 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전문성을 갖춘 영역에 집중해야 한다.
이승헌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전 한국은행 부총재)가 26일 서울 동작구 숭실대학교 글로벌브레인홀 교수 연구실에서 동행미디어 시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조현호 기자


"위험은 사라지지 않는다"…시장 키워야

-국경을 넘나드는 돈이 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돈의 흐름을 규제로 억지로 묶어서는 안 된다. 위험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곳으로 쏠리거나 모습을 감출 뿐이다. 금리를 통제해도 압력은 다른 시장에서 터질 수 있다. 1990년대 금리 규제를 직접 다루며 이를 경험했다. 돈의 흐름이 커진 만큼 시장의 규모도 커져야 한다. 시장 스스로 충격을 흡수하고 위험을 분산할 수 있도록 금융 수단과 참여자를 키워야 한다.

-한국 금융산업이 바뀌어야 할 점은.
▷경제 규모에 비해 금융이 너무 작다. 국내 은행들은 가계대출에 집중하는 반면 해외 자금 흐름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관리하고 수익을 얻는 일은 외국계 은행이 주로 맡는다. 자본시장과 외환시장을 함께 키워 국내 금융회사도 국제금융에서 역할을 넓혀야 한다. 두 시장은 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충격을 국내에서 소화하고 이를 사업 기회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나라가 또 다른 위기를 맞더라도 극복할 수 있을까.
▷자신이 있다. 이미 겪어봤기 때문이다.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위기에 대응하는 경험을 쌓았다.

-한국 경제의 미래 기회요인은 무엇인가.
▷AI로 산업과 투자가 재편되는 지금은 새로운 기회이기도 하다.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팬데믹을 겪으며 쌓은 경험도 있다. 성급한 정책 판단에 흔들리지 않고 금융시장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중심을 잘 잡아나가면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