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가 기업을 세웠고, 아버지가 그 기업을 성장시켰다. 그러면 나는?"
 
재계 3세 경영인들의 머릿속에 항상 담겨 있는 숙제다. 오래 전 3세 경영체제에 들어간 LG그룹이나 두산그룹과 달리 3세대 경영인이 이제 40대에 접어들어 경영전면에 나선 삼성과 현대기아차, 신세계 그룹의 '젊은 호랑이'들이 경인년을 맞아 그 누구보다 '퀀텀 점프(새로운 도약)'의 해법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경인년 새해를 달구는 '젊은 호랑이'들
 
100년 만의 폭설이 내리기 하루 전인 지난 3일 오후. 신정 연휴가 끝나기도 전에 삼성전자 최고운영책임자(COO)를 맡은 이재용 부사장(42세)은 삼성그룹 전용기가 계류하고 있는 김포공항 출국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7일부터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멀티미디어 가전쇼인 CES(Consumer Electronic Show)를 참관하기 위해서다. 한해의 전자업계 신제품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CES는 전 세계 바이어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장(場)이기도 하다.
 
지난해 말 인사에서 부사장으로의 승진과 함께 COO를 맡은 이 부사장은 삼성그룹 전용기에 몸을 싣고 새해 첫업무이자 COO로서의 첫 대외활동을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시작했다. 이 부사장은 2년여 만에 공식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낸 부친인 이건희 전 삼성회장을 보좌해 CES에서 주요 고객사들과의 미팅 등으로 새해 초를 바쁘게 보내고 있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40세)은 '100년 만의 폭설'이 지나간 5일 지방으로 향했다. 조부인 고 정주영 현대 창업 회장의 숙원이었던 일관제철소 화입식을 위해서다. 5일 오전 일찍 충남 당진군 현대제철 당진제철소를 방문해 숙원이었던 제철소 제1고로에 부친인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이 첫 불씨를 당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으로 사실상 새해 첫업무를 시작했다.

 


정 부회장은 당초 5일부터 11일까지 인도 뉴델리에서 열리는 '오토 엑스포 2010' 자동차박람회에 참석을 검토했었다. 부친인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이 매년 글로벌 경영의 첫 스타트를 끊었던 행사를 챙기기 위해서였으나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숙원사업이었던 당진제철소 화입식과 바쁜 일정 탓에 해외일정을 접고 국내 현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신세계 이명희 회장의 장남인 정용진 부회장(42세)은 '신년사' 발표를 통해 경영전면에 나섰음을 선언했다. '신년사'는 그룹의 총수나 CEO가 임직원들에게 그해 경영의지를 내 비치는 것으로 상징성이 크다. 정 부회장의 이름으로 발표된 신년사는 지난달 신세계 총괄대표이사에 오른 정 부회장이 경영전반을 총괄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올해 개점 80주년을 맞는 신세계의 첫 일성이 정 부회장의 신년사로 채워졌다. 정 부회장은 신년사에서 "경쟁사보다 취약한 온라인 쇼핑몰 부문에서 업계 1위를 달성하겠다"며 "기존 오프라인 매장 중심의 배송 체계를 대폭 정비하겠다"고 밝혔다.
 
이처럼 경인년 새해는 '젊은 호랑이'들이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발빠른 행보를 보이며 40대 기수로서 재계에 새 바람을 몰아오고 있다.
 
◇재계 3세대를 대표하는 40대 기수 3인방
 
이재용ㆍ 정의선ㆍ 정용진, 이들의 공통점은 지난해 인사를 통해 사실상 처음 그룹 경영전면에 나서 올해가 본인의 역할로 그룹 경영에 영향을 미치는 첫해라는 점이다.
 
가장 먼저 그룹 경영 전면에 나선 3세는 정의선 부회장이다. 정 부회장은 기아차를 맡아 성공적인 경영을 해온 점을 인정받아 지난해 8월 현대차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정 부회장은 이미 해외 산업현장 시찰 등 국내외에서 왕성한 독자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동안 부친인 정몽구 회장이 직접 챙겼던 해외 준공식 행사를 정 부회장이 챙기고 있는 것이 좋은 사례다. 최근 체코공장 준공식이나 현대자동차의 YF쏘나타 신차 발표회 등을 주도적으로 진행해오고 있다.
 
신세계그룹도 지난해 11월 정기 임원 인사를 통해 오너인 이명희 회장의 아들인 정용진 부회장을 그룹의 주력사인 신세계의 총괄 대표이사로 임명했다. 정 부회장은 그동안 대표이사를 맡지 않고 경영지원실 부회장으로 이마트의 중국시장 공략 등의 행사를 주도해왔으나 이번 인사로 사실상 신세계그룹의 결재권자의 자리에 올랐다.
 
정용진 부회장은 이재용 부사장이나 정의선 부회장과 달리 기자간담회를 열고 언론과의 접촉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3세대 경영을 위한 발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한국 대표 기업 삼성의 3세대 경영인인 이재용 부사장은 직급 승진상황을 보면 '느린' 편이다. 지난달 삼성 임원인사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하면서 삼성전자의 최고운영책임자(COO)를 맡았다. COO는 기업 내 사업조정과 운영을 책임지는 자리로 수석 부사장격이다.
 
이 부사장은 지난 2007년 최고고객책임자(CCO)를 맡은 이후 3년간 해외주요고객사들과의 접촉면을 넓혀왔고 승진도 삼성의 인사원칙에 따라 '원칙적, 단계적'으로 진행해왔다. 부사장으로 승진하는데까지 19년이 걸린 것만 봐도 국내 최대 그룹인 삼성을 맡기기 위한 경영수업 과정이 길었다.
 
이들 대표적인 3세 경영인들은 사적으로도 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 부사장과 정용진 부회장은 사촌지간으로 서로 남자 형제가 없는 상황에 나이도 같아 친구이자 친형제처럼 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간혹 서로의 사무실 방문해 경영활동상의 애로 등 속내를 털어놓고 의견을 나누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부사장과 정의선 부회장도 2살 터울로 사석에서는 정 부회장이 이 부사장을 '형'으로 부를 정도로 친분이 두텁다. 에쿠스를 타는 이 부사장이 현대기아차에 대해 갖고 있는 애정도 정 부회장으로부터 비롯됐다. 정교한 싱글 핸디로 알려진 이 부사장과 드라이버 장타자로 알려진 정 부회장은 현대차 소유의 남양주 해비치컨트리클럽에서 동반 라운딩을 하는 등 재계의 우정을 키우고 있다.


 
◇재계에 부는 3세대 여풍도 주목
 
이들 3세 경영 선두그룹 외에 허동수 GS칼텍스 회장의 장남 허세홍 전무도 지난해 전무로 승진하면서 싱가포르 현지법인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또 지난 1일에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26) 씨가 (주)한화에 차장 직급으로 입사해 경영수업에 들어가는 등 재계 3세들의 경영행보가 이어지고 있다.

3세대 경영면에서는 여풍도 만만치 않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장녀인 이부진 전무는 호텔신라의 성공적 운영으로 높은 점수를 받아 지난해 초에 전무로 승진한데 이어 같은 해 9월에는 그룹 지주사격인 에버랜드 경영전략담당 임원을 겸임해 경영전면에 나서고 있으며, 차녀인 이서현 제일모직 전무도 지난해 말 전무로 승진한 후 제일기획의 기획담당 전무도 겸직키로 했다.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의 딸 정유경 조선호텔 상무도 지난해 신세계 부사장으로 승진, 경영 전면에 나선 오빠 정용진 부회장을 돕고 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맏딸인 조현아(35) 상무도 경영 활동의 폭을 넓히고 있다. 미국 코넬대에서 호텔경영학을 전공한 조 상무는 최근 그룹 호텔 계열사 '칼호텔 네트워크'의 대표이사를 맡은데 이어 여행 관련 계열사의 등기이사에도 선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