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디게 찾아와 더 반가웠던 가을이 어느새 뒷모습을 보이며 떠날 채비를 한다. 부쩍 짧아진 가을이지만 낙엽길을 터덜터덜 걸으며 트렌치 코트 깃을 세우는 낭만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 볼륨감 그 자체만으로도 온기가 느껴지는 두툼한 스웨터, 날렵하게 목덜미를 감싸주는 실크 스카프 역시 그렇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늦가을을 온전히 느끼게 해주는 시즈널 아이템은 트위드 자켓이다. 플란넬 셔츠 위에 카디건 그리고 그 위에 꼭 맞는다 싶게 입은 트위드 자켓, 거기에 코듀로이 팬츠와 데저트 부츠까지 갖추면 그야말로 가을 신사.
 
찬바람이 불면 이렇듯 조건반사적으로 트위드 자켓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트위드자켓을 얘기하려면 반드시 해리스 트위드(Harris Tweed)를 말해야 한다. 해리스 트위드는 세계 최고의 울 원단이다. 스코틀랜드의 북서부 군도 지역의 4개 섬에서만 생산되는, 100% 핸드메이드 제품. 그 해 수확한 최고의 양털만을 사용해야 하는 엄격함까지, 명품으로서의 조건은 두루 갖춘 제품이다. 나아가 이 원단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의회에서 제정된 법률을 통해 생산과정을 통제하고, 엄격한 품질관리를 거친 후 비로소 출시한다. 마치 고급 와인에 적용되는 프랑스의 AOC나 이태리의 DOCG 규제처럼 말이다.
 
해리스 트위드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Harris Tweed means a tweed, hand-spun, hand-woven and dyed by the crofters and cottars in the Outer Hebrides(해리스 트위드란 스코틀랜드의 서부외곽 섬지역에서 아우터 허브농장주와 소작인들에 의해 수작업으로 짜여지고 염색된 트위드원단을 지칭한다).
 
필자가 해리스트위드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그것이 세계 최고의 모직 원단이라는 사실 뿐만은 아니다. 기실 해리스 트위드가 아니더라도 더 값나가고 사치스런 원단은 얼마든지 있다. 모피가 대표적인 케이스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해리스 트위드는 생산과정, 지역/환경 친화성, 기술 발전의 전통 등 모든 면에서 전형적인 'Local & Slow 패션'의 면모를 고스란히 지닌 소중한 문화 유산이라는 부가적 의미까지 지닌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해리스 트위드는 오직 지역에서만 생산돼 지역에서 소비된 전형적인 로컬 프로덕트였다. 당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를 강타한 저 유명한 감자기근 사태로 인한 경제위기 극복방안의 일환으로 외부 시장을 염두에 둔 생산이 본격화되기 이전까지 말이다.
 
던모어 공작부인과 그 가문의 노력으로 해리 스트위드는 어려운 사정에 처한 섬지역 경제 살리기의 첨병이 된다. 이때 던모어 부인은 가문의 고유 문양이었던 타탄체크를 해리스 트위드의 패턴에 적용케 하고 이게 오늘날까지 이르러 스코틀랜드적이고 해리스 트위드적인 고유의 전통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런 성공을 바탕으로 해리스 트위드는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특산품이 됐고, 런던 패션계 나아가 유럽패션계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하지만 여기서 머물렀더라면, 이윤의 논리에 모든 것을 올인했더라면 오늘날 스코틀랜드와 패션을 사랑하는 이들이 모두 자랑스러워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 명품은 그냥 역사 속의 한 페이지만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산업혁명과 뒤이은 기계화의 폭력적인 확산속에서 해리스 트위드 생산자들은 전통을 지키며 본질에 어긋나지 않는 느린 발전을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이것은 위대한 선택이 됐다.

전면적인 기계화 대신 낡은 기계를 개량하고, 손쉽고 결과는 확실하지만 엄청난 환경오염을 가져오는 화학염색 대신 베지터블 등을 이용한 환경친화적인 염색의 전통을 살린 것은 오늘날 가장 유니크한 모직원단의 가치를 지켜온 핵심이 됐다. 
 
좀 늦은 감은 있지만, 필자는 올해 세계 최고라 할만한 나만의 트위드 자켓 한 벌을 가져볼 생각이다. 해리스 트위드의 독투쓰(dog tooth) 패턴 원단을 구하고 한국 최고의 양장 장인에게 의뢰해 가장 느리고 가장 섬세하게, 시간을 이기고 나의 스타일을 지켜줄 그런 자켓을 만들어 입을 참이다. 환경과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는 윤리적 패션이야 말로 가장 유니크하고 스타일리시하다는 사실을, 나의 이 해리스 트위드 자켓이 역설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