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오후에 열린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개막식이 외신들에게 ‘최악의 개막식’이란 평가를 받으며 여론의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다. 개막식 연출을 맡으며 주목받은 임권택 감독 역시 자질논란에 휩싸였다.
개막식을 보며 언론과 대중들이 지목한 문제점을 요약하면 ▲‘이영애 성화 점화’로 대표되는 한류 연예인 스타와 스포츠의 주객전도 ▲개막식 구성의 불분명함 ▲조직위원회의 미숙한 운영 등이다.
이 중 임권택 감독이 도마에 오르는 이유는 개막식 구성과 관련한 문제들 때문일 것이다. 연출을 맡은 임 감독은 개막식을 마치고 한 인터뷰에서 "그 동안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의 개회식이 개최국의 위상과 힘을 과시하는 무대였다”며 “우리는 비교적 저예산으로 치르면서도 참가국이 좀 더 평화롭고, 평등하고, 정이 흐르는 무대가 될 수 있도록 차별화했다"고 설명했다. 예산이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차별화된 메시지를 전달하려 노력했다는 것. 그간 임 감독이 영화를 통해 보여준 것과는 너무나 다른 차원이었다.
대중들의 냉담한 반응은 규모가 아닌 '공감'에 대한 문제였다. 아시안게임의 취지에 걸맞은 내용들을 풀어내지 못했다는 평가다. 그간 임권택 감독이 보여준 예술사를 통해 이번 개막식을 바라본다면 어떨까?
◆ 다작 영화감독
임권택 감독은 1936년 전라남도 장성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3학년 재학 중 해방을 겪은 그는 좌익 활동을 했던 아버지 때문에 힘겨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중 가출해 서울로 상경, 영화 제작 일을 도우며 감독의 꿈을 키웠다.
영화에 재미를 느낀 그는 조감독으로서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제작사로부터 영화 감독 제의를 받게 됐다. 당시 영화계에 입문한지 5년째였던 임 감독에게는 획기적인 제안이었다. 그 후 그는 그의 입으로 ‘남작’이라고 말 할 만큼 수많은 영화를 찍어낸다. 데뷔 후 10년 동안 50여 작품을 만들었을 정도.
그 후, 그는 미숙하더라도 한국 사람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영화를 만들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미국 영화의 아류가 아닌 한국 사람들이 살아낸 수난의 세월, 우리 민족이 가진 문화적 개성들을 담아내고 싶었다.
◆ 한국인의 삶을 영화에 담고자…
그가 ‘임권택의 영화답다, 한국적인 삶이 진솔하게 담겼다’고 생각하는 영화는 1978년 발표된 <족보>와 1979년 <깃발없는 기수> 등. 그는 이 작품들이 자신의 영화의 전환점이라 생각한다.
이후 1993년 그는 영화사에 ‘흥행과 관계없이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겠다’ 요구해 <서편제>를 제작하게 된다. 이 영화는 관객집계가 불투명하던 당시 단성사 1개관에서만 100만 관객을 돌파하고 6개월간 상영되며 ‘국민영화’로 불리게 됐다.
◆ ‘한국을 알리고자’하는 욕망
<서편제>를 통해 국민감독으로 거듭난 그는 ‘임권택이라는 영화감독으로서 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성과를 내야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영화의 수준이 세계 속에서 어디쯤 가고 있는지 몰랐다는 그는 한국영화진흥공사를 통해 칸 영화제에 출품하게 된다.
그는 이전 그의 작품 <만다라>가 1982년 베를린 영화제에 출품돼 좋은 평을 받은 것을 보고 자신의 영화를 통해 세계에 한국을 알릴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이러한 시도들이 계속 되던 중 2002년 드디어 칸 영화제에서 <취화선>을 통해 감독상을 수상한다.
◆ 혹평의 연속 아시안게임 개막식
'45억의 꿈, 하나 되는 아시아'를 주제로 인천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펼쳐진 이번 아시안게임 개막식은 영화감독인 임권택과 장진 감독이 함께 연출을 맡아 화제를 모았다. 개회식 공연에 투입된 예산만 230억 원에 이르렀다. 하지만 개회식 후 국내팬들과 누리꾼의 반응은 ‘실망’이었다. ‘독창성이나 개연성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것.
대중이 그에게 원했던 것은 <만다라>, <서편제>, <취화선>등의 영화를 통해 보여줬던 ‘가장 한국적인’ 연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시안게임을 통해 본 무대의 모습은 ‘거장’이라 부르기에 무리가 있었다.
왜 개최지가 '인천'이어야만 했는지에 대한 당위성이나 '인천속의 아시아'를 표현할 수 있는 정서적 공감대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가 피하고자 했던 민족적 자화자찬과 다를 게 없는 한류 예찬에 그쳤다. 사람들이 원했던 ‘그의 색깔’마저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에서 비판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