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태의 읽는 인간
[김영태의 읽는 인간 ⑮]변덕세와 고집세
세금 이야기는 언제나 뜨겁다. 걷는 쪽과 내는 쪽의 셈이 달라서 그렇다. 그런데 세금에는 국세나 지방세만 있는 게 아니다. 고지서 없이 부과되는 것들도 있다. 이번 글은 그런 세금에 대한 것이다.회의가 끝났다. 한 시간 반 동안 의견을 나눈 끝에 결론이 났다. 참석자들은 해야 할 일을 각자 적었다. 누구에게 연락할지, 어떤 자료를 만들지, 언제까지 보고할지.회의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전화가 왔다. 방금 전 결정을 없던 일로 하자는 것이었다. 회의 중에는 말이 없던 사장이 그분께 따로 보고했는데, 뒤집혔다고 했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다시 회의실로 돌아가야 했다.리더가 생각을 바꾸는 데에는 몇 분이면 충분했다. 조직이 방향을 바꾸는 데에는 며칠 이상이 걸렸다. 이미 만든 자료를 버려야 했고, 어렵게 잡은 약속을 취소해야 했다. 리더의 한마디는 짧았지만, 그 뒤처리는 짧지 않았다.나는 이것을 '변덕세'라고 부른다. 리더가 충분한 설명 없이 결정을 뒤집을 때마다 조직이 치러야 하는 부담이다. 지시한 사람이 아니라 실행하는 사람들에게 피할 수 없이 부과된다는 점에서 세금과 닮았다.변덕세는 회계장부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조직의 표정에는 나타난다. 변덕이 반복되면 사람들은 새 지시를 받아도 바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번에도 곧 바뀔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지시가 내려왔는데도 모두가 한동안 기다린다.이런 조직에서는 실행력이 떨어진다. 리더는 사람들이 느리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리더의 생각이 너무 쉽게 바뀐다고 생각한다. 리더는 더 강하게 지시하고, 사람들은 더 오래 기다린다. 전략보다 눈치가 빨라야 산다.'고집세'라는 것도 있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는데도 기존 결정을 고수할 때 조직이 치르는 비용이다. 시장이 달라졌고, 경쟁자가 움직였고,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겼는데도 처음 정한 방향을 붙든다. 체면 때문이다. 쉽게 말해, 쪽팔려서다.결정을 바꾸려면 어제의 판단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왜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느냐는 비난도 감수해야 한다. 이런 게 싫어 잘못된 줄 알면서도 계속 간다. 일관성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체면을 조직의 비용으로 보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는 에이허브 선장이 드물게 생각을 바꾸는 장면이 나온다.피쿼드호는 이미 여러 고래를 잡아 기름통을 채운 상태였다. 어느 날 배 안으로 들어온 물에서 적지 않은 고래기름이 발견된다. 화물칸의 기름통 어딘가에 구멍이 난 것이다. 일등항해사 스타벅은 배를 세우고 기름통을 하나씩 끌어올려 새는 곳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에이허브는 거부한다. 그의 관심은 기름에 있지 않았다. 배의 본래 목적은 고래를 잡아 기름을 싣고 돌아가는 것이었지만, 에이허브에게 피쿼드호는 더 이상 포경선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다리를 잃게 한 흰고래를 추격하는 복수의 배였다. 기름이 새든 말든 흰고래를 쫓는 속도를 늦출 수는 없었다.스타벅은 반박한다. 이대로 두면 하루 동안 잃는 기름이 앞으로 1년 동안 새로 얻을 기름보다 많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2만 마일을 항해해 얻은 것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에이허브는 격노한다. 총을 들어 스타벅을 위협하기까지 한다. 스타벅은 선실을 나가면서 한마디를 남긴다.에이허브는 에이허브를 조심하라고.잠시 뒤 에이허브는 갑판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배를 세우고 기름통을 끌어올리라고 명령한다. 방금 전까지 거부했던 스타벅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선원들은 돛을 조정해야 했고, 항해는 지연됐으며, 무거운 통을 하나씩 옮겨야 했다. 적지 않은 변경 비용이 발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 결정을 지켰다면 더 많은 기름을 잃었을 것이다.이 장면만 놓고 보면 에이허브는 제법 합리적인 리더다. 자신의 명령을 뒤집고, 부하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다만 멜빌은 에이허브가 왜 마음을 바꿨는지 하나로 확정하지 않는다. 에이허브 자신도 선원들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결정을 바꾸는 시험은 통과했지만 설명의 시험은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설명 없이 결정을 바꾸는 리더는 설명 없이 결정을 고집하기도 쉽다. 에이허브는 작은 결정은 바꾸었지만 가장 큰 결정은 끝내 바꾸지 않았다. 기름통은 수리했지만 항해의 목적은 수리하지 않았다.변덕세는 당장 보이지만 고집세는 대개 늦게 청구된다. 변덕세를 아끼려다 훨씬 큰 고집세를 물기도 한다.결정을 바꾸는 데에는 비용이 든다. 그런데 결정을 바꾼 사람과 그 비용을 내는 사람이 다르다. 그래서 결정을 바꾸려면 네 가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무엇이 새로 발견됐는지,그 정보가 과거 판단의 어떤 전제를 무너뜨렸는지,바꿀 때와 바꾸지 않을 때 어느 쪽의 비용이 더 큰지,이미 발생한 손실을 누가 감당할 것인지.이 질문들에 답할 수 있다면 번복은 변덕이 아니라 판단의 갱신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 질문이다. 좋은 리더는 판단을 바꿔 생긴 비용을 "왜 미리 제대로 하지 못했느냐"는 말로 부하에게 떠넘기지 않는다. 새로운 정보에 따라 자신이 결정을 바꾸었고, 그 때문에 비용이 생겼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변경의 권한을 가진 사람이 변경의 비용도 책임져야 한다.리더가 결정을 내리면 언젠가 계산서가 온다. 리더에게 필요한 것은 말을 바꾸지 않는 능력이 아니라, 두 장의 청구서를 함께 들여다보는 능력이다. 누구의 이름이 적혀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 ⑭]아침 라디오를 느리게 하자
오전 7시 58분, 강변북로는 오늘도 꽉 막혀 있다. 라디오에서는 익숙한 목소리로 교통정보가 흘러나온다. 정체를 공인해준다.제길, 빠져나가려면 꽤 오래 걸리겠군.8시 짧은 뉴스에 이어 시사 프로그램이 다시 시작된다. 여야 의원이 나와 오늘의 이슈를 토론한단다. 아침부터.말이 좋아 토론이지, 자기 입장의 고함이다. 질문은 짧고, 답은 길고, 반박은 더 길다. 진행자는 중재하는 척하고, 출연자는 듣는 척한다. 각자 준비해온 말만을 꺼내놓는다.나는 그런 목소리 속에서 핸들을 꽉 잡는다. 이 방송을 듣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켜놓은 것이다.시사 라디오는 부지런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치 뉴스를 쉬지 않고 나른다. 누가 누구를 공격했고, 누가 무슨 말을 번복했으며, 어느 쪽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취해야 하는지.정보량은 꽤 많다. 그런데 하루가 끝날 무렵, 무언가를 많이 알게 됐다는 느낌보다 무언가에 많이 시달렸다는 기분이 든다. 분노는 쌓였고, 피로는 늘었는데, 달라진 것은 없다.정치 뉴스가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시민은 알아야 하고, 권력은 감시되어야 한다. 말의 싸움도 때로는 필요하다.다만 그것이 하루의 첫 번째 목소리여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눈을 뜨자마자 분노를 공급받고, 출근길부터 진영의 말투를 익히며, 커피 한 잔 다 마시지 못한 몸으로 국가의 운명을 걱정하는 일이 과연 건강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프랑스에는 '프랑스 앵테르(France Inter)'라는 공영 라디오가 있다. 뉴스와 시사를 다루는 대중 라디오이지만, 여름이면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한 명의 고전 작가나 한 편의 고전을 붙잡고 한 계절을 건넌다. 몽테뉴의 질문을 되묻고, 돈키호테와 산초의 대화를 다시 펼친다. 보들레르, 파스칼, 프루스트, 호메로스, 빅토르 위고 같은 이름들이 아침 공기 속으로 퍼져나간다.목소리는 낮고 느리다. 결론을 서두르지 않는다. 오늘 반드시 알아야 할 쟁점도 없고, 내일 뒤집힐 속보도 없다. 대신 오래된 문장을 다시 읽는다.사람은 왜 허영에 빠지는가.우리는 왜 모험을 떠나는가.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실패한 인간은 정말 실패한 인간인가.당신의 분노는 당신의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 아침마다 주입해준 것인가.방송은 책으로도 나왔다. 매년 한 편씩 쌓였다. '함께 하는 여름' 시리즈다. 라디오가 흘려보낸 말이 책이 되고, 여름의 목소리가 독서 목록이 된다.TBS는 한때 사라질 위기까지 갔다. 옳고 그름을 따질 생각은 없다. 누군가는 지나치게 편향됐다고, 누군가는 불편한 방송을 압박하려 했다고 말할 것이다. 둘 다 어느 정도는 근거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논쟁 너머에서 한 가지는 생각해볼 만하다.살아 있을 때도 시사였고, 사라질 뻔할 때도 시사가 문제였다. 철학자를 불러 한 시간을 내준 적이 얼마나 있었는가. 시인이 나와 자기 시를 읽어준 적이 얼마나 있었는가. 공영이라는 이름을 달고도, 공적 사유를 위한 시간은 얼마나 있었는가.공영 라디오가 정치의 도구가 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 일에는 자주 분노한다. 그러나 공영이 현실 정치만을 말하는, 그 빈곤에는 좀처럼 분노하지 않는다. 앞엣것은 권력의 문제고, 뒤엣것은 상상력의 문제다. 우리는 권력의 오용은 쉽게 알아채면서, 상상력의 부재는 너무 쉽게 당연하게 여긴다.들린다는 것과 듣는다는 것은 다르다. 시사 라디오는 들린다. 철학 라디오는 듣게 한다. 전자는 귀에 닿고, 후자는 어딘가에 걸린다. 전자는 반응을 요구하고, 후자는 생각을 남긴다. 전자는 지금 당장 내 편과 네 편을 나누게 하지만, 후자는 내가 왜 그렇게 빨리 편을 나누고 싶어 하는지를 묻는다.팟캐스트도 있고, 유튜브도 있다. 찾으면 있다. 그러나 찾아야만 들을 수 있는 것과, 흘러나오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선택이고, 후자는 환경이다. 선택은 의지가 있는 사람의 몫이지만, 환경은 의지가 약한 사람까지 조금씩 바꾼다.한국의 공영 라디오가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철학자와 시인을 불러 느리게 이야기를 나누면 어떨까. 한국 철학만이 아니라 세계의 철학으로, 한국 문학만이 아니라 세계의 문학으로. 아침 뉴스 사이에 니체가 끼어들고, 출근길에 보르헤스가 흘러나오는 라디오. 점심 무렵에는 장자가 지나가고, 퇴근길에는 버지니아 울프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거는 라디오.공영 방송의 존재 이유는 시장이 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다. 시장은 자극을 판다. 공영은 사유를 나눠야 한다.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그리 대단한 일인가. 프랑스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하고 있는 일이다.분노는 방향을 알려준다. 사유는 속도를 조절한다.나는 오늘 아침 어느 의원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몰랐다. 대신 돈키호테가 왜 풍차를 향해 달려갔는지를 조금 더 생각했다. 풍차가 거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때로 인간은 틀린 대상을 향해서라도 달려가야 자기 삶의 모양을 얻는다. 어느 쪽이 더 유용한지는 모른다. 다만 어느 쪽이 더 오래 남는지는 안다.느린 목소리는 늦게 도착한다. 그래서 더 오래 머문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 ⑬]배관공이 된 경제학자-래포 시장과 오만의 비용
지난 연말 IRP 포트폴리오를 바꾸며 은행 종목 ETF를 조금 추가했다. 요즘처럼 살벌한 투자판이라면 차라리 '은행 같은 악당'들이 낫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몇 년 전부터 생각하던 일이었는데, 불장에 데이고 난 뒤에야 겨우 실행에 옮겼다.물론 나는 또렷하게 기억해 냈다. 10년간 불입했던 퇴직연금이 DB형에 묶여 고작 세전 연 1% 안팎의 수익을 냈던 사실을.그 정도면 은행은 내게 한 번쯤은 물었어야 했다."이대로 괜찮으시겠습니까."물론 묻지 않았다. 은행은 친절했지만 친절의 방향은 언제나 은행 쪽이었다. 창구 직원은 웃었고, 앱은 반짝였고, 상품 설명서는 길었다. 그러나 정작 내 노후가 1% 안팎의 수익률로 천천히 마르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크게 말해주지 않았다.전문가 추천대로 여러 펀드를 섞었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말도 들었다. 그래서 바구니를 여러 개 샀다. 문제는 계란이 아니라 바구니값이었다. 이번엔 아예 마이너스였다. 더 이상 '눈탱이'를 맞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공부해 보기로 했다.그런데 경제학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상한 일이 생겼다. 세상이 더 잘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이 더 또렷해졌다. 경제학은 나를 똑똑하게 만들기보다,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더 정교하게 알려주었다. 나는 경제학을 배운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배관의 목록을 조금 늘렸을 뿐인지도 모른다.최근 미국 금융시장에서 래포, 곧 환매조건부채권 시장이 다시 조용히 주목받고 있다. 터졌기 때문이 아니다. 터질 때마다 가장 먼저 의심받는 배관이기 때문이다.래포 시장은 금융의 실핏줄이자 지하 배관이다. 은행과 증권사, 헤지펀드가 국채를 담보로 맡기고 짧은 기간 돈을 빌렸다가 다시 갚는 시장이다. 말하자면 거대한 전당포다. 맡기는 물건이 금반지가 아니라 미국 국채이고, 돈을 빌리는 사람이 동네 상인이 아니라 세계 금융기관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주식시장의 화려한 전광판, 인공지능 기업의 시가총액, 중앙은행 총재의 한마디가 금융의 거실이라면, 래포 시장은 그 아래 묻힌 배관이다. 막히는 순간 가장 높은 곳부터 흔들린다.문제는 이 조용한 배관 속에서 레버리지가 자라난다는 점이다. 헤지펀드들은 국채를 담보로 자금을 빌려 현물을 사고, 선물을 팔아 그 사이의 작은 가격 차이로 수익을 만든다. 베이시스 트레이드다. 최근에는 스와프 스프레드 거래 같은 다른 상대가치 거래도 같은 압력을 보탠다. 이름은 달라도 구조는 같다. 작은 차이를 크게 빌려 먹는 일이다.평온할 때라면 전략이라 불러도 될 거다. 시장의 작은 틈을 찾아내고, 가격 차이를 줄이며, 유동성을 공급하는 일처럼 보인다. 금융은 늘 자신에게 좋은 이름을 붙이는 데 능숙하다.그러나 유동성이 마르는 순간 전략이 아니라 의존이 된다. 자기 돈으로 들고 있는 국채와 빌린 돈으로 들고 있는 국채는 같은 국채가 아니다. 전자는 자산이고, 후자는 약속이다. 약속은 때로 자산보다 더 빨리 흔들린다.배관은 평소에는 물을 흘려보낸다. 위기 때는 공포를 흘려보낸다. 1998년의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 LTCM은 역사상 가장 똑똑한 바보들의 모임처럼 기억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과 수학 천재들이 모인 그 펀드는 절대 지지 않는 수식을 가졌다고 믿었다. 파산 확률은 우주의 나이 동안 단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시장은 우주의 나이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자 담보는 담보를 불렀고, 매도는 매도를 불렀고, 공포는 더 큰 공포를 불렀다.그들이 놓친 것은 수학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가격 차이가 언젠가 정상으로 돌아올 수는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그 순간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지는 계산하지 못했다. 투자에서 맞는다는 것과 버틴다는 것은 다르다.시장은 묻는다. 당신 말이 맞을 수 있다. 그런데 그때까지 버틸 수 있는가.수식은 진화했지만 오만은 오래 산다.톰 울프의 『허영의 불꽃』에는 스스로를 우주의 지배자라 불렀던 채권 트레이더가 등장한다. 어느 날 밤 작은 길 하나를 잘못 든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울프는 그것을 허영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것을 배관이라고 부른다.LTCM이 무너지던 해, 나는 배관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금융시장의 지하실은커녕 내 퇴직연금의 수도계량기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것이 눈탱이의 본질이다. 사기를 당한 것이 아니다.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몰라도 괜찮다고 믿었던 것이다.모르는 것과 모른 채 맡기는 것은 다르다. 모르는 것과 모른다는 사실을 잊는 것은 더 다르다.우리는 모두 자기 삶의 거실에는 관심이 많다. 그러나 그 삶을 실제로 버티게 하는 배관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현금흐름, 부채, 건강, 관계, 시간. 그리고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능력. 이런 것들은 빛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늦게 본다. 늦게 본다는 것은 대개 비싸게 본다는 뜻이다.공부를 조금 했지만 나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래도 달라진 게 있다면,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점이다.진짜 배관공은 물이 멈춘 뒤에야 드러난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허영의 불꽃이 한 번 꺼진 다음이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⑫]배터리가 먼저 닳는다-하이데거의 잡담, 한병철의 피로
휴대전화가 먼저 피곤해진다.배터리 잔량 39%. 아직 오전이다.무거운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알림은 이미 여러 겹이다.선거철이다.모두가 입장을 가지고 있다.누군가는 단정했고,누군가는 분노했고,누군가는 해설을 붙였다.나는 아직 깊이 생각하지 않았는데이미 결론이 나버린 세계가 도착해 있다.지친다.몸이 아니라 반응이 먼저 닳는다.생각보다 먼저 도착한 결론들 사이에서나는 잠깐 멈출 틈을 찾는다.그 틈이 잘 보이지 않는다.아니, 보이기는 한다.다만 그 틈으로 들어가기 전에다음 알림이 온다.■ 허락된 알림, 허락된 긴장예전에는 회의 중에도 휴대전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임원회의 자리에서 알림이 울리면 잠깐 고개를 숙였다.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달라졌다.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를 비울 수도 있었다.누군가는 말을 멈추지 않았고,누군가는 내가 누구의 메시지를 받는지 궁금해했다.그건 신뢰처럼 보였다. 동시에 긴장이었다.아무 때나 알림을 확인할 수 있다는 건누군가가 아무 때나 나를 호출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권한은 늘 족쇄를 함께 데리고 온다.열려 있는 통로는 선택권이 아니라 상시 대기 상태다.그 시절의 알림은 결정과 연결되어 있었다.짧은 문장 하나가 방향을 바꾸기도 했다.배터리는 빨리 닳았지만내가 왜 닳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결정을 내려야 했고,대답을 해야 했고,책임이 있었다.일이 나를 소모시켰다.피로는 설명이 가능했다.설명 가능한 피로는 견딜 만했다.■ 잡담 속에서 사는 사람지금은 결정이 줄었고 책임도 가벼워졌다.그런데도 더 빨리 닳는다.뉴스 몇 개를 읽고,댓글 몇 줄을 훑고,짧은 동의와 짧은 냉소를 오간다.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일상 속에 유통되는 말을 '잡담(Gerede)'이라 불렀다.잡담은 나쁜 말이 아니다.거짓말도 아니다.그저 깊이를 통과하지 않은 말이다.이미 누군가가 정리해 둔 문장을다시 말하는 상태.생각의 형식을 빌렸지만생각의 과정은 생략된 언어다.생각을 하기 전에이미 누군가의 생각을 공유한다.말은 내 것이지만문장은 내 것이 아니다.하루에도 수십 번이미 완성된 문장을 소비한다.생각은 깊어지지 않는데감정은 계속 움직인다.작은 분노,짧은 연대,가벼운 판단.하루가 끝날 무렵무엇을 깊이 생각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스스로를 소모하는 시대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오늘날 우리는 억압받는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주체에 가깝다고 말한다.과거의 사회가 "해야 한다"로 움직였다면 지금의 사회는 "할 수 있다"로 움직인다.강요가 사라진 자리에 자기 착취가 들어선다.감시자는 없다.마감도 없다.벌칙도 없다.그런데도 나는 쉬지 않는다.참여하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고,입장을 밝히지 않으면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감각.그 감각이 나를 계속 화면 앞으로 데려온다.아무도 즉각적인 의견을 요구하지 않는다.그럼에도 나는 계속 반응한다.좋아요를 누르고,공유를 하고,짧은 단정으로 스스로를 위치시킨다.성과는 쌓이지 않는데소모는 분명하다.예전에는 일이 배터리를 닳게 했다.요즘엔 반응이 배터리를 깎는다.그때의 피로는 무거웠고지금의 피로는 얇다.얇아도 오래간다.조용히, 그러나 지속적으로나를 낮은 전압 상태로 만든다.■ 덜 반응하는 기술어느 날은 휴대전화를 뒤집어 두고 책을 펼친다.알림은 오지 않는다.문장은 도망가지 않는다.한 문장을 세 번 읽는다.뜻이 바로 정리되지 않는다.손이 자꾸 휴대전화를 찾는다.그래도 글을 놓지 않는다.느림이 답답함이 아니라 저항이 된다.읽는 동안 나는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라멈춰 있는 사람이 된다.문장은 나를 재촉하지 않는다.당장 판단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생각은 천천히, 내 속도로 모양을 갖춘다.그 속도가 낯설다.뉴스의 속도와 다르고,알림의 속도와 다르다.처음엔 느리다고 생각했는데사실은 한동안 잊었던 내 원래의 속도는 아니었을까.오늘은 조금 덜 반응하기로 한다.세상은 그대로다.다만 나는 덜 닳는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 ⑪]뒤늦게 용감해진 당신에게 묻다
예전에 몸담았던 조직이 비난의 대상이 될 때, 기분이 묘해진다.먼저 드는 생각은 떠나서 다행이었다는 것이다. 세상만사(世上萬事)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으니, 험한 꼴을 비켜간 셈이다.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면 다른 생각이 따라온다. 조금 더 오래 있었더라면, 지금의 상황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근거는 없지만.어느 쪽이든 과거가 부정되는 느낌이어서 기분이 좋지 않다. 사람들이 어떤 집단을 비난하는 방식이, 그 안에 있었던 나의 시간을 함께 욕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라도 목소리를 내기란 만만하지 않고, 침묵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장면이 떠오른다. 그때는 쓰지 못했던 문장들이 이제는 쉽게 다가온다.■ 장면 1방 안은 조용했다."왜 그렇게 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가, 분위기가 한 번 꺾인 뒤부터였다.몇몇은 시선을 내렸고, 몇몇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노트북을 두드렸다.누군가는 물컵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영리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침묵했다. 입을 다무는 것이 가장 안전한 의견이라는 듯이.(좋은 기자의 태도는 자리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질문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고 배웠다. 이미 기자가 아니었지만, 그 습관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장면 2회사는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했다.더 빠르게, 더 크게, 더 멀리.나는 그때, 커질수록 옆을 보고, 때로는 뒤를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돌아온 것은 질책이었다. 아직 그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라는 말.문을 나서며 '괜히 말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누군가의 얼굴보다, 나 자신의 불안이 더 또렷했기 때문이다.타이밍도 좋지 않았다.조직 생활을 하고 있다면, 꽤나 익숙한 장면일 것이다. 평가, 보상, 다음 기회. (더 이상) 말하지 않는 데에는 언제나 그럴듯한 이유가 있고, 그것을 '현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그렇게 겪고도 또다시 문제를 제기하는 나의 감각이 때로는 성가시다. 하지만 그것을 애써 고칠 생각은 없다. 불편함이 사라지는 순간, 아마도 내가 나를 배신하게 될 것 같기 때문이겠다.조직이 성장할수록 침묵은 빠르게 퍼진다.상처받은 사람도, 이상한 결정도, 대부분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다.그 침묵이 각자의 안전이 된다.그러다 그 힘이 흔들리면, 풍경은 바뀐다.사람들이 모여들고, 말들이 쏟아진다.조금 전까지 조용하던 곳이 갑자기 정의의 광장이 된다.쓰러진 대상은 그냥 두어지지 않는다. 탈탈 털리고, 자근자근 밟힌다. 넘어졌기 때문이다.프랑스의 사상가 미셀 드 몽테뉴는 『에세』에 이렇게 썼다."인간은 자신이 비겁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그때의 조용한 방을 떠올린다.사람들은 과거의 침묵을 견디는 대신, 현재의 분노로 자신을 씻어낸다. 쓰러진 대상을 더 세게 밟을수록, 그에게 고개를 숙였던 시간이 더 빨리 지워지는 것처럼 느끼는 것일까.분노는 종종 정의보다 먼저 온다.정말로 옳아서가 아니라, 예전에 옳지 못했다는 기억이 너무 아프기 때문일 거다.개인도, 군중도 대개 뒤늦게 용감해진다. 상대가 강할 때는 말하지 않고, 약해졌을 때에야 외친다.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이렇게 적었다."악은 사악해서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그때 우리는 생각하지 않았다.옳고 그름을 따진 것이 아니라, 안전과 불안을 계산했을 뿐이다.손익이 맞는 쪽으로, 아주 조용하게.몰락한 힘 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은 언제나 비슷하다.강할 때는 침묵. 약해지면 정의.그저 유리한 쪽에 먼저 섰을 뿐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았고, 어쩌면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뒤늦은 정의는 정의라기보다 계산에 가깝다.그리고 침묵이든 웅변이든, 우리가 정의라고 부르는 것들이 오랜 시간에도 살아남을 진실인지는 아직 알기 어렵다.우리가 보고 있는 장면들은 대부분 이미 오래전에 쓰였다.니체는 도덕으로 포장된 복수를 말했다.토크빌은 다수의 폭정을 경고했다.그러나 이 글이 묻고 싶은 것은, 아마도 이 질문일 것이다.그들이 강했을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그리고 그들이 악이었을 때, 당신은 정말 선이었는가.
[김영태의 읽는 인간⑩] 침묵할 때와 나서야 할 때-'광장'의 쇼랑과 '자기만의 방'의 파스칼
봄은 나서는 자들의 계절이었다. 광장에, 거리에 목소리가 모였다. 그런데 요즘의 봄은 그 양상이 조금 다르다. 같은 장면이 동시에 '화면'에서도 펼쳐진다. 겨우내 안으로 파고들었던 확신은 알고리즘 위로 떠오르고, 소수가 공유하던 독설은 네트워크를 통해 증폭된다. 빠르게 복제되고, 오래 노출된다.다만 침묵은 검색되지 않는다.새로운 무대가 열리면 어김없이 웅변이 그 자리를 채운다. 확신에 찬 목소리, 상대를 베어 넘기는 날 선 문장들. 사람들은 화려한 말의 잔치에 환호한다. 그러나 조명이 꺼지고 난 뒤, 남는 것은 의외로 많지 않다. 말이 거칠고 화려할수록 우리는 종종 그 안의 빈자리를 늦게 알아차린다. 소란스러운 언어는 때로 자신의 불안을 덮기 위한 소음처럼 들리기도 한다.무대 아래에는 시선을 낮추고 말을 아끼는 이들이 있다. 세상은 그들을 내성적이거나 소극적이라 부르지만, 어쩌면 말의 무게를 더 오래 견디는 쪽은 그들일지도 모른다.■ 웅변가의 독설, 그 가벼운 유혹살면서 마주한 웅변가들은 대개 매혹적이었다. 명쾌했고 뜨거웠다. 그러나 무대가 끝나고 조명이 꺼진 뒤, 그들과 마주 앉아 보면 묘한 공허가 느껴지곤 했다. 방금 전까지 세상을 구원할 듯 외치던 문장들은 사라지고, 타인의 인정에 목마른 초조함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독설은 때로 가장 쉬운 방식의 배설이 된다. 상대를 무너뜨림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가장 손쉬운 방식의 권력 행사다.에밀 쇼랑(Emil Cioran)은 '태어났다는 불행'에서 확신과 웅변의 허위를 여러 차례 지적한다. 그는 인간이 확신에 매달릴수록 스스로를 더 깊이 속이게 된다고 말한다.웅변은 진리를 드러내기보다, 때로 자기기만을 세련되게 포장하는 기술에 가깝다. 나서는 자들의 언어는 타인을 향한 칼날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자기 안의 불안을 향해 휘두르는 비명일지도 모른다.미디어는 질문보다 확신을 좋아한다. 망설임은 편집되고, 단정은 제목이 된다. 그 구조 속에서 웅변은 더욱 힘을 얻는다.■ 수줍은 외면, 그 깊은 응시소란 속에서 고개를 숙인 이들이 있다. 그들은 말할 줄 몰라서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복잡함을 알기에 신중할 뿐이다.그들의 수줍음은 나약함이라기보다, 상황의 무게를 감각하는 예민함에 가깝다.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팡세'에 이렇게 적었다."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사실, 즉 방 안에 조용히 머물러 있을 줄 모른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나서는 자들이 소음으로 자신을 채울 때, 침묵하는 자들은 고독 속에서 생각을 가다듬는다. 그들의 외면은 비겁함이 아니라, 거짓된 무대에 쉽게 동조하지 않겠다는 거리두기일 수도 있다.물론 침묵이 언제나 고결한 것은 아니다. 침묵 역시 계산이 되는 순간 다른 얼굴을 갖는다. 말하지 않음이 신중함이 아니라 편의가 될 때도 있고, 책임을 미루는 방식이 될 때도 있다.■ 말의 배반과 침묵의 복권우리는 오랫동안 웅변을 지성으로, 침묵을 무지로 오해해왔다. 그러나 인문학은 종종 그 반대를 말한다.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키치'를 불편한 질문을 제거하고 세계를 단순한 감동과 확신으로 포장해 버리는 태도라 정의한다.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대답의 세계. 그곳에서 확신은 미덕이 되고, 망설임은 나약함이 된다. 웅변이 지배하는 곳에서 진실은 종종 소음 뒤로 물러난다. 매끈하게 가공된 문장만이 떠다닌다.독설이 현란한 이유는 알맹이가 비어 있어서다. 반대로 침묵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안에 너무 많은 생각이 머물러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요한 응시에서 찾은 힘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계절,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수줍음이 아니라 말의 과잉이다. 웅변하는 혀는 쉽게 단정하지만, 망설이는 눈동자는 쉽게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지금 우리는 어떤 말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는가. 큰 목소리인가, 아니면 조용히 생각하는 사람의 눈빛인가.우리가 오늘 내뱉은 확신 속에 정말 생각이 충분히 머물러 있었는지 묻게 된다.어쩌면 곁에서 조용히 시선을 피하던 누군가는 더 오래 고민하고 있었을 거다.큰 목소리는 늘 먼저 도착한다. 그러나 오래 남는 것은 대개 늦게 도착한 생각이었다.그래서 책을 읽는다.이미 오래전 침묵 속에서 사유를 다듬은 이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소음이 아니라 생각을 따라가기 위해.만사유책(萬事有冊).읽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⑨]달팽이의 보폭으로 2월을 복구하다-고바야시 잇사의 달팽이와 니체의 망치
새해의 결심이 유효기간을 다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한 달이다. 2월의 찬 공기 속에는 1월의 호기로움이 남긴 미세한 민망함들이 떠다닌다. 헬스장 바닥에 떨어진 땀방울보다, 책상 머리맡에 적어둔 계획표의 여백이 더 무겁다.사람들은 이 시기를 '실패'라고 명명하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2월은 실패의 달이 아니라, 비로소 내 몸에 맞는 보폭을 찾아가는 '교정'의 시간이다. 1월의 계획이 남의 눈을 의식한 전시용이었다면, 2월의 재구성은 내 영혼의 안녕을 묻는 실존적 복구이어야 한다.■ 숫자가 지배하던 2월의 회의실임원 혹은 CEO 시절의 2월은 늘 서늘했다. 입춘이 지나도 봄은 오지 않았다.초라한 1월의 성적표를 들고, 연간 계획을 '현실화'한다는 명목으로 다시 숫자를 만졌다. 그곳에서 계획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라 달성해야 할 고지였고, 수정은 곧 무능의 자백이었다. "올해 목표를 재구성해라"는 지시는 "더 쥐어짜라"는 말의 우아한 통역어였다. 우리는 그럴듯한 그래프를 그려내야 했다. 하지만 그 계획 안에 정작 '나'라는 인간의 리듬이 들어설 자리가 있는지는 묻지 않았다.숫자가 커질수록 개인의 호흡은 가빠졌고, 조직의 효율이 높아질수록 개인의 감수성은 말라갔다. 그때 우리가 세운 것은 계획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가둘 창살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이쿠가 건네는 서두르지 않는 위로조직을 떠나 내 책상 위에 느슨한 계획표를 펼쳤을 때, 에도 시대 시인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의 하이쿠가 떠올랐다."달팽이여천천히 올라가거라후지산을."이 짧은 문장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우리는 왜 스스로를 달팽이가 아니라 경주마로 착각하며 살았을까.1월의 계획이 우리를 다그친 이유는 우리가 오르는 산이 높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몸이 허락하는 속도를 잊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혹은 우리가 우리의 '점액'으로 땅을 딛는 법을 잊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달팽이에게 중요한 것은 산의 높이가 아니라 자기 몸의 리듬이다. 천천히 간다는 것은 멈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이 정해준 시계가 아니라, 내 근육과 신경이 허락하는 속도로 세상을 감각하며 나아가는 일이다.2월은, 바로 그 보폭을 다시 찾는 시간이다.■ 헤세의 나무와 니체의 망치우리는 계획이 무너졌을 때 왜 이토록 괴로워하는가.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철학자는 '망치로 우상을 두드려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 망치는 파괴의 도구라기보다, 속이 빈 우상을 가려내기 위한 청진기 같은 진단의 도구였다. 그렇게 본다면, 어쩌면 우리가 1월에 세운 계획은 과거의 나를 벌주기 위해 만들어낸 도덕적 우상에 다름 없다.지금의 나를 부정하기 위해 세운 계획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헤르만 헤세는 '나무들'에서 나무를 이렇게 묘사한다.나무는 겨울 동안 바깥으로 자라지 않는다.대신 안으로 침잠하며 중심을 단단히 하고, 다가올 계절을 준비한다.2월의 시간도 그렇다. 계획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해서 삶이 멈춘 것은 아니다. 겨울의 침잠은 정지가 아니라 준비다. 계획의 재구성은 포기가 아니라, 내 삶의 뿌리를 어디로 뻗어야 할지 다시 가늠하는 도약을 위한 내면의 침잠이다. ■ 계획보다 중요한 것은 감수성이다일본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는 시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에서 이렇게 썼다."자신의 감수성 정도는스스로 지켜라이 바보 같은 놈아."2월의 계획표에 우리가 써넣어야 할 첫 문장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느낄 것인가'이다. 2월의 끝자락, 나는 당신의 계획표가 다시 한 번 더럽혀지기를 바란다.빽빽한 할 일 목록 대신, 당신을 설레게 하는 문장 한 줄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를 바란다.당신이 1월에 세웠던 계획 중에서 정말로 당신의 가슴을 뛰게 했던 것이 단 하나라도 있었는가.혹시 그 계획들은 무너진 것이 아니라, 당신의 몸이 거부한 남의 옷은 아니었는가.서두르지 마라.후지산은 도망가지 않는다.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반짝이는 흔적처럼, 당신의 2월 또한 결과가 아닌 과정의 빛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⑧]취향은 배신하지 않는다 - 프루스트의 감각과 무너지지 않는 나만의 루틴
1월은 '의지의 과부하'가 걸리는 달이다. 세상은 온통 "결심하라"는 명령어로 가득 차고, 사람들은 평소 쓰지 않던 근육을 쓰듯 비장한 각오를 쥐어짜 낸다. 하지만 단언컨대, 머리로 세운 결심은 몸의 관성을 이기지 못한다. 결심이 무너지는 것은 당신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결심 자체가 원래 그렇게 설계된 연약한 유구(遺構)이기 때문이다.우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은 비장한 각오가 아니라, 몸에 새겨진 취향이다. 습관이라고 해도 좋다. 1월에 우리가 세워야 할 것은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나를 나답게 유지해 주는 사소하지만 단단한 '감각의 의식(Ritual)'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의지보다 강한 감각의 기억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인간을 움직이는 진짜 동력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주인공을 거대한 과거의 기억으로 데려간 것은 "과거를 기억해 내겠다"는 의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연히 입안에 들어온 차 한 모금과 마들렌 한 조각의 촉각이었다.파스칼 메르시에(Pascal Mercier)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 역시 비슷한 진실을 말한다. 평생을 고전문헌학자로 살던 그레고리우스가 안락한 삶을 버리고 리스본으로 떠난 것은 위대한 결단 때문이 아니었다. 비에 젖은 포르투갈 여인의 매혹적인 음성, 그리고 우연히 손에 든 낡은 책 한 권의 촉감. 그런 것들이 그의 일상을 뒤흔들었을 뿐이다.소설은 묻는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중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한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우리의 실제 생활도 마찬가지일거다. 작은 것이 감각을 만든다. 감각이 전체가 된다. "올해는 매일 운동하겠다"는 결심보다, 운동화를 신을 때 발끝에 닿는 단단한 감촉이나 새벽 공기의 서늘한 감각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훨씬 강력한 힘이 된다. 의지는 배반하지만, 몸이 기억하는 즐거움은 배반하지 않는다. 우리의 1월이 억지로 자신을 개조하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어떤 감각에 반응할 때 가장 평온하고 단단해지는지 관찰하는 시간이어야 하는 이유다.■ '의식'을 설계하기어느 작가는 매일 아침 책상을 닦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거창한 집필 계획을 세우는 대신, 물걸레가 책상 위를 지나가는 그 서늘한 감각을 느끼며 '쓰는 몸'을 깨우는 것이다. 결심이 아니라 의식(Ritual)이다. 의식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몸이 먼저 반응하게 만든다.1월의 다이어리에 적어야 할 것은 성취해야 할 숫자가 아니라, 내가 반복할 '동사'들이라면 좋겠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물 한 잔을 마시는 감각", "잠들기 전 시집 한 권을 무작위로 펼치는 손맛". 이런 사소한 취향의 조각들이 모여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을 버티게 하는 성벽이 된다. 목표라는 이름의 깃발은 바람에 쉽게 꺾이지만, 취향이라는 이름의 뿌리는 태풍 속에서도 흔들릴지언정 뽑히지 않는다.■ 취향이 곧 존재다취향은 사치스러운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자,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나를 지켜내는 유일한 영토다. 1월에 남들이 선망하는 목표를 내 계획표에 옮겨 적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영토를 침범 당한다.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은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반응하는가'에 달려 있다.진정한 시작은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존재하던 선한 취향들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2월의 '보폭'을 고민하기 전, 그리고 3월의 '침묵'으로 들어가기 전, 우리는 1월의 한복판에서 나만의 '감각적 방어선'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무너지지 않는 루틴은 의지가 아니라 당신의 취향에서 나오므로.■ 다시 당신의 1월에게 묻는다지금 당신의 계획표에 적힌 것들 중, 당신의 '몸'이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것이 단 하나라도 있는가. 혹시 '해야 한다'는 당위의 감옥에 갇혀, 당신만의 고유한 감각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결심이 무너졌다고 자책하기 전에, 당신을 다시 일으켜 세울 나만의 사소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1월은 자신을 채찍질하는 달이 아니라, 자신을 가장 잘 대접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거창한 성공의 서사보다, 오늘 당신의 손끝에 닿는 책장의 감촉이나 커피 잔의 온기에 더 집중해 보자. 그 사소한 감각들이 모여 비로소 당신의 일 년이 완성될테니까.내게도 똑같은 주문을 건다. 세상이 강요하는 '성공의 문장'이 아니라, 내 영혼의 결에 맞는 '취향의 문장'을 찾아내고자 한다. 그 문장들이 무너지지 않는 나의 새해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⑦]'천재와 거장'과 '블랙 스완' 그리고 리더십이 필요한 순간
또 한 해를 보낸다. 칼날 위를 걸었다. 그 위태로운 날들을 버티고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기특하다는 생각이다. 반성은 하겠지만, 후회는 하지 않기로 한다.개인은 그렇다 치자. 조직은 어떨까.연말은 늘 변화를 강요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든, 더 멀리 가기 위해서든 "뭔가를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 계절이다. 많은 조직이 선택하는 가장 빠른 길은 새 리더를 들이는 일이다.하지만 그 길은, 대부분 기대를 비켜간다. 이번만은 다를까. 정말, 달라질 수 있을까.■ 조직의 구원자 찾기위기 앞에서 조직은 영웅을 찾는다. 혁신을 외치며, 변화의 깃발을 흔들어줄 단 한 사람. 기업이든 협회든 정당이든, 사람만 모이면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2017년 겨울, 20여 년 동안 가을 야구조차 멀었던 LG 트윈스도 그랬다. 팬들은 '거물 루키', '(유)명감독'을 외쳤지만, 구단은 의외의 선택을 했다. 메이저리그에서 밀려난, 타율 2할3푼1리를 찍었던 김현수에게 4년 115억원을 안긴 것이다.김현수는 매일 같은 루틴으로 타석에 섰다. 지고 돌아오는 날에도 후배에게 웃으며 말했다. "내일 이기면 되지."그리고 먼저, 묵묵히 연습했다. 밤 연습장의 불빛 아래, 배트 끝에서 울리던 규칙적인 타격음. 땀에 흠뻑 젖은 장갑이 흙 냄새와 섞이며 만들어내던 리듬. 그 소리가 팀을 조금씩 바꿨다. 모래알 같던 분위기가 벽돌이 되어 이어 붙기 시작했다. 오지환은 말했다. "김현수 앞에서 연습 많이 했다고 말할 수 있는 선수는 없다"고.그 선택은 2023년 29년 만의 통합 우승으로 돌아왔다. 2024년 잠시 흔들린 팀은 올해 다시 정상에 올랐다. 무적엘지, 챔피언. 서른일곱의 김현수는 코리안시리즈 MVP였다. (2026년 시즌을 앞두고 그는 KT로 옮겼다. 또 어떤 변화를 만들지 궁금해진다.)■ '천재와 거장' 그리고 탈레브의 질문데이비드 갤런슨은 '천재와 거장-위대한 창의성은 어떻게 탄생하는가'에서 예술가를 두 부류로 나눴다.-천재(Genius): 젊은 나이에 번뜩이는 영감으로 혁신을 낚아채는 사람, 피카소 같은 이들.-거장(Master): 오랜 시행착오 끝에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하는 사람, 세잔 같은 이들.피카소는 말했다. "나는 탐구하지 않는다. 발견한다."세잔은 말했다. "나는 그림을 통해 탐구한다."발견자와 구도자. 빠르게 불타오르는 불꽃과, 오래 버티는 등불로 비유할 수 있겠다.이 구분은 '블랙 스완'의 저자 나심 탈레브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예측 불가능한 충격 앞에서 리더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천재형은 직관으로 파고들고, 거장형은 준비로 파괴력을 줄인다. 결국 리더십은 불확실성을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가 된다. 충격을 견디는 힘을 넘어, 그 충격을 기회로 바꾸는 체질과 태도 말이다.■ 두 리더십의 얼굴― 천재형: 나폴레옹1805년 아우스터리츠. 나폴레옹은 말을 멈추고 외쳤다."저기 적을 보라. 승리가 저기 있다."군대는 불길처럼 움직였다. 그의 직관은 불꽃이었다. 유럽은 그 불꽃에 휩싸였다.그러나 불꽃은 오래 타지 못한다. 러시아의 겨울이 그 증거다.― 거장형: 이순신이순신은 기록하는 사람이었다. '난중일기'에는 바람의 세기부터 병력 관리까지 빼놓지 않고 적혀 있다.열두 척의 기적은 한 번의 영감이 아니라 수천 번의 점검이 만든 결과였다.거장의 리더십은 화려하지 않지만, 폭풍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다.― 현대 기업의 두 얼굴일론 머스크는 천재형이다. 하나의 큰 생각으로 산업을 흔든다. 하지만 한 줄의 트윗으로도 흔들린다.제이미 다이먼은 거장형이다. 수십 번의 스트레스 테스트와 리스크 점검. 위기 때 오히려 존재감을 키운 이유다.■ 문제는 리더가 아니라 리더십이다조직이 새 리더를 들이며 혁신을 말하지만, 정작 중요한 질문을 쉽게 놓친다. 그 리더가 펼칠 리더십은 지금 조직의 현실에 맞는가.밤과 낮, 회의실과 현장에서 스스로 물어보라.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숨결 같은 거장인가, 불꽃 같은 천재인가. 혹은 그 둘을 오갈 수 있는 힘인가.대답은 상황마다 달라질 것이다.*추신: 한 가지만 분명하다. 천재와 거장은 무 자르듯 나누기 어렵다. 모든 영감은 결국 반복 위에서 완성되고, 모든 반복에는 작은 발화점이 필요하다. 백조의 우아한 유영도 물속의 쉼 없는 발짓 덕분이다. 절반은 실패지만, 남은 절반이 세상을 조금씩 앞으로 민다. 내 경험도 그 사실을 증명한다. 어쨌거나 미리, 해피 뉴 이어. ━김영태은행원, 신문기자와 방송기자, 벤처 창업가, 대기업 임원과 CEO, 공무원 등을 지냈다. 새로운 언어와 생태계를 만날 때마다, 책을 읽고, 문장을 쓰며 방향을 찾았다. 경영혁신과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경험과 성과를 쌓았다. 현재 컨설팅회사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설립, 대표를 맡고 있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⑥]흡연자를 위한 변명: 양지(陽地)로 나온 뒷담화 - '침묵의 나선'과 '어셔가의 몰락'
담배를 피운 지 꽤 오래됐다. 끊은 적도 무지 많았다. 몇 달, 몇 년 동안 안 피운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다시 피우게 된 이유를 물으면 이렇게 답하곤 했다. 직장을 옮겼기 때문이라고. 의지박약자의 변명으로 들릴 줄 안다. 하지만 사실은 그랬다.직장을 옮기면 직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잠시나마 왕따가 되기 쉽다. 그런데 직급이나 신참에 대한 벽이 그나마 약해지는 곳이 있다. 흡연구역이 그렇다.흡연자 수가 줄어든 요즘, 사무실과 최대한 거리를 둔 흡연구역은 소수의 흡연인들이 더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공간이다.흡연구역은 담배만 피우는 곳이 아니다. 뒷담화를 하는 곳이다. 뒷담화를 듣는 곳이기도 하다.■ 조직의 숨은 풍향계, 뒷담화의 두 얼굴조직에서 가장 큰 문제는 흔히 생각하는 매출 부진, 프로젝트 지연, 인력 부족 같은 표면적 이슈들이 아니다. 이런 문제들은 대부분 그 아래 깔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이 관계의 진정한 모습은 정식 회의록이나 공식 보고서에 담기지 않는다. 가장 솔직하고 날것의 신호는 바로 뒷담화라는 형태로 존재한다.회의가 끝나고 복도 구석에서 들리는 작은 속삭임. 점심시간 식당에서 오가는 낮은 목소리. 화장실, 그리고 흡연구역의 소소한 소리들이다."저 사람, 진짜 일 안 해.""이번 결정, 좀 이상하지 않아?"사소해 보이는 몇 마디가 팀 분위기를 흔든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조직의 풍향계를 가늠하게도 한다. 단순한 수다 같지만, 그 속에는 팀원 간 긴장과 불만, 신뢰의 정도, 심지어 다음 전략에 대한 암묵적 평가까지 담겨 있다.■'침묵의 나선'과 대나무숲이 현상은 엘리자베스 노엘레-노이만의 '침묵의 나선' 이론으로 설명된다. 핵심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이 다수와 다르다고 느낄 때, 고립될 것을 두려워해 침묵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뒷담화는 바로 이 침묵의 나선이 작동하는 방식과 직접 연결된다. 조직의 공식 소통 창구가 막히거나, 솔직한 의견이 불이익으로 돌아올 때 사람들은 불만을 드러낼 채널을 잃는다. 팀은 표면적으로 조용하고 평화롭지만, 불만은 더 깊숙이 숨어 들어가고 결국 곪는다.사장 시절, 집무실 한쪽 벽에 커다란 그림을 걸어뒀다. '대나무 숲' 그림이었다. 뒷담화를 '앞담화'로 바꾸면 좋겠다는 생각, 서랍 속에, 익명 속에 감춰진 불만을 책상 위로, 이름을 걸고 제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결과는? 잘 안됐다. 듣고 싶은 이야기는 못 들었고, 듣기 싫은 이야기만 잔뜩 들었다.)■ 보이지 않는 소리와 '어셔가의 몰락'에드거 앨런 포의 '어셔가의 몰락'은 '보이지 않는 소리'가 한 개인과 가문을 어떻게 파멸로 이끄는지 극적으로 보여준다.주인공 로더릭 어셔는 극도로 예민하고 신경쇠약에 시달린다. 그는 자신의 가문이 곧 몰락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고, 주변의 기이한 소리와 흔들리는 집이라는 풍문을 통해 불안이 증폭된다. 그의 내면적 불안은 현실과 분리되어 망상으로 커지고, 결국 스스로의 망상에 의해 가문 전체를 파멸시킨다.뒷담화는 어셔 가를 덮친 망상처럼 조직을 망치기도 한다. 불안과 불신을 증폭시키고, 조직의 정상적인 혈액순환을 방해한다. 심해지면, 결국 혈관이 터진다.■ 양지에 나온 뒷담화그러나 뒷담화는 동시에 조직의 생존에 필요한 소중한 경고를 담고 있다. 고혈압은 심근경색의 주요 위험인자지만, 미리 알고 관리하면 심장마비를 피할 수 있다. 뒷담화를 단순한 험담으로 치부하고 억누르면 독이 된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듣고 이해하면 최악을 피하는 약이 될 수 있다.요즘의 뒷담화는 오프라인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블라인드 앱 같은 것들이 지속적으로 인기를 얻는 이유가 있다. 공식 채널에서 말할 수 없는 진실, 직장 내 불만, 임금 문제, 불합리한 의사결정에 대한 솔직한 목소리를 익명이라는 안전장치 속에서 터뜨리는 것이다.게다가 뒷담화 속에는 조직의 생존과 발전에 필요한 단서가 담겨 있다. 공식 채널로는 말하기 어려운 진짜 속마음을 드러내고, 보이지 않는 정보를 교환하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실마리를 찾기도 한다. 집단지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진짜 '대나무숲' 역할을 하기도 한다.뒷담화는 두 얼굴을 가진 언어다. 오늘날에는 절반쯤 양지(陽地)에 나와 있다.단순한 잡음으로 흘려보낼 것인가, 아니면 조심스럽게 귀 기울여 조직의 숨겨진 지도를 완성할 것인가. 선택은 당신의 조직이 '어셔가의 몰락'처럼 스스로의 망상에 갇혀 몰락할지, 아니면 양지에서 소통하며 단단히 성장할지 결정하게 한다.**당부 말씀: 이런저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좋은 뒷담화의 단서를 못 찾았다면, 다시 담배라도 피워보시길. 건강은 책임 못 진다. 이 글을 읽고 다시 피우게 됐다는 변명은 어디서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각오는 하셔야겠다, 행운을 빈다. ━김영태은행원, 신문기자와 방송기자, 벤처 창업가, 대기업 임원과 CEO, 공무원 등을 지냈다. 새로운 언어와 생태계를 만날 때마다, 책을 읽고, 문장을 쓰며 방향을 찾았다. 경영혁신과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경험과 성과를 쌓았다. 현재 컨설팅회사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설립, 대표를 맡고 있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⑤]권력과 위대함의 딜레마: '울프 홀'과 '굿 투 그레이트'
조직 안에서 권력의 움직임을 가까이 보는 일은 하루하루 전쟁터를 살피는 것과 같았다. 회의실 한쪽에서는 다음 인사의 향방을 놓고 눈빛이 교차하고, 복도에서는 승진 소식에 긴장과 기대가 뒤섞인 시선이 오갔다. 누군가는 앞으로 나아가고, 누군가는 물러났다. 한 사람만의 승리가 아니었다. 그 곁에 있던 무리들이 함께 오르고, 같이 밀렸다.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에 따라 움직이고, 사소한 귓속말 하나가 운명을 바꾸기도 했다. 나는 그 때 그 회의실과 복도에서, 권력의 냄새가 얼마나 빠르게 방향을 바뀌는지 목격했다.권력의 이동은 단순한 직급 변화가 아니라, 사람과 시스템, 눈에 보이지 않는 신호가 얽힌 복합적 과정이었다.기업과 공공의 세계 사이에 본질적 차이는 없었다. 권력의 균형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뒤엉킨, 마치 얼음과 물이 맞닿은 경계처럼 미묘했다.■ 권력의 현실과 상시적 균열힐러리 맨틀의 소설 '울프 홀(Wolf Hall)'은 권력의 이동 양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16세기 헨리 8세 궁정, 그 안에서 사람들은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이 계산하고, 더 깊이 숨죽이며 움직인다. 맨틀은 이 책으로 두 번의 맨부커상을 받았고, 세기의 소설이라는 찬사를 얻었다.토머스 크롬웰이 주인공이다. 청교도 혁명의 올리버 크롬웰과 혼동하기 쉬운데, 다른 인물이다.토머스는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잔혹한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고, 상인 수습, 변호사, 외교관을 거쳐 헨리 8세의 곁에 섰다. 캐서린 왕비와 이혼하고 앤 불린과 결혼하려는 왕의 정치적 싸움 속, 그는 브레인으로 움직였다.맨틀은 크롬웰을 이렇게 묘사한다."신과 대화할 수는 있지만, 응답을 기대하지는 않는 사람."권력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권력을 갖기 위해, 현실을 우선하는 사람.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생존과 선택의 철학이었다. 그는 상황을 읽고, 사람을 관찰하며, 움직임 하나하나에 계산을 숨겼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작은 손짓 하나에도 권력의 균형이 흔들렸다.크롬웰은 궁정에서의 미묘한 신호를 놓치지 않았다. 왕이 어느 날 갑자기 내리는 결정, 신하들의 미묘한 표정 변화, 심지어 귀족들이 서로 주고받는 비밀스러운 속삭임까지. 그 모든 것이 권력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변수였다. 오늘의 동맹이 내일의 적이 될 수 있고, 한 순간의 침묵이 치명적인 오해를 만들 수도 있었다.■ 위대한 조직의 위대한 리더경영학 거장 짐 콜린스는 'Good to Great'에서 위대한 조직을 만드는 핵심으로 '레벨 5 리더십'을 꼽는다. 겸손하지만 결단력 있는 리더, 야망과 겸손의 모순적 조합이 조직을 위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리더십의 계단은 이렇다.▴레벨1: 유능한 개인▴레벨2: 헌신하는 팀멤버▴레벨3: 유능한 관리자▴레벨4: 효과적인 리더▴레벨5: 겸손하고 결단력 있는 리더레벨 5는, 겸손이 결단력의 또 다른 이름임을 보여준다. 크롬웰 또한 이 정의에 가깝다. 전면에 나서지 않고, 연설하지 않으며, 전장에서 깃발을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추진력은 숨겨진 폭발력을 가진다. 겸손을 가장한 무서운 의지와 실행력이다.하지만 묘하게도 뒷맛이 씁쓸하다. 박수를 치기 쉽지 않다. 가려져 있다는 느낌, 어둡다는 생각이 따라온다. 그림자 같다. 성공 뒤에 숨어 있는 위험, 힘의 크기에 따라 늘어나는 그림자 말이다. 권력의 높이가 올라갈수록,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먼저 '사람'을, 그 후에 '무엇'을콜린스는 또 이렇게 말한다."먼저 사람을, 그리고 난 후에 무엇을(First who, then what)."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 누구와 함께할 것인가가 먼저라고 한다. 잘못된 사람을 조직의 버스에 태우면, 아무리 훌륭한 전략도 실패한다. 인재 버스 문제는 현실에서 훨씬 복잡하다. 누구를 얼마나 빨리 내려보낼 것인가, 그 한 가지가 승패를 가르기도 한다.크롬웰도 원칙에 맞게 움직였다. 왕의 의중을 읽고, 알맞은 사람을 제자리에 앉혔다. 앤 불린 지지파를 배치하고, 반대파를 제거하며 권력의 균형을 설계했다.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사람을 모았으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가 남았다. 권력자의 변덕으로 앤 불린은 몰락했고, 크롬웰도 함께 무너졌다.■ 오너의 3심, 그리고 현대의 리더십현대 조직에서도 권력자의 변덕은 존재한다. 오너의 욕심(慾心), 의심(疑心), 변심(變心)—'3心'에 따라 조직이 흔들리고, 뛰어난 경영진을 배치했어도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정치도 다르지 않다. 권력을 잡지 못하면, 변화와 혁신의 기회를 잃는다.현대 기업에서는 회장 한 사람의 결정이 수천 명의 운명을 흔들기도 한다. 회장의 아바타 CEO가 바뀌면서 전략 방향이 바뀌고, 중간 관리자들이 갈팡질팡하는 상황도 흔하다.그러나 동시에 현대 조직은 분산된 권력 구조, 주주, 이사회, 시장 평가라는 필터를 통해 리더십을 시험받는다. 한 사람의 변덕만으로 모든 것이 좌우되지는 않는다.크롬웰은 묻는다."권력을 잡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콜린스가 질문한다."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그리고 그 다음 무엇을 할 것인가?"두 질문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겹치고, 이어지며, 결국 하나가 된다. 그렇게 해야만 시행착오와 실패, 파국을 피할 최소한의 기회를 얻는다. 권력은 단순히 잡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올바른 사람과, 올바른 시간에, 올바른 일을 해야만 의미가 생긴다.권력과 위대함의 교차로에서 우리는 배운다.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고, 선택과 책임이 늘 함께 서 있다는 것을. 권력은 흔들릴 수 있지만, 흔들릴수록 방향을 잡는 힘이 생긴다. 우리가 보는 것은 단순한 승패가 아니라, 인간과 시스템, 그리고 역사와 미래가 얽힌 복합적 균형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길을 걸으며, 우리는 결국 어떤 길을 택할지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한다는 것을. ━김영태은행원, 신문기자와 방송기자, 벤처 창업가, 대기업 임원과 CEO, 공무원 등을 지냈다. 새로운 언어와 생태계를 만날 때마다, 책을 읽고, 문장을 쓰며 방향을 찾았다. 경영혁신과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경험과 성과를 쌓았다. 현재 컨설팅회사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설립, 대표를 맡고 있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④]모닝 커피가 당신을 배신할 때 - 카너먼의 '노이즈'와 카뮈의 '전락'
문제는 모닝커피다가끔 과거의 결정을 곱씹는다. 뒤집기도 한다."이건 좀 아닌 것 같네"라며 반려했던 제안서나, "이 사람은 우리 회사와 안 맞는 것 같은데"라고 밀어뒀던 이력서 같은 것들. 며칠 뒤 다시 마주하면 "내가 왜 이 걸 못 봤지?" 하며 머리를 긁적일 때가 있다.그 사이 문서가 달라진 것도, 내가 철학자가 된 것도 아니다. 바뀐 건 그날의 기분, 수면의 질, 아침에 마신 커피 한두 잔, 그것도 아니면 공복혈당 수치일 거다. (의학계는 혈당과 판단의 상관관계를 충분히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이런저런 일들에도 우리는 자신을 합리적이고 일관된 존재라고 생각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지 않다고.오류에도 계급이 있다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은 '노이즈(Noise)'에서 그 믿음을 깬다. 심지어 오류에도 계급이 있음을 보여준다.총오류는 편향(Bias)과 소음(Noise)으로 구성된다. 편향은 과녁 한쪽에 몰려 박히는 총알처럼 예측 가능한 오류다. 반면 소음 혹은 잡음은 총알이 이리저리 흩어져버리는 무작위적 변동성이다. 편향은 적어도 패턴이 있다. 소음에는 없다. 그래서 더 치명적이다.같은 문서를 두고도 어제의 나는 반대, 오늘의 나는 찬성을 외친다. 어제의 판사는 아침을 건너뛴 엄벌주의자, 오늘의 판사는 점심 배불리 먹고 난 뒤라 온정주의자가 된다. (범죄자에게는 판사의 식사 시간이 최대 변수라는 연구도 있다. 세상은 생각보다 밥심으로 굴러가는 것인가.)알베르 카뮈의 '전락(La Chute)'은 이 문제를 도덕적 차원으로 풀어낸다.주인공 클라망스는 정의로운 변호사로 칭송받았다. 그는 스스로의 판단이 공정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강에 몸을 던지는 여성을 목격하고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 이 작은 침묵이 그의 세계를 뒤흔든다. 그는 결국 자신이 위선자였음을 고백한다. 끝내 무너진다.사실 우리도 매일 비슷한 침묵을 반복한다. 다만 기록되지 않을 뿐이다.클라망스의 추락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거대한 편향의 드라마 같다. 자신이 '옳다'는 착각, 그 무지가 만든 오만이 버무려진, 막장 드라마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비록 그가 고백했다고는 하나, 그 판단조차도 여전히 날씨와 기분에 흔들렸을 것이다. 게다가 고백으로 드러났을지언정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소음은 오늘도 내일도 계속된다.테이블 배치가 달라지면다른 이야기를 보태볼까 한다. 상대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밀고 당기는, 협상에 대한 것이다.협상학의 대가 하워드 라이파와 로저 피셔는 환경을 어떻게 세팅하느냐가 결과를 바꾼다고 설명한다. 협상은 일견 논리와 의지의 힘겨루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테이블을 어떻게 차리느냐의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거다.와인잔이 올라간 자리에서 오가는 말과, 종이컵 커피가 놓인 자리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다를 수 있다. 같은 사람들이 같은 문제를 두고도, 어제는 평행선, 오늘은 극적인 타결일 수도 있다.그런데 그 차이는 대개 협상 테이블, 협상장소의 분위기가 만든다. (은행원 시절,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도 굳이 고객을 찾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배웠다. 영업은 날씨가 전부라고 했던 것도 기억에 있다.)이 대목이 카너먼의 소음 개념과 기묘하게 포개진다.협상도 결국 소음의 바다 위에서 출렁인다. 판사가 점심 메뉴에 흔들리듯, 협상가는 조명, 의자 배치, 심지어 첫 발언자의 목소리 톤에 흔들린다. 그러니 협상이란 이성의 게임이 아니라, 소음을 줄이고 환경을 조율하는 무대 연출에 가깝다고 할 수밖에.더 나은 판단은 겸손에서 나온다현대인의 전락은 한 번의 위선적 침묵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의 무수한 소음이 쌓여 이루어진다.채용 면접, 인사 평가, 신제품 출시, 법정 판결까지. 우리는 모두 명확한 기준이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직전의 커피 한 잔, 회의실 온도, 심지어 전날 야구 경기 결과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배 위에서 키를 잡는 항해다.이 모든 이야기는 결국 다음 질문으로 수렴한다."우리는 왜 늘 우리의 판단이 옳다고 확신하는가?"그리고 그 답-완벽한 판단은 없다는 것-은 나와 있다. 이미 알고 있다.소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조금 더 겸손해진다. 그 겸손이야말로 더 나은 판단의 출발점일 것이다.사정이 그러하니, 결론에 앞서 다시 묻기를.그때 내린 당신의 결정은 정말로 옳았는가.아니면 단지 운이 좋았던 것인가. 그 판단은 편향이었나, 소음이었나. 애초에 테이블이 잘못 차려진 건 아니었나.아니, 더 근본적으로는 그 자리에 앉을 필요조차 없었던 건 아닌가. ━김영태은행원, 신문기자와 방송기자, 벤처 창업가, 대기업 임원과 CEO, 공무원 등을 지냈다. 새로운 언어와 생태계를 만날 때마다, 책을 읽고, 문장을 쓰며 방향을 찾았다. 경영혁신과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경험과 성과를 쌓았다. 현재 컨설팅회사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설립, 대표를 맡고 있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③]미꾸라지가 공룡을 이기는 방법 – '규칙 없음'과 '덕시티'
"우리 회사의 업(業)은 뭘까." 사장 시절 종종 던졌던 질문이다. 그러면 회의실은 숨죽인 듯 고요해진다. 사장의 특권은 마음껏 질문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언젠가는 스스로 답을 내야 한다는 게 진짜 문제였다.이런저런 토론 끝에 의견이 모였다. 공간과 공간을 잇는 모든 여정에서 고객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회사, 모빌리티 서비스 기업.이어지는 질문은 자연스럽다. "그럼 경쟁사는?" 포지셔닝은 터를 잘 잡는 일이다. 상대를 정해야 우리의 위치도 선명해진다. 여러 후보가 나왔고, 넷플릭스로 정리됐다. 이동의 경험을 단순한 효율이 아닌 즐거움으로 바꾸자는 목표였기에, 엔터테인먼트의 혁신자 넷플릭스가 제격이었다.넷플릭스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책이 있다. '규칙 없음 (No Rules Rules)'이다. 넷플릭스 공동설립자 리드 헤이스팅스와 인시아드 교수 에린 마이어가 함께 쓴 책이다. 서문에 이렇게 적혀 있다."넷플릭스는 다르다. 우리의 문화는, 규칙이 없는 것이 규칙이다."당시 블록버스터 같은 공룡 기업에는 없었지만, 미꾸라지였던 넷플릭스에는 다른 게 있었다. 문화였다. 자율이었고, 신뢰였다. 복장 규정, 휴가 규정, 출장비 지침 모두 딱 한 문장으로 정리됐다. "회사를 위해서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중요한 건 규칙을 없앤 것이 아니다. 넷플릭스는 '좋은 사람'을 뽑고, 그 사람을 믿었다. 성과와 문제를 둘러싼 피드백을 거리낌 없이 주고받으며, 자기 통제가 가능한 조직을 지향했다. 능률보다 혁신, 절차보다 사람. 이들에게 자율은, 스스로 자신을 단련할 줄 아는 사람에게 보내는 신뢰였다. 이 모든 것이 기업문화로 자리잡았다. (넷플릭스가 창업 초기의 기업문화를 지금까지 유지, 발전시키고 있는가에 대한 것은 다른 문제다. 창업(創業)보다 수성(守城)이 더 어렵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닐 것이다.)회사도 낯선 시도에 나섰다. 연결과 확장을 전략으로 고객가치를 높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찾아 실행했다. 과하다 싶은 목표를 설정하게 하고-매출 목표는 사장실에 붓글씨로 적혔다. 작심의 의례처럼-, 안 해본 방법을 찾게 했다. 복장 규정을 없앴고, 성과관리, 과정관리 기법을 도입했다.이전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회사들과 손을 잡았다. 모빌리티 시스템을 만들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와 시큐리티 서비스 기업과 업무협약을 했다. 철도여행용 도시락을 만드는 회사, 캐릭터와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기업, 심지어 프로야구 구단과도 함께 하면서 고객경험을 끌어올리기 위한 실험을 했다.모든 시도 중에서 몇몇은 실패했고, 몇몇은 유야무야 끝났다. 그러나 분위기는 분명 달라졌다. 그것만으로도, 사상 최대 매출을 기록했다.이와 대조되는 세계를 다룬 소설이 있다. 스웨덴 작가 레나 안데르손이 2006년 발표한 소설 '덕 시티(Duck City)'다.덕시티는 겉으로는 풍요롭지만, 안으로는 숨막히는 도시다. 패스트푸드와 다이어트를 동시에 강제하며, 뚱뚱한 사람들을 단속하는 곳.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비정상을 규제하는 도시. 그런데, 정상은 대체 뭔가? 누가, 왜 정하는가.덕시티에는 규칙이 넘쳐난다. 어기면 문제고, 잘 지켜도 문제다. 규칙을 잘 지키면 또 다른 규칙이 생기고, 그 규칙을 관리하는 새로운 부서가 생긴다. 도시는 점점 복잡해지고, 천천히 조용히 멈춰간다. 사람들은 규칙을 두려워했고, 아무도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됐다.규칙은 처음에는 선의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새 사람 위에 올라탔다. 모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장치가, 끝내 아무도 돌보지 않게 된 것이다.어디서 많이 본 풍경 아닌가. 대마불사(大馬不死) 공룡기업들이 몰락하는 방식과 닮았다. 더 잘하려 만든 규칙이 새로움을 가로막는 익숙한 명분이 되는. 규칙은 지켰을지 몰라도 성과는 사라지는 모습 말이다. 넷플릭스와는 반대편에 있다.중요한 건, 무엇을 지키느냐가 아니라 왜 지키는가다."나는 왜 이 규칙을 지키는가. 언제까지 이 룰을 따를 것인가."이 질문이 조직을 움직이게 한다.무언가를 시도하려 할 때, 누구는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고, 또 누구는 해야 할 이유를 찾는다. 내 결론은 이렇다."하지 말아야 할 고만고만한 열 가지 이유와 해야 할 단 하나의 똘똘한 이유가 있다면, 하라."열 가지 이유는 대개 규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고, 단 하나의 이유는 낯설지만 본질에 닿아 있다.기왕이면, 낯선 쪽이 낫다. 특히 공룡과 싸워야 하는 미꾸라지라면. 미꾸라지는 작고 유연하지만, 감각은 그들이 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기다. 감각이 문화가 되는 순간, 그 기업은 더 이상 미꾸라지가 아니다. 중심을 흔들며 비상한다. ━김영태은행원, 신문기자와 방송기자, 벤처 창업가, 대기업 임원과 CEO, 공무원 등을 지냈다. 새로운 언어와 생태계를 만날 때마다, 책을 읽고, 문장을 쓰며 방향을 찾았다. 경영혁신과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경험과 성과를 쌓았다. 현재 컨설팅회사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설립, 대표를 맡고 있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②]정석과 곡선 사이: 아마존과 카프카, 그리고 설득의 기술
회의는 지루했다. 예전의 한국 축구 같았다. 빌드업만 이어졌고, 유효슛은 없었다. 중원에서 공을 돌리다 이렇다 할 순간 없이 연장으로 가는, 선수보다 해설자가 더 바쁜 그런 경기 말이다. 설명은 설명을 불렀고, 알 듯하면 잊혔다. 회의의 목적조차 흐려져 갔다. 한 시간이 지나면 습득한 정보의 거의 절반이 사라진다는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을 실증하는 자리 같았다.우리는 수많은 회의에 둘러싸여 산다. 회의가 곧 일이다. 회의를 많이 하면 회의적(懷疑的)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다. 회의의 대부분은 설명하는 자리다. 설명으로는 실행은커녕 공감조차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다.우리는 설명을 요구받아 왔다. 질문엔 정답이 있다는 전제, 논리에는 정석이 있다는 믿음에 길들여졌다. '수학의 정석'이 그렇지 않은가. 우리나라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 그러나 정석은 정답을 설명하는 책이다. 남이 짠 공식을 따르는 기술이지, 나만의 길을 찾는 방법이 아니다. 남의 문을 여는 열쇠일 수는 있어도, 나의 문을 여는 지도는 되지 못한다.설명과 설득은 다르다. 설명은 원인과 결과를 직선으로 잇는다. 효율적일 수는 있지만 오래 남지 않는, 선생의 방식이다. 설득은 곡선이다. 내러티브를 던지고, 청자가 따라오게 만든다. 효과적이다. 처음엔 느려도 한 번 마음을 얻으면 오래 가는, 동료의 방식이다.설명은 잘해야 본전이지만 설득은 잘하면 대박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의 강한 기업은 설명하지 않는다. 고객을, 그리고 스스로를 설득해 간다. 아마존이 그렇다. 이 회사는 이름 자체가 신조어가 된 보기 드문 기업이다. 소비자의 습관만이 아니라 산업 생태계를 통째로 바꿔놓았다. 물론 기업에 좋은 일이 세상 모두에게 좋은 일은 아닐 수 있다.아마존 관련 책도 많다. 내 서가에 꽂힌 것만 해도 열 권 가까이 된다. 공룡, 초토화 같은 자극적 표현이 표지에, 띠지를 덮는다. 승자독식의 어두운 그림자를 고발하는 '기업판 아마존의 눈물' 다큐멘터리 같다. 하지만 드물게, 이 거대한 조직의 '일하는 방식'에 집중한 책도 있다. '순서파괴(Working Backwards)'가 그렇다. 창업자 제프 베조스와 함께했던 콜린 브라이어와 빌 카가, 제목 그대로 '거꾸로 일하는 방식'을 소개한다. 나는 그 방식에서 아마존의 지속성장을 이끈 에너지, 설득의 힘이 만들어진다고 본다.아마존은 파워포인트(PPT)를 금지한다. 대신 여섯 페이지짜리 보도자료 형식의 내러티브 문서를 쓴다. 회의는 발표자가 설명하는 대신, 모두가 이 문서를 조용히 읽으며 시작된다. 그리고 질문이 오간다. 발표 → 질문 → 결론이 아니라, 결론 ⤳ 이야기 ⤻ 질문의 순서다. 설명의 직선이 아니라, 설득의 곡선을 따른다.말은 흐르지만, 글은 남는다. 말보다 글을 쓸 때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 무엇을 믿는지, 어디서 어긋났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해서 이야기, 내러티브가 만들어진다. 나는 투자유치(IR)나 프로젝트 계획을 만들 땐 숫자나 그림을 찾기에 훨씬 앞서 스토리를 쓴다. 이 스토리가 그럴듯하면 근거를 붙이고, 아니라면 버린다.설득의 곡선은 거대한 조직에서도, 개인의 생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프란츠 카프카의「법 앞에서」라는 짧은 소설이 있다. 소설에서 법은 하나의 건축물로 그려지는데, 종교적으로는 구원과 영생을, 사회적으로는 자유와 해방 등을 상징한다.한 시골 사람이 법을 찾아 먼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문지기는 "지금은 안 된다"며 문을 막는다. 그는 묻지 않고 기다린다, 평생을. 죽음이 다가오자, 그는 문지기에게 묻는다. "모두가 법에 들어가려 하는데, 왜 아무도 오지 않았죠?" 문지기는 말한다. "이 문은 자네만을 위한 문이었지." 그 문은 결국 열리지 않는다.설명에 길들여진 사람은 자신을 설득하지 못한다. 정답을 좇는 정석이 아니라,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문을 열고(문이 열리고),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나는 문제에 부딪히면 거꾸로 읽는다. 결과에서 시작해 원인과 행위 사이에 어떤 이야기의 곡선이 필요한지를 상상하며 써내려 간다. 그렇게 하면 나부터 설득할 수 있다. 나를 설득하지 못하면, 남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김영태은행원, 신문기자와 방송기자, 벤처 창업가, 대기업 임원과 CEO, 공무원 등을 지냈다. 새로운 언어와 생태계를 만날 때마다, 책을 읽고, 문장을 쓰며 방향을 찾았다. 경영혁신과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경험과 성과를 쌓았다. 현재 컨설팅회사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설립, 대표를 맡고 있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①]이디스 워튼과 댄 히스의 선택 : 염색은 업스트림이다
일년에 서너번쯤 머리카락을 염색한다. 새치가 절반쯤 올라오면서부터다. 미용실에 가 검은색과 흰색을 섞은 회색, 애쉬그레이를 고른다. 이 색깔이 나오려면 머리카락에서 색소를 제거하는 탈색 과정을 두차례 거쳐야 한다. 각각의 과정은 숙성의 시간을 포함하고 있어 서너시간은 족히 걸린다. 공을 들여 염색을 해도 오래 가지 않는데, 열흘쯤 지나면 애쉬그레이에서 카키그레이로 변한다. 그 뒤 또 열흘 후엔 옐로우그레이로 변하는데, 늦가을 이른 저녁 시간의 들판 같은 색깔이다. 머리를 자주 감으면 이 과정이 빨리 지나가고, 덜 감으면 천천히 간다.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출연한 영화 중 '순수의 시대'(The Age of Innocence)라는 작품이 있다. 마틴 스코세이지가 감독이었고, 루이스와 미셸 파이퍼, 위노나 라이더 등이 출연했다. 1993년작. 원전은 미국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은 여성작가 이디스 워튼의 동명의 장편소설이다.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분했던 아처 뉴랜드의 삶은 계산된 선택으로 만들어졌다. 사회적 지위, 가문, 심지어 도덕성까지도. 하지만 그의 속마음-사랑이라는 이름의-은 충분히 계산되지도, 선택되지도 못했다. (영화의 마지막은 쉰 일곱이 된 아처가 젊은 날 선택하지 않았던 사랑을 찾아가지만 또다시 선택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장면이다. 그의 백발이 모자 아래에서 빛난다.)아처는 그래왔다. '미래를 알 수 없는 것'은 내려놓았고, '지금은 최선인 선택'을 붙잡았다. 그는 모범 시민이 되었고, 가문의 명예를 지켰다. 성공적인 삶이라는 평판을 보상으로 받았다. 그리고 함께 하지 못한 세월에 대한, 깊은 후회를 남겼다. (돌아섬 또한 사랑의 표현일지도 모를 일이다만.)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보는 방법도 있다. 경영전문가 댄 히스의 '업스트림'(Upstream)도 그중 하나겠다.우리는 흔히 문제가 발생한 뒤에야 그것을 해결한다. 아이가 물에 빠지면 구한다. 두 번째 아이도, 세 번째 아이도. 그런데 누군가는 물가를 거슬러 달려가기 시작한다."어디 가?" "상류에 가서 도대체 누가 아이들을 물에 빠뜨리는지 보러."문제가 발생한 뒤에 대응하는 것, 다운스트림만으론 부족하다. 눈앞의 문제만 처리하다 보면, 구명조끼는 될 수 있지만, 구조선은 되지 못한다. 원인을 찾아 없애야 한다. 이게 업스트림이다. 댄 히스는 책에서 업스트림에 성공한 다양한 사례를 소개한다. 어렵지만 해보라는, 보상이 꽤 크다는 주장과 함께.업스트림 접근법은 품이 많이 든다. 알아주지 않을 때도 많다. 홍보(PR)와 대관(GR) 업무 총괄 시절, 조직과 예산을 유지(확대)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빈 카운터(Bean Counter) 재무책임자(CFO)를 만나면 얼마나 좀스럽게 논쟁해야 했는지. 평화의 시기는, 아무 일도 없어서가 아니라 아무 일이 없게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는데 말이다.아처가 업스트림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그의 계산 속에 원인을 포함시켜 놓고, 그 원인이 시간에 따라 어떤 작은 변화들을 만들고, 최종적으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를 미리 생각해봤다면 어땠을까. 예컨대 당장의 결혼으로 얻을 수 있는 지위 가문 도덕성 같은 것들도, 추후 노력으로 가질 수 있는 것임을 사전에 알았다면 어땠을까. 달라졌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은 아처의 선택이 실패한 것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후회는 줄어들지 않았을까.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의 계산된 선택이나 계획이 아니라, 넓게 오래 볼 수 있는, 기다림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시야(視野)가 아닐까 싶다. 눈앞의 현상이 아니라 그 원인을 찾으려는 행동, 이미 지나간 결정이 남긴 무늬까지 되짚으려는 겸손, 애초에 누가, 언제, 무엇을 놓쳤는지를 기꺼이 질문하는 자세 같은 것들 말이다. 다만 그런 삶은 느리고, 비효율적이라서 종종 앞서가는 이들에게 조롱당할 수도 있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믿는다, 시야의 힘을. 계획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고 태도라는 것을.염색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할까 한다. 다시 말하지만, 애쉬그레이로 염색하려면 탈색 과정을 거쳐야 한다. 머리카락에 뿌리 깊게 박힌 색소를 다스리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염색의 업스트림이다. ━김영태은행원, 신문기자와 방송기자, 벤처 창업가, 대기업 임원과 CEO, 공무원 등을 지냈다. 새로운 언어와 생태계를 만날 때마다, 책을 읽고, 문장을 쓰며 방향을 찾았다. 경영혁신과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경험과 성과를 쌓았다. 현재 컨설팅회사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설립, 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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